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의 경우에는 상기한 것과 같은 세습성, 선천적인 가치를 지녔으며 대량생산이 애초부터 불가하다는 특징을 지녀 일반 상품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골동품의 경우에는 상기한 것과 같은 세습성, 선천적인 가치를 지녔으며 대량생산이 애초부터 불가하다는 특징을 지녀 일반 상품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 비해 물건과 풍요가 넘치고 있다.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수립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에 분명하다. 풍요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물건과 행위들을 어떠한 기준에서 이쁘다 아름답다라고 분류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기준이라는 것은 어떠한 준거하에 성립하는가? 매우 현학적인 이야기 일 수도 있으나, 입을 옷을 고르는 것부터 취미생활에 사용할 도구를 고르는 것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미의 기준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여러 예술가및 미학자들의 기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어떤 것을 미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해 탐구하고 그를 통해 미의 기준을 수립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 보았을때에 소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한 골동품에는 어떠한 사회학적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한번 시험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 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걱정하는 따위의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소비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매우 근접한 영역을 차지하는 TV를 예시로 들어보자. TV는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과 함께 크기 및 디자인등을 통해 행복, 과시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현대인에게 후자야 말로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다. 현대 사회는 지금까지 어느 시대와도 다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는 것이 아닌 다양한 사물에 의해 둘러 쌓여져 있다. 환경이나 분위기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 가까이에, 그들이 존재하고 대화하는 곳에 살고 있기 보다는 현혹적인 사물의 유혹속에 살게 된 이후부터이다. 사물이 아무리 호사스럽고 풍부하여도 그것들은 인간 활동의 산물이며, 자연의 생태학적 법칙에서가 아니라 교환 가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들어보면 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에는 상점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라인 뒤에 세계의 각종 귀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많은 나라들을 거쳐온 이들 품목 모두에는 언제나 빠짐없이 가격표가 붙어있다. 이 가격표에는 간단 명료한 기호인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다. 유통과정에 등장하는 상품의 모습은 모두 똑같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서론)현대사회 사물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누적과 풍부함이다. 상품의 이러한 누적과 풍부함은 축제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상품의 누적과 풍부함 축제의 이미지

상품은 파노폴리(집합, SET의 의미, 파노폴리 효과의 어원이기도 하다)나 콜렉션으로 조직된다. 소비자는 물건 개개별의 특수한 유용성에서 이러저러한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사물의 세트와 관계하는 것이 된다. 그 주인공인 상표는 하나의 사슬처럼 거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전체로서 일관된 집합적인 모습을 준다. 사물은 이처럼 초 사물적 혹은 유기적 관계를 통한 일련의 의미하는 것을 지니기에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사물의 구입순서를 만든다. 여기서 타성의 습관이 생긴다. 소비자는 논리적으로 어느 사물로부터 다른 사물로 손을 뻗치는데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 과 같이 상품의 풍부함 자체에서 발생하는 구매 및 현혹과는 다른 것이다.

현대인의 의식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하늘을 지나가는 비행기에 넋이 빠져 모형 비행기와 착륙장을 만들고 비행기를 마냥 기다리는 멜라네시아인과 텔레비전을 틀고 원하는 채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현대인의 의식은 주술적 사고라는 점에서 멜라네시아인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기술은 이미지의 소비에 이르는 생산의 긴 사회적 과정을 소비자의 의식으로 부터 없애 버린다. 그 결과 시청자도, 멜라네시아인도 무엇을 손에 넣는 것을 기적적인 효과를 지닌 방식에 따라 술책을 쓰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제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 라는 것, 즉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열과 사건의 비유적인 기호이며, 기호는 이렇게 하여 안심시켜주는 기능을 지니게 된다. 이미지, 기호, 메시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현실세계와의 거리에 의해 봉인된 우리들의 평온이며 이 평온은 현실의 폭력적인 암시에 위험에 처하기는커녕 위로받는다. 극단적으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이라크 전쟁등의 영상 앞 의 tv 시청자를 실증 예시로 꼽을 수 있다.

소비는 결여에 의한 행복

소비는 긴장의 해소라고 하는 결여에 의한 행복을 노린다. 여기서 발생하는 모순이란 새로운 가치 체계가 갖는 수동성과, 본질적으로 자발적, 행동적이며 유효성과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적 도덕의 규범 간 의 모순이다. 문제나 말썽거리 없이 즐기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수동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없애 주어야 한다. 사적영역의 평온함이란 카타스트로프(CATASTRHOPE)의 운명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고 포위되고 있는 탈취된 가치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는 자동차 사고와 일기예보 뉴스의 중요성에서도 나타나는 부분이다. 소비사회는 위협받고 포위된 풍부한 예루살렘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서울 같은 도시에 의해 이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 해야 할 부분은, 개인이나 사회가 생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있다 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초과분과 여분을 소비할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는 소모, 즉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에 까지 이를 수 있다. 지금까지 귀족 계급은 쓸데없는 낭비를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였다. 사회학적 논리에서 효용이란 개념을 재검토 해보자. 낭비는 결코 비합리적인 찌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기능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지출의 의례적인 효용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가치와 차이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의 희생이란

달리 말하면 소비에 대해 제기된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유기적으로 체계화 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지어서 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삶에 부여하는 개인적 내지 집단적인 의미와 관련지어서 인가이다. 그런데 이 산다는 것의 가치, 구조적인 가치는 경제적 가치의 희생을 함축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제는 소비의 중심에 있는 문제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풍부함이라는 것은 결국 낭비속에서만 의미를 갖고 있는가?” 란 질문에 발레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오래가는 식량의 산더미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여분의 식량과 절약된 수고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한 상자의 비스킷은 한달간의 안일 과 생활이다. 절인고기 단지 몇개, 곡물과 나무열매로 채운 섬유로 만든 몇개의 큰 광주리는 평온의 보물이다. 평온한 긴 겨울이 그것들의 향기 속에 잠재해 있다. 로빈슨은 자신의 누추한 집의 작은 상자와 통들의 향기속에서 미래의 존재를 냄새 맡았다.~중략~ 인류는 오래 지속되는 것의 더미 위에서만 서서히 높아진 것이다. 예비, 저장이 점차 우리를 우리들의 동물적 필요의 가혹함과 우리들의 욕구의 축어적인 만족으로 부터 해방시켰다. 자연이 그것을 암시하였다 자연은 우리가 변화무쌍한 사건들에게 약간 저항할 수 있는 것을 지니게 하였다 우리들의 신체에 있는 지방, 우리들의 정신의 깊은 곳에 대기하고 있는 기억, 이것들은 남겨놓은 자원들의 본보기 인데, 우리들의 산업은 이를 모방한 것이다.”

발레리의 견해와 대립되는 견해도 있다. 육체적인 노동에 대한 니체의 견해다.

“생리학자들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모든 유기체의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규정하기 전에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생명체는 무엇보다도 자기 힘을 쓰고자 한다. 자기보존은 그 여러 결과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목적론적 원리에 주의하라 자기보존의 본능이라는 개념은 이 원칙들 중하나 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문구는 예외적인 상태를 가리치는데, 규칙은 오히려 힘을 위한 투쟁, 즉 더 많이 더 잘 더 빨리 더 자주 갖기 위한 야망이다." -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가치는 이러한 경제적인 것이 아닌, 여분의 어떤 것에 의해 확인된다. 바로 그 여분의 어떤 것이 고유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항상 필요 불가결 한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에 있도록 하는 상징가치의 법칙은 지출 및 손실의 면에서 가장 잘 예증된다. 또 취득의 면에서도 증가분, 여분의 어떤 것이라고 하는 차별적 기능을 갖고 있기만 하면 그 상징가치의 법칙은 존재가 확인 될 수 있다. 구 소련의 예가 잘 증명해준다. 육체노동자, 간부, 기술자, 당원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아파트에 살고 있다. 노동자, 즉 근로시민의 사회적 지위에 부수되는 역할 과 결부된 주거이지 개개인의 소유가 아닌 임대나 종신임대다. 따라서 이 재화는 사회적 서비스이지 세습재산이 아니며 소비재는 더욱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이차적인 거주지인 정원이 딸린 다챠는 개인의 것이다. 이것은 임대도 아니며 상속 역시 가능 하다. 모든 노력은 다챠획득으로 향한다. 그런점에서 다챠의 위세가치와 상징적 가치야말로 여분의 어떤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풍부함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풍부함이 하나의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풍부함이 아니라 너무 많은 풍부함이 있어야 하며, 필요와 여분사이에 중요한 가치가 유지되고 표면화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영웅은 다량의 소비자

풍부한 우리 사회의 낭비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희소성에 도전하고 풍부함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낭비다. 효용이 아니라 낭비의 원칙은 풍부함의 중심적인 심리학적, 사회학적 ,경제학적 도식이다. 리스먼과 모랭에 의해 분석된 대중문화의 큰 주체중의 하나는 이 사실을 서사시풍으로 예증하고 있다. 그것은 소비의 영웅들이라는 주제다. 서구에서는 생산의 영웅들에 대한 찬가가 소비의 영웅들에 대한 찬가에 뒤지고 있다. 창업자, 개척자, 탐험가 및 식민자의 모범적인 위대한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스타, 스포츠 및 게임의 스타등 막대한 낭비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우리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지나친 생활, 엄청난 지출의 잠재능력이다. 그들은 옛날의 왕, 영웅, 사제 또는 큰 벼락부자들과 같은 사회집단을 대신하여 이 기능을 수행한다. 그들이 제임스 딘처럼 자기 생명의 고귀함을 지불 할때에는 그야말로 위대한 존재가 된다. 오늘날 생산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나 달성 가능한 내구성을 위해 생산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가격의 인플레적 상승과 똑같은 정도로 재촉되는 그 사멸을 위해 생산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효용, 필요등에 대한 모든 경제학의 합리주의적 공준을 재검토하기 충분할 것 이다.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엄청난 액수의 낭비가 선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사물의 사용 가치를 증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탈취 하는 것, 즉 사물을 유행으로서의 가치와 급속도의 갱신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소비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사물의 사용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물의 사용은 그 완만한 소모를 초래 할 뿐이며, 급격한 소모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가 더 크다. 사물의 풍부함 자체는 역설적으로 가난함을 의미한다. 재고품이라고 하는 것은 결핍에 붙어있는 쓸데없는 장식이며 고뇌의 표시이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짖는 상징기호 골동품

모든 갈망의 기저에는 태어날 때 부터의 지위, 은총 및 우월함을 가져다주는 지위라는 이상적인 목표가 존재한다. 그것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이다. 물신은 모두 가치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은총에 의한 구원 대신에 업적에 의한 구원을 증명하려고 한다. 골동품(그것은 세습성, 선천적 가치 즉 결정적인 은총의 기회이다)의 특수한 권위는 여기에서 유래 한다. 귀족제 원칙과는 대립되는 사물에 의한 구원 즉 민주주의 원칙인 업적에 의한 구원을 획득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골동품은 특수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사람들은 단순히 사용가치로만 소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소비한다.각 개인은 차이에 의한 자신의 사회적 득점을 절대적 득점으로 체험하지만, 질서내의 위치는 교환되도록 하면서도 차이의 질서 그 자체는 그대로 남게 하는 구조상의 제약은 체험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대성의 강제는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한 결정적이다. 이 강제만이 소비의 기본적 성격 즉, 수요에 한계가 없다는 성격을 해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소비의 가속도적인 증가, 수요의 계속적인 공세라는 점인데, 이 현상은 욕구충족에 대한 개인적인 논리를 포기하고 차이화의 사회적 논리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할 때에만 설명될 수 있다. 소비의 전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차별을 만드는 용구의 위에서 아래로의 갱신이라고 하는 법칙이지 그 반대의 소득의 상승이 아니다. 어떠한 생산품도 그것이 더 이상 고급품의 부류에 속하지 않아 다른 어떤 차별적인 재화나 욕구로 대체 될 때 까지는 대량생산의 대열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다. 대량, 대중적으로 유포되는 현상은 정상에서의 선별적인 혁신의 결과로서만 실현된다. 그러나 골동품의 경우에는 상기한 것과 같은 세습성, 선천적인 가치를 지녔으며 대량생산이 애초부터 불가하다는 특징을 지녀 일반 상품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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