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
감꽃이 진다. 툭툭 떨어지며 빗방울 젖은 땅위로 가볍게 튕길 때면 이 땅은 여름으로 접어든다. 녹음이 지천인 계절은 공기마저 달다. 멀고 가까움 모두가 그리움을 품은 푸르름이다. 앞산과 뒷산 어디쯤에서 뻐꾸기 울고, 노란 꾀꼬리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정답게 노닌다. 여름은 ‘열음’을 실천하며 생의 거룩한 한가운데로 우리를 안내한다. 담을 휘돌아 핀 노란 호박꽃 무리에 꽃가루를 온몸에 뒤범벅인체 꿀을 따는 벌들의 날갯짓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우거진 고구마넌출 사이 까마중 까맣게 익어 달고 새콤한 맛을 전해준다.비가 거세게 오는 날
앞서서 우리나라의 제다법의 원리를 설명 하였지만 차맛도 같은 녹차라도 맛의 선호도와 쓰임새와 물의 질에서 당연히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차 맛은 어떤 것일까? 음식을 조리하는 요리사는 기본적인 조리과정을 따라 만들지만 마지막 요리의 완성은 결국 요리하는 사람의 입맛에 있는 것처럼 차를 만드는 사람도 기본적인 법칙에 맞춰 만들어가지만 요리사와 같이 만드는 사람의 입맛으로 잘되었는지 덜되었는지 판단하게 된다. 전통차란 아무래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맛으로 개인이 자신의 취향대로 섣부르게 좌지우지 변화 시킬 수 없는 것이다.우리나라의
맛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하면 맛처럼 애매모호한 것이 없다. 맛은 지극히 객관적이면서도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입이 천개가 있으면 같은 맛을 두고도 천개의 맛이 된다. 같은 음식 한 가지도 어떤 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인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거북한 맛으로 맛없는 음식인 것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맛은 단순히 맛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서 오는 경험에 의한 맛과 맛을 보는 각자의 감각의 정도에 따라 느끼는 감각적인 맛으로 인해 지극히 복잡해 진다.차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 예를 들면 중국의 차 중에 정산소
다시 차 만드는 방법으로 가서 첫 번째 솥에서 잘 익힌 찻잎을 식혀 비벼서 두 번째 솥에 넣고 덖을 때 솥에서 꺼낼 시점은 원리에 의해 찻잎이 뜨겁게 덖어졌을 때 꺼내어 식혀서 다시 부벼 식힌다. 여기서 뜨겁게 덖어내지 않으면 솥에 아무리 많은 횟수를 넣어 덖어도 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뜨겁게 덖었다가 꺼내 식히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찻잎의 수분이 날아가 솥의 온도를 낮추지 않으면 탈 염려가 드는 시기가 있다. 솥의 온도가 낮아 뜨겁게 덖지 못하면 수치의 의미가 없으니, 이때부터는 찻잎의 수분을 줄이는
어느 날 부터였을까. 이 마을 저 마을 나지막한 뒷산들을 찾기 시작한다. 상큼하다. 시원하다. 더위를 피해 홀로 찾아온 숲. 인적이 드문 산이다. 나의 시간,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오직, 시오時吾의 공간이다. 이름 없는 마을 뒷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산길. 꿩과 새들이 내 발걸음에 화들짝 놀라며 도망치기 바쁘다. 야생 토끼도 나를 경계하며 후다닥 뜀박질한다. 간혹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고라니도 보게 된다. 낭만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뱀을 마주할 때면 오싹해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려한다.
홍삼 만드는 방법을 장황하게 설명 하였다. 홍삼을 만드는 구증구포에 우리나라 차 제다법의 원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음식의 조리법이 달라진 것은 물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지난호에 말하였다. 차의 경우에는 조금은 복합적인데 첫째는 물이고, 둘째는 음식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기름진 음식을 주로 섭취하였기에 강한 차가 오히려 과다한 기름기가 흡수되는 것을 방해해 도움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물로 대부분의 음식을 조리 하여 섭취하였기에 오히려 그런 차가 속을 불편하게 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속이 쓰리거나 어
우리는 대부분의 요리를 물로 조리한다. 물로 조리하면 재료가 가진 최상의 풍미를 나타낼 수 있고 서로 섞이어도 각각의 풍미를 맛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과는 다르게 요리가 한 상 가득히 차려진다. 한 상 가득히 차려져도 차 없이 가진 요리를 다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차를 마시려면 상을 물리고 새로 다과상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차를 마시는 것이 중국처럼 일상의 일이 아니다. 지난 회에서 말했듯이 집을 나설 때 차를 담은 물병을 가지고 하루 종일 물로 마시지만 우리나라는 차를 마시자면 따로 자리를 만들어 차를 마신다.
한국에는 명차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다. 한국에는 너무도 많은 명차와 차 명인이 있다. 한국의 수제덖음차 제다에서 세계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차 맛 역시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명차는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차가 없음으로 인해서 한국 차는 여전히 세계변방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시장 개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코 좋은 차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비자 중심의 명차를 뽑기 못했기
품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가지 짚어보고 가자. 품평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따라 다르지만 차는 먹는 음식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음식을 품평하는 조건이 있어야하고 차가 가지고 있는 차의 종류의 각각의 특징에 따라 또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먼저 음식을 품평하는 기준이라면 각 음식의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조건 하에서 해야 한다. 차게 먹어야 하는 음식은 차겁게, 뜨겁게 먹어야 하는 음식은 뜨겁게 각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건에 맞춰놓지 않고 품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지난 2회에 걸쳐 발효차는 왜 발효가 아닌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회부터는 제다법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차는 이미 수 천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다. 초기에는 아무래도 생으로 혹은 말려서 약초로 사용 되었고 여러 가공기술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음용할 수 있는 차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제다법이란 차를 만드는 방법인데 그 방법은 차의 종류만큼이나 많다. 말하자면 어떤 한 재료로 무수히 많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지금 현재도 생산되는 차의 가짓수를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만큼 많지만 만들기에 따라서 또
먼저 녹차를 만드는 방법이다. 생엽 때의 찻잎에는 많은 량의 플라반올(flavan-3-ol)과 강한 활성의 산화효소 폴리페놀옥시다아제 (polyphenoloxidase)를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녹차는 먼저 산화효소가 찻잎에 들어있는 여러 성분들에 영향을 주기 전에 그 작용을 멈추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찻잎 속에 들어있는 산화효소는 열에 약하기 때문에 뜨거운 솥에 덖든지 높은 온도의 수증기를 쐬어 익히면 영향력이 상실된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페놀polyphenol은 변화하지 않고 생엽의 상태와 비슷한 함량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Camellia Japonica는 동백이고 Camellia Sinensis는 차다. '뭐=머'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카멜리아Camellia가 일본(Japonica-원산지) 것은 동백이고 중국(Sinensis) 것은 차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더욱이 둘은 완전 다른(꽃-생김, 빛깔, 피는 시기 등) 나무인데?! 우리 차집안茶界 누구도 어디에서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더구나 차전문가랍시고 나서서는 이리도 올바르지 않은 것을 죄다 강의하고 글 쓰고 있다. 누구나 알듯 Camellia하면 동백이다. 그리고 이 C
향 문화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 시작은 바로 불이 발견되고 피워지면서부터다. 그러나 향 문화의 근원은 그보다 더 올라간다. 향 문화의 근원은 뭔가 발효되어지는 향기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식물등 지구상에서 모든 것들이 죽고 난 다음에 발효되어지는 향기를 에서부터 먼저 향 문화가 시작됐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포도나 과일을 딴후 적절하게 발효를 시키면 더욱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두 가지의 향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는 피우는 향 그리고 존재 자체로 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빗방울이 시들어진다. 무더위를 날리는 하늘의 각성제. 기진맥진했던 숲의 나뭇잎들은 활력을 되찾은 것처럼 촉촉이 빛이 난다. 먹구름이 밀려난다. 정화의 밤을 바로 앞둔, 오후의 시간. 한바탕 숙면한 나른한 시간이었다. 물기에 젖은 흙냄새들이 쏟아 오른다. 자연의 보고 생명의 비타민이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충만함이 만나는 계절. 대지의 열매들은 성숙함으로 물들어 간다. 빗방울을 머금은 넓은 토란 잎. 아름다운 진주를 금방이라도 토해내는 듯하다. 멀대같은 옥수수는 수염이 길어나고, 고구마 줄기는 얽히고 얽혀 자신들을 감싸고돈다. 기운이
침향은 숙결熟結. 탈락脫落.생결生結. 충루蟲漏에 의해 생성된다침향(1) - 한국향문화연구회 문향옛 부터 내려오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향의 10가지 덕목(향십덕香十德)이다. 감격귀신感格鬼神 귀계도 감응해 마지 않는다.청정자심 淸淨自心 마음이 청정해진다.능제오제 能除汚穢 더러움을 깨끗이 없애준다.능각수면 能覺睡眠 잠이 오는 것을 막아준다.정중위우靜中爲友 고요한 가운데 마음이 안정된다.진리투한 塵裡偸閑 먼지를 없애고 여유를 가진다.다이불염多而不厭 많이 피워도 싫지 않다.과이위족 寡而爲足 조금이라도 풍족함을 느낀다.구장불후
계절은 바뀌고 또 흘러간다. 잡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어디에서든. 단지 한 영혼의 숨결이 정적을 고하는 날, 시간은 멈출 것이다. 한 개인사, 한 영혼의 여적餘滴이라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자연은 늘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의 소리로 넘쳐나고 인간에게 정화의 세계를 가져다준다. 망향을 떠올리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어찌 한 순간의 꿈이 아니겠는가.위의 시는 조선중기 임란 속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당쟁의 정점이었던 인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북인北人의 영수 이산해의 시다. 절서는 아계유고鵝溪遺稾 제1권 기성록箕城
집에 돌아왔으나 몸은 병에 이르렀다신익성돌아오니 집안이 선방같이 조용하고몸은 바로 유마가 병상에 있는듯 하네모이고 흩어짐 본래 꿈과 같은 것이니죽고 사는 것을 어찌 슬퍼만 하겠는가훈기 가시니 전서 같던 연기 하늘거리고새물 길어 달인 차 맛 향기롭다네만나고 헤어짐 이제부터 담담하고남은 생애는 자연속에 살고 싶네自陵下歸家 病尤劇申翊聖歸來一室類禪房身似維摩病在床聚散本來如夢幻死生那得謾悲傷薰消古篆煙猶裊茶試新泉味自香契活從今甘淡泊餘年欲占水雲鄕차 한 잔 마시며 질풍노도의 시대를 견딘다조선 중기. 혼란의 시대. 타고난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