하루, 하루 차를 달이고 마시는 나날들이다. 필상에 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어떤 날은 고향의 집처럼 문 닫고 하루 종일 잠을 잔다. 근심 걱정 모두 털어버리는 홀가분한 마음이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삶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작고 작은 분쟁들은 또 다른 암투로 번지고, 그 여파에 치이고 치인 것이라고 답한다. 혹자는 술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이고, 독서와 글씨 쓰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다독인다. 젊은 혈기에 앞장서서 금이니 옥이니 구별 못하고 날뛰었던 것, 이제야 생각하니 후회스럽기 그지없다고 답하고
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 같은 가을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는 미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낙엽들이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 이처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요, 사유思惟의 계절인 것이다. 가을바람은 늘 귓가를 스치며 붉게 물들인다. 마치 단풍처럼 말이다. 가을 속에는 예전부터 사상가들의 삶과 시간 이었다. 차를 마시고 책을 보았다. 낙엽을 밟으며 산책을 떠나곤 했다. 은둔의 시간이다. 때론 긴 여행의 길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사상의 정수리를 향해.가을을 품었던 사상가 장유. 윤근수尹根壽, 김장생金長生의
대사에서 장검 노래 바야흐로 부르면서/ 문원의 목이 그야말로 컬컬해질 때옛 친구가 소식을 전해 왔나니/ 새로운 그 미각이 술과 안주 압도하네팔팔 끓인 죽순국 얼마나 기막힌지/작설 넣어 달인 차 혀에 설설 감치누나번거롭게 부채 따위 부칠 필요 있으리까/ 올여름은 서늘하기 가을 같으니이식의 ‘차와 죽순을 부쳐준 한태수에게 사례하며’폭염의 계절이다. 차 향기가 가신 산천곳곳에 뜨거운 열기가 소나기처럼 내리고 있다. 산천도 중생도 뜨겁다. 그 뜨거운 계절 물을 팔팔 끓여 뜨거운 햇차 한잔을 털어 넣는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징광사澄光寺와 자생차(400년부터)징광사터로 부터 십리 지점엔 마한의 부사분사국不斯濆邪國의 치소治所 분촌(分村, 옛부숫골, 金村)과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 편입된 부사군夫沙郡의 도읍지 고읍古邑이 있다. 일찍이 대가람이 들어설 여건이 형성되었다. 동진의 마라난타는 마한에 이미 와서 366년 불회사를 창건한다.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384년 불갑사를 창건하는 등 잇단 불사를 일으킨다. 이때 징광사(벌교읍 징광이 산173번지 일대)도 창건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김주희 등).박용구 등의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마라난
대한민국녹차수도 보성군차역사를 밝혀주는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본지는 보성군의 자료제공으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보성군차역사를 연재한다.보성에는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보성군사’의 기록이 있다. AD369년(근초고왕 24년) 3월 마한馬韓의 비리국卑離國이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으로 통합될 때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설이다. ‘비리’는 마한의 소국 이름에 많이 붙여지고 있는 말이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에는 모두 54국이 있었다. 마한의 ‘비리’의 어원은 ‘불火’이라고 생각한다. 마한의
제다철이 왔다. 지금 남도의 제다 현장 곳곳에서는 ‘좋은 차’ 제다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차계의 한편에서 한국 차의 전형은 제다법에 있어서 ‘덖음차’(炒製茶), 그 이상적인 모델은 ‘초의차’로 일컬어지고 있다. ‘초의차’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지금 남도의 제다 현장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의차’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비사비 혹은 와비사비의 미학 등의 말은 매우 익숙한 용어 일 것 이다. 와비와 사비의 미학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은 단순한 미학을 넘어서 일본의 제도권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아 현재 일본의 아름다움을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야나기와 동시대인인 기타오지 로산진은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 대해 모순점들을 지적 했다. 이와 관련 본고 에서는 기타오지 로산진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 비판을 통해 두
보이차를 발효시키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맞춘 창고에서 일정기간 보관한 차를 입창차라고 한다. 1990년을 전후하여 홍콩에서는 오랜 세월 보관되었던 보이차가 집중적으로 유통되면서 보관 상태에 따라 이름들이 만들어 졌다. 보이차 병면에 매변이나 백상이 생긴 차는 습창차로, 반면 병면이 깨끗한 차는 건창차로 소개되었다. 또한 습창차는 안좋은 보이차로 건창차는 좋은 보이차로 인식되기도 했다. 검증된 자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같은 인식은 2000년 중반부터 보이차의 열풍과 함께 보이차 시장의 흐름을 끌고 갔다.과학
이우환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둘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불완전에서 오는 완전함의 미학이 그것이다. 완전함이라는 것은 더하기나 곱하기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더해나간다고 할지라도 완전에는 도달 할 수 없다. 비워냄을 통해 채우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임을 야나기는 그의 저서에서 수차례 강조한다. 이우환 역시 비워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논한다. 본고에서는 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이자 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나라 안팎이 비상사태다. 바이러스는 온 지구를 돌며 인간의 생명을 좀 먹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침투자들의 습격은 지구촌을 벌벌 떨게 하고 있다. 누구라도 확진자가 될 수 있다. 극도의 긴장감과 경계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물마시다 목에 사레라도 들면 나오는 기침을 억지로 집어 삼킨다. 기침은 곧 코로나19의 증세 중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다. 누구 안에 감염균이 잠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습격당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공연예술, 종교
현대사회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 비해 물건과 풍요가 넘치고 있다.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수립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에 분명하다. 풍요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물건과 행위들을 어떠한 기준에서 이쁘다 아름답다라고 분류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기준이라는 것은 어떠한 준거하에 성립하는가? 매우 현학적인 이야기 일 수도 있으나, 입을 옷을 고르는 것부터 취미생활에 사용할 도구를 고르는 것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미의 기준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여러 예술가및
홍인은 신중국 건국 이후 50년대에 생산된 차이다. 홍인은 생산 시기에 따라 조기, 후기로 나누어지며, 포장지의 인쇄에 따라 정홍인, 갑급홍인, 일점홍인, 쇄자홍인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홍인은 1990년 전후 홍콩의 창고로 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1920년대 몇 종류의 호급차와 골동보이차의 전설을 이룬 1950년대의 홍인은 최고의 가격으로 골동보이차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호급보이차의 맛에 익숙한 50년대 홍콩의 차시장에서는 신중국 건국 후의 첫 작품인 홍인의 쓰고 떫은 강렬한 맛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보이차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골동 보이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수요에 못 미치는 한정된 수량은 그 가격이 상승할 밖에 없었다. 골동보이차는 이렇게 전설이 되어 일반적인 보이차 애호가들은 마실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중국 역시 차 문화의 보급에 따라 보이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다보니 시장은 신차의 투자로 이어졌다. 골동보이차 가격 상승으로 보이차 투기로 활발해지면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난다. 보이차는 출시되자마자 가격이 몇배나 상승되기도 하고 있다. 품질이 급격히 좋아지거나 그
신종 코로나로 세상은 지금 카오스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가져다준 파괴의 역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 또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코로나다. 코로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져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구반대편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아마존의 산불, 호주의 산불, 미국의 산불이 가져온 효과는 우리에게 추운 겨울을 빼앗았다. 그 결과로 피해를 보는 것들이 있다. 겨울철 축제로 먹고 살았던 사
모든 물건엔 각기 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명작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년의 어느 날 추사가 모처럼 난을 칩니다. 이십여 년 만이라지요. '달준達俊'이라는 어린 시동에게 그려주고 싶어서 마음을 냅니다. 붓 몇 가닥에 무심한 선적 정취가 군더더기 없이 오롯합니다.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들린 객이 그만 욕심을 냅니다. 체면불구하고 지청구를 댑니다. 그 덕에 그림의 주인이 바뀝니다. 추사가 난蘭 그림을 그에게 주되, 여백에 잔뜩 그 사연을 적어 놓습니다. 이른바 추사체로 도배가 되었겠지요
곧 민족의 명절인 설이다. 설은 온 가족이 모여 올 한해를 건강하고 무탈하게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날에는 온 가족이 함께 만든 음식을 따뜻한 마음으로 나눠 먹는다. 설은 그래서 가족들의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은 늘 그렇듯 불공평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설날 함께 먹을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광명한 사회에 아직도 살얼음이 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매년 이럴때면 나타나는 측은지심의 나한들이 있다. 광주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나한이 5년전부
차계의 유일한 인터넷 신문인 뉴스 차와문화에서 2020년 새해를 맞아 위기에 빠진 한국차계를 진단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인 한국차문화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에 대해 (사)남도정통제다. 다도보존연구소 최성민 소장이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에 전문을 싣는다.앞글에서 한국 차문화 쇠락의 이유로 ‘다례가 중심이 된 전통 차교육’을 지적하고, 그것들은 1980년 후반에 정립된 ‘그들만의 리그’라고 분석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거도 없고 철학성도 없이 최근에 급조된 국적 불명, 정체 불명의 상업성 ‘다례’라는 것이
어느 날 이메일로 문의가 왔다. 한국을 언제 방문하는데 서울에서 한국 차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는가. 또 하나의 문의가 왔다. 중국에서 차회를 하는 단체장이 오는데 차를 마시면 교류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는가. 두가지 질문에 답을 해줄 수가 없는 것이 오늘 한국차문화의 현실이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우리차문화를 상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어찌 어찌 아는 차회에 부탁을 하면 가능하기도 하지만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상시적으로 우리차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외국과의 차교류도 마찬가지다. 행사위
34년간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락구기법을 연구하고 있는 양동엽작가는 자연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발색작업을 작품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작품의 소장자에게 항상 가까이에서 즐겁게 즐길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양동엽 작가는 “ 그릇은 아름다워야 하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워야하고, 사용할 때 촉감이 좋아야 한다고 봅니다. 락구다완은 가루차의 생명인 격불과정에서 거품이 잘생겨나야 하고 차 맛이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도예아카데미연구원 원장인 해동 양동엽은 캐나다 밴프 예술센터와 캐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