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난蘭 그림을 그에게 주되, 여백에 잔뜩 그 사연을 적어 놓습니다. 이른바 추사체로 도배가 되었겠지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 겁니다. 그런 연유로 말년의 명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로부터 전각을 배워 일가를 이룬 '소산 오규일'의 소유가 됩니다. 이 ‘불이선란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된 상태였습니다.
추사가 난蘭 그림을 그에게 주되, 여백에 잔뜩 그 사연을 적어 놓습니다. 이른바 추사체로 도배가 되었겠지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 겁니다. 그런 연유로 말년의 명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로부터 전각을 배워 일가를 이룬 '소산 오규일'의 소유가 됩니다. 이 ‘불이선란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된 상태였습니다.

모든 물건엔 각기 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명작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년의 어느 날 추사가 모처럼 난을 칩니다. 이십여 년 만이라지요. '달준達俊'이라는 어린 시동에게 그려주고 싶어서 마음을 냅니다. 붓 몇 가닥에 무심한 선적 정취가 군더더기 없이 오롯합니다.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들린 객이 그만 욕심을 냅니다. 체면불구하고 지청구를 댑니다. 그 덕에 그림의 주인이 바뀝니다. 추사가 난蘭 그림을 그에게 주되, 여백에 잔뜩 그 사연을 적어 놓습니다. 이른바 추사체로 도배가 되었겠지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 겁니다.

그런 연유로 말년의 명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로부터 전각을 배워 일가를 이룬 '소산 오규일'의 소유가 됩니다. 이 ‘불이선란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2018년 11월 24일자로 이 작품이 기증됩니다. 기탁했다가 기증한 주인공은 올 들어 구십 세가 되신 손창근. 제가 그 즈음에 귀국하던 비행기의 주말섹션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가슴이 벅차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손창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컬렉션은 ‘불이선란도’만이 아닙니다. 15세기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 겸재 정선의 『북원수회첩』 ’ 등 삼백사점에 달합니다. 컬렉션 중에는 정선, 심사정, 김득신, 전기, 김수철, 허련, 장승업, 남계우, 안중식, 조석진, 흥선대원군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탁과 기증은 부전자전이기도 합니다. 손창근의 부친인 손세기 역시 지난 이천칠십사년에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제1624호) 등 고서화 이백여 점을 기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 부자는 개성 출신의 실업가로, 개성인삼으로 큰 부를 이룬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소장품의 상당수는 사실 손재형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서예書藝'라는 개념을 처음 제창한 서예가 손재형이 칠십년대 초반 국회에 진출하였다가, 그만 소장품의 대부분을 명동의 사설금융업자인 이근태에게 잡혔다가 손세기에게 인수된 것입니다. 그런데 손재형에서 이근태를 거쳐 손세기, 손창근으로 이어진 컬렉션의 백미는 사실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입니다. 바로 추사의 그 유명한 작품이지요. 또한 이 대목이 중요한데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다가 기증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손재형과 불이선란도

그 만큼의 무게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지요. 여러분도 물론 아시겠지만, 세한도는 추사가 그렸지만 손재형에게서 다시 태어난 작품입니다. 그 이야기는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우선 손재형과 추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봅니다. 손재형은 김돈희에게서 황정견체를, 이한복에게서 오창석체를 배웠으며,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만의 필체인 소전체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스승이자 선배였던 이한복은 서화의 연구와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특히 추사의 전적을 모으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던 분입니다. 앞서 나온 ‘불이선란도’ 역시 그가 소장했던 작품이지요. 손재형 또한 추사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당호를 '존추사실尊秋史室' 혹은 '숭완소전실崇阮紹田室'이라고 쓸 만큼 열렬한 팬이기도 합니다. 그런 손재형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한도를 찾아온 이야기는 참으로 기연의 연속입니다.

당시 '세한도'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중국철학을 강의하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璘의 소장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도 추사연구로 받은 분인데,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추사관련 유물을 수집하느라 가산을 온통 쏟아 부은 분입니다. 그때 마침 '세한도'가 경매로 나오자 이유불문하고 낙찰을 받습니다. 경매에 붙인 이는 민영휘. 조선말의 고위공무원이자 정치가로서 왜정시대에 자작칭호를 받은 친일파입니다. 당시에 조선 최고의 부자소리를 듣던 이입니다. 암튼 후지츠카가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손재형은 즉시 동경으로 그를 찾아갑니다.

'세한도'를 돌려달라는 거지요. 당연히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근에 집을 얻어 후지츠카가가 들고 날 때마다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새벽이면 빗자루를 들고 문 앞을 쓸었다고도 합니다. 그러기를 두 달여. 후지츠카가 마침내 마음 문을 엽니다. 아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래도 손재형은 귀국하지 않고 집 앞을 지킵니다. 결국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건넵니다. '그대의 나라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석달 후 동경에서의 폭격으로 그의 수집품 중 일부가 불에 타게 됩니다. 추사의 세한도도 일본에 있었다면, 이때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칠백년 된 용단승설 네 덩이. 석파는 이 중의 하나를 우선에게 줍니다. 우선은 이 용단승설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중국의 전거를 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탑 속에 봉안된 내력을 유추해봅니다. 이 기이한 물건을 신물神物이라고까지 부르며 감격해 합니다. 이 용단승설과 관련해서는 뒷날 추사의 편지에 또 한 번 언급되어 나옵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추사는 ‘송나라 때의 소룡단 하나를 얻었다, 참으로 귀한 보물이다, 와서 꼭 보시라’고 초대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추사가 얻은 소룡단이 석파에게 남은 세 덩이 중 하나인지, 석파가 우선에게 준 것을 우선이 다시 추사에게 보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칠백년 된 용단승설 네 덩이. 석파는 이 중의 하나를 우선에게 줍니다. 우선은 이 용단승설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중국의 전거를 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탑 속에 봉안된 내력을 유추해봅니다. 이 기이한 물건을 신물神物이라고까지 부르며 감격해 합니다. 이 용단승설과 관련해서는 뒷날 추사의 편지에 또 한 번 언급되어 나옵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추사는 ‘송나라 때의 소룡단 하나를 얻었다, 참으로 귀한 보물이다, 와서 꼭 보시라’고 초대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추사가 얻은 소룡단이 석파에게 남은 세 덩이 중 하나인지, 석파가 우선에게 준 것을 우선이 다시 추사에게 보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일갑자가 지난 이천육년, 또 다른 후일담이 과천에서 마무리되어집니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가 과천시에 선친의 유물 일만여 점을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합니다. 그중에는 추사가 동생 김명희와 김상희에게 써 보낸 편지가 열세 점,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가 다섯 점,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가 네 점,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가 한 점입니다. 겉봉을 통해 수신인과 연대를 추정할 수 있어서 중요도가 더한 편지들입니다. 또한 추사연구에 보태라고 현금 이백만 엔도 함께 보내왔으니 가슴이 짠합니다.

후지츠카 아키나오 역시 넉넉지 못한 살림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뒤에 과천시에서는 추사박물관을 건립하고 지하일층에 후지즈카 기증실을 만들어 이를 기리게 됩니다.

기왕 말 나온 김에 ‘세한도’가 어찌하여 민영휘에게 들어가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던 것인지 살펴봅니다. 세한도가 그려진 때는 일천팔백사십사년이니, 삼다도에서 고독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절입니다. 날개가 다 꺽여 외로움이 극에 달했는데, 뉘 있어 그 마음을 위로해 주었겠습니까? 후지츠카가 과천시에 기증한 추사의 편지 중 네 편이 이상적에게 보낸 것이니 그것만 보아도 그 정리를 알 수 있습니다.

세한도와 민영휘

아무튼 세한도는 추사가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인데, 화폭에 씌여진 글씨로는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 있고, 낙관을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고 새겼습니다. 세한도란 ‘추운 겨울이 지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 然後知 松柏之後凋也.논어 자한편)‘는 뜻의 그림입니다. 추사의 겨울이 그만큼 혹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우선시상‘이란 ’우선이, 자네가 잘 보아 주소‘라는 말이요, 완당은 추사의 호입니다. 낙관 ’장무상망‘의 뜻은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마세‘라 함이니, 사제지간의 정리가 어찌 그리 끈끈할 수가 있겠는지요.

뿐만 아니라 이 ‘세한도’에는 추사 자신의 발문이 말미에 적혔고, 우선의 감격이 또한 남겨졌으며, 장악진 조진조 등 청나라의 문사 열여섯 분의 제찬題贊이 이어진 걸로도 유명해집니다. 뒤에 이 ‘세한도’는 우선의 제자인 김병선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아들인 김준학을 거쳐 민영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흔적이 역시 세한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김준학의 찬(贊)과 오세창과 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덧붙여진 겁니다. 물론 후지츠카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예까지 왔으니, 이제 난으로도 일가를 이룬 추사와 석파, 세한도의 주객인 추사와 우선, 그리고 추사의 문인인 우선과 석파의 찻일茶事도 살펴봅시다. 추사의 차사랑은 유명하거니와 석파와 우선은 어떠했을까요? 우선 이상적은 청나라에 다녀온 공식 기록만도 열 두 번이요, 당대에 유행했던 고증학뿐만 아니라 서화 골동에서도 일가견이 있던 분입니다. 중국의 소장 학자들과의 친분이 많은데다가, 북경의 유리창을 내집 드나들 듯 했으니 차를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요. 우선의 차감식안에 대하여는 따로 지면을 내겠습니다. 여기서는 석파 곧 흥선대원군 이야기로 가봅시다.

파락호, 혹은 상갓집개라 불리던 석파가 큰 꿈을 위해 디딘 첫걸음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 이장입니다. 석파가 당대의 지관 정만인을 통해 명당을 찾습니다. 후보지는 두 곳. 가야산 동쪽에는 두 번에 걸친 천자의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결론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가야산행. 문제는 천자가 나올 명당터가 고려시대의 절 가야사의 오층석탑자리라는 것이지요. 이 가야사를 차지하기 위한 석파의 꾀와 불굴의 의지는 이미 여러 야사의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된 바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오층석탑을 깨부수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는데, 석탑 속에서 몇 가지 복장유물을 얻게 됩니다.

작은 구리 불상과, 금으로 새겨진 경첩과, 사리 세 개와, 침향단과, 진주와, 백자와 단차병 두 개를 얻습니다. 단차는 용단승설로서 병마다 두 덩이씩 들어 있었으니, 모두 네 덩이를 얻은 셈입니다.

석파와 칠백년된 용단승설

칠백년 된 용단승설 네 덩이. 석파는 이 중의 하나를 우선에게 줍니다. 우선은 이 용단승설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중국의 전거를 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탑 속에 봉안된 내력을 유추해봅니다. 이 기이한 물건을 신물神物이라고까지 부르며 감격해 합니다. 이 용단승설과 관련해서는 뒷날 추사의 편지에 또 한 번 언급되어 나옵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추사는 ‘송나라 때의 소룡단 하나를 얻었다, 참으로 귀한 보물이다, 와서 꼭 보시라’고 초대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추사가 얻은 소룡단이 석파에게 남은 세 덩이 중 하나인지, 석파가 우선에게 준 것을 우선이 다시 추사에게 보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추사의 편지를 받은 초의가 소룡단을 맛보러 왔는가의 기록도 물론 전하지 않습니다,

한 시대를 나름대로 가로지르며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 세 사람의 풍운아, 추사와 우선과 석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권력의 부침과, 각기 치열한 학문과 예술혼, 그리고 한 덩이 차를 나누는 품차인으로서의 교류가 씨줄날줄로 짜여 한 폭의 향연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떠나 한 문중에서 동시대를 호흡하였으되, 각자가 피운 꽃은 같을 수가 없었는가 봅니다. 그렇게 그들이 가고, 그들이 남긴 유품도 흘러갑니다. 모든 물건엔 각기 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만, 물건이든 임자든 결국은 모두가 물처럼 흐르고 흐르는 것이 아닐런지. 혹 인연 따라 손에 스치기도 하고, 품에 안기기도 하나, 때가 되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거나 아님 연기처럼 날아오르는 것. 그대도 저도, 그 물건 혹은 그 임자가 아니신지.

PS: 석파의 ‘용단승설’에 관한 기록으로는 우선 이상적의 『은송당집』,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용단승설’이 언급된 추사 편지의 원본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정민 교수가 소개한 바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관 2층 서화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하고, 첫 전시로 ‘손세기·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을 연 바 있다. 과천의 추사박물관과 함께 반드시 돌아보심 어떠실런지.

 

SNS 기사보내기
차우림 이원종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