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바뀌고 또 흘러간다. 잡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어디에서든. 단지 한 영혼의 숨결이 정적을 고하는 날, 시간은 멈출 것이다. 한 개인사, 한 영혼의 여적餘滴이라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자연은 늘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의 소리로 넘쳐나고 인간에게 정화의 세계를 가져다준다. 망향을 떠올리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어찌 한 순간의 꿈이 아니겠는가.

위의 시는 조선중기 임란 속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당쟁의 정점이었던 인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북인北人의 영수 이산해의 시다. 절서는 아계유고鵝溪遺稾 제1권 기성록箕城錄에 수록되어있다. 기성록은 3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집은 1, 2권이다. 기성箕城은 관동팔경의 하나였던 강원도 평해(平海 - 오늘날 경북 울진군 평해)을 칭하기도 한다.

시집이 암시하듯 임진왜란과 당쟁의 중심 있었던 화자의 유배지가 기성이다. 유배의 근거는 임진왜란이다. "1592년 임진왜란 시기, 이산해는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백의白衣 신분으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어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시는 여름 어느 날이다. 꾀꼬리 소리를 비롯해 짙은 신록의 물결이 산야를 이루고 있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한 정객政客. 그의 삶이 작은 화폭에 그려지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삶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시간은 또 흐르고 이산해는 1599년 영의정에 복귀하였다. 권력의 중심에 선 이산해는 홍여순洪汝諄과 대립 속에 당쟁으로 치달렸다. 이렇듯 이산해는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남인과 북인의 분당, 북인 내의 대북과 소북, 골북과 육북의 분당 속에 있었다.

삶의 여정이 이러하니 혹자는 간신이니, 정권에 눈이 먼 분열의 정치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역사학자조차 의견이 분분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이념이었던 성리학 이론을 넘어 현실을 직시한 실용주의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이산해는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과 자염(煮鹽: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것)의 활용을 강조하였다.

현실을 직시했던 실용주의 학자로 숙부인 토정 이지함과 서경덕의 영향이 컸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치사에 정치 9단이라는 용어가 있다. 아마도 조선의 정치9단은 이산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선한 아침공기가 호흡기에 밀려온다. 화사한 햇살아래, 햇차는 말이 없다. 단지 내 마음만이 햇차를 대신한다. 차와 책, 솔솔한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그만이다.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글 이능화 기자

節序

李山海

節序駸駸不暫停 樹陰新漲囀流鶯 家山入夢杳千里 客鬂經春餘幾莖

芳草碧連平野闊 落花紅櫬小溪明 百年飮啄唯隨分 茶椀詩筒足此生

절서

이산해

절서는 덧없이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아

신록이 짙은 숲 속엔 꾀꼬리가 노래하네

꿈에 본 고향은 천리 멀리 아득하니

봄 지나 나그네 귀밑털 몇 가닥이 남았느뇨

푸릇한 방초는 드넓은 들판으로 이어지고

낙화 붉게 떠 있어 작은 시내가 환하여라

인생 백년 분수껏 먹고 마시면 그만이니

다완과 시통만으로 이내 생애 족하다네

*절서(節序) [절써]

[명사] 절기의 차례. 또는 차례로 바뀌는 절기.

*다완(茶椀)과 시통(詩筒) : 다완은 차를 마시는 사발, 시통은 시를 담아 전하는 대나무로 만든 통을 말한다.

이산해(李山海: 1539년 ~ 1609년)

이산해는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작은 아버지인 토정 지함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 북인의 영수가 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임란이후에는 탄핵을 받아 영해로 부처 되었고 후일 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시기에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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