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스님 통해 대둔사 다맥 밝히다

정서경 특별기고, 한국 근현대 차문화전승의 한줄기를 캐다 이능화 기자l승인2016.10.10l수정2016.10.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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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한국 근. 현대 차 문화 전승의 줄기를 캐다>란 세 번째 기고문이다. 본 기사에 실린 사진의 저작권은 정서경박사에게 있으므로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게재할 방침이다. 독자제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필자는 대흥사의 다맥 전승에 관한 관심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1997년도에 발행된 故 예용해선생(芮庸海, 1929~1995)의 <차를 찾아서>를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대원사로 직접 전화를 해서 남아 있는 전집을 구입했다. 총 5권 중 <차를 찾아서>는 3권 3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제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이 중에 90쪽‘우전차’라는 제목으로 초의차 전수자 이화중(李化仲, 1898~1963, 지산 화중스님)스님(예용해선생은 법명이 화중이라고 했는데 법명은 芝山堂 속명이 李化仲)의 이야기와 현장조사 이후 왕래했던 이야기, 호남의 명찰 대둔사의 제다법, 우전차 한 통이 맏사위를 통해 해남 땅끝에서 서울로 배달 된 이야기, 그 차를 받은 뜨거운 감회 등 대흥사의 당시 정황과 차에 대한 담론들이 흥미롭다.

▲ 1997년 예용해선생 유작 '차를 찾아서'.

<차를 찾아서>는 예용해선생이 작고하시고 2년 후에 예선생의 동학과 후학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3권의 편집을 대구의 김양동선생이 담당했다. 혹시 편집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통화(지난 7월 13일)도 했었다. 그러나 차에 대한 관련 글들은 굉장히 많았으나 그 중에 일부 또 가급적 정황이 확실한 글을 골라 묶었다고 하였다. 필자가 이 책의 기록에 남은 지산 화중스님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것은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먼저 대흥사의 제다법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초의차의 전수자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차문화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근․현대까지 대흥사의 다풍이 계승되고 있다는 증거였고, 더불어 백화사의 응송스님과 함께 초의차 즉 대흥사의 제다법을 고증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예용해선생이 말하는 지산 화중스님은 먼저 '우리나라의 다성으로까지 받들리고 있는 조선시대 대둔사 안 대광명전을 지키고 있는 노승'이라 소개했다. 첫 대면의 모습은 ‘스스로 소승이라 낮추며 가사․장삼을 갖춘 차림으로 합장하고 이마를 조아렸다’고 한다. '검은 장삼에 키보다 높은 지팡이를 짚은 노스님은 후광과 같은 승기로 감싸여서 하찮은 속인의 촌탁과는 먼 자리에 조용하게만 머물렀던 속성은 이씨요, 법명은 化仲'이라고 남겼다.

“늘그막에 장가들어서 세 자매를 얻었는데 중풍기로 오래 살기가 어려울 듯하니 그 어린 것들이 가엾다”라고 말하는 노승 지산 화중스님. '대둔사를 방문해서 <초의집> 완질도 볼 수 있었고, 초의의 글씨로 된 책이며 액이나 족자로 된 글씨와 그릇이며 평생을 아꼈다던 오동나무 경상이며를 두루 보고 만지며 참으로 오래인 목마름을 달랬다'고 표기했다. 이렇게 ‘차를 찾아서’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후 조사나 실체가 어떤 방법으로든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가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10년 넘게 화중스님을 물었지만 스님의 법명과 속명이 달라 그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 현장조사 후 '우전차'라는 제목으로 실린 초의차 전수자 지산 화중스님 내용

‘우전차’라는 글은 1983년에 쓴 것이지만 필자가 궁금했던 것은“대체 지산 화중스님을 예용해선생이 언제 만났을까?”였다. 글의 전개로 봐서는 '20수년 전 어느 여름'이라고 되어 있어서 1963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대흥사의 다맥이 근․현대로 이어지는 중심에는 응송 영희스님이 표면화 되어 있는데, 현장조사에서 지산 화중스님이 두드러졌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래서 글의 전체적인 전개와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면밀한 자료 검토가 필요했다. 이 글에서는 화중스님의 자녀가 셋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산 화중 스님의 가족들을 수소문했다. 이번 초의열반 150주기 추모기념학술대회 발표논문을 쓰기 위해 현장조사를 하면서 이 지산 화중스님의 궁금증까지 해결된 데에는 여러분들의 증언이 바탕이 되었다. 먼저 경현스님이 화중스님은 해남여관 할머니의 사랑양반이라고 알려주셨고(지난 9월 9일), 대흥사 아랫동네 박보살을 통하여 화중스님이 지산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지난 9월 10일) 이런 과정에서 지산 화중스님의 실체가 수면으로 드러났다.

▲ 대흥사 아래 장춘마을 박보살할머니

지산 화중스님은 딸을 다섯 두었는데 둘째가 해남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고, 맏딸과 나머지 딸들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둘째 딸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추억도 거의 없어 곤란하다고... 그래서 지산 화중스님의 맏딸 연락처를 입수하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지난 9월 16일 추석 다음날. 그리고 동생들의 출생연도를 따져보니 막내가 1960년생이었다. 맏딸이 15살 때, 넷째가 7살 때, 그리고 막내가 4살 때 지산 화중스님은 열반했다. 예용해선생의 글과 딸들의 구술조사를 조합해 보았다. 예용해선생이 지산 화중스님을 찾아간 해는 1962년 여름 장마철! 비가 억수로 따루던 날이었고 입고 간 옷을 대충 짜서 털고 입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그러니까 지산 화중스님이 열반한 해는 그 이듬해인 1963년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현장은 오래된 기억이지만 퇴색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두웠던 역사였지만 삶의 편린으로, 또 발자취의 파일로 선명했다. 그 이면의 페이지까지 기록하지 못한 역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대흥사에서 응송 영희스님이 주지를 하고 있었던 때로 판단되는데 예선생님의 기록은 지산 화중스님만 남아 있어 그것이 가장 필자에게는 의문이었다. 더욱이 응송스님의 며느리 임경수씨가 1970년에 백화사로 들어가 응송스님과 함께 생활하였고, 그 이전에 광호엄마(金正金, 1933~ 계유생, 84세)라는 분이 1957년에 백화사로 들어가 응송스님을 시봉하고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 연대 기록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현장조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경현스님에게 지산 화중스님을 묻다.

지난 9월 9일 경현스님과 응송스님 며느리 댁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동춘차를 마시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경현스님과 응송스님 며느리가 실로 오랜만에 필자를 통해 만나 대흥사 주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밖은 벌써 칠흑 같은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관음암과 백화사를 왕래하던 이야기, 백화사 정원에 대한 소고, 고려철쭉을 묘목으로 심은 후담, 응송스님의 성정에 대한 추억, 응송스님의 손금이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 올라가 큰 인물이고 또 장수하는 것을 손에서 말해준다는 손금담, 며느리한테 삽목해서 차나무를 심었던 이야기, 차를 덖다 생긴 에피소드 등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백화사 주변 정황이 고스란히 그림처럼 그려지던 밤이었다. 그렇다면 이화중스님의 실체가 혹시!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필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화중스님은 혹시 들어보셨어요?’그간 너무도 궁금했던 이화중스님에 대한 의문들을 꺼내면서 물었더니

▲ 응송스님과 지산 화중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현스님

-응 그래 이화중스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서류에 화중스님 이름이 있어. 화중스님은 재무를 맡았는데, 대흥사 아래 사하촌을 지으려고 할 때 집터를 봐 주신다고 했던 분이 화중스님이에요. 백화사 추녀 밑에 바위를 보고 집터를 정했다고 했는데 그 스님이 화중스님이에요.

-그럼 그 스님이 계셨던 암자는요?

-암자는 없고 그냥 여관 했었어요. 해남여관을 하셨어요. 지금은 비어 있어요. 그 미망인은 지금 요양원에 계세요. 해남 요양원에...

-아 그렇군요. 그런데 <차를 찾아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화중스님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제가 현장조사 갈 때마다 수소문 했던 스님이거든요. 그래서 대구의 김양동선생님과 통화하고 다른 기록들이 책으로 묶여지지 않고 남아 있는지 물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런 것을 정립하려고 하니까 그렇지만 옛날에는 산중의 스님들이 차를 잡쉈으니까 의례껏! 마실게 차 밖에 없잖아요. 요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럼 화중스님의 이야기 기억나시는대로...

-내가 지금 해남을 들려 우주엄마가 광주에서 산다 하길래 여기로 내가 왔지. 엊그제 안 그래도 안 보이길래 보살님(지산 화중스님의 미망인)을 물었거든. 그런데 화중스님은 생존에는 못 봤기 때문에 이 화중스님 미망인이 내가 백화사에 있었을 때에는 해남여관을 했었어요. 유선각 바로 앞에 우리 백화사 뽀짝 위에 대흥사 쪽으로.

-(응송스님 며느리에게), 보살님 기억안나? 이화중스님. 해남여관 할아버지여. 몰라?

-(응송스님 며느리)-그 분이 어떤 기록에 남아 있다고요?

-(필자)기록에 초의선사 다맥을 잇고 계신 것으로 남아 있어요. 초의차 전수자라고 소개하고 있지요.

-(두 분), 아 그 분 이름이 있는데 여기 여기 ... 내가 이거 때문에 내려왔지! 이 일 볼려고... 이거 봐요. 재무 이 화중, 총무 이 지준, 주지 이 응명, 이게 뭐냐면은? 사하촌을 하기 위해 땅을 얻어야 하는데 몇 년 후에는 거기에 세금을 내고 노스님이, 이거 지상권 임대 계약서잖아요? 또 임대하는 돈을 주고 사셨드만 여기 보니까 얼마를 줬냐면은? 4281년 9월 7일,“임대금액은 1천원으로 정하고 계약함과 동시에 지불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화중스님이 재무로 되어 있어. 나중에는 노스님이 이 땅을 매매했다는 서류가 다음장이에요. 당시 동하네 아빠, 춘희 남편이 서울대 나와서 그 할머니가 자랑을 많이 했는데...

▲ 사하촌은 만들 때 응송스님이 대흥사와 맺은 지상임대계약서 재무 이화중

-(며느리)아마 응송스님을 착각했을까요? 글쎄 여관을 했던 분인데... 춘희 어머니의 아버지가 스님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정통한 불자라고... 그런데 그때는 대흥사에서 차를 만들었던 스님이 없었어요. 우리도 차를 만들면 딱 1년치, 누가 차 주라고 해도 못 줘요. 없으니까요. 우리 먹을 것도 많지 않았는데요. 진짜 정성을 다해 만들어서 손님들 오시면 그저 내고, 진짜 우리집은 그 차 드시려고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경현스님)그러지요. 차를 마시면 다 나도 차를 한다고 했지요. 노스님네(응송스님)는 그 차 마시러 오시지. 손님들이. 속가에서는 차 안 마셨어요. 그거는 동다송이 나간 뒤에사 조금씩 소문으로 마셨지.

-(필자)동다송이 나간 해는 1975년도입니다. 우록선생님이 김두만선생님과 동다송을 번역하여 '문학사상'에 게재되어 알려지게 되었지요.

▲ 지산 화중스님의 추원방

-(경현스님)그렇지요. 그 이후에 속가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조금씩 이야기가 나왔지. 그 전에는 차를 몰랐어요.

백화사 주변은 유선관, 해남여관, 안흥여관, 제비여관, 그리고 관광기념품 상가 등이 즐비했다. 대흥사가 유명한 관광지였기 때문에 그런 시설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화중스님도 대처승이었는데 딸이 5명이었다고 옛일을 회고한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미망인은 해남여관에서 아이들 키우고 열심히 살아 다 성장시켰지만 현재는 95세 치매로 해남요양원에서 요양중이시라고... 그래서 정박사가 인터뷰 할래도 기억을 더듬을 수 없을거라고...

▲ 해남의 한학자 김두만 선생과 응송스님 동다송과 문진록 번역작업중.

이 서류(지상권임대계약서)는 노스님이 극락암으로 가시고 경현스님에게 주어진 것이라 한다. 청화스님이 관음암에서 나간다고 했더니 대흥사에 더 있으라고 했는데 응송스님이 백화사를 주셔서 다시 인사드리러 갔더니 "종이 한 장이 재판 한 건을 이긴 것보다 더 효력이 있으니까 잘 했다" 하시면서 큰절과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당신이 애쓰시마고 하셨단다. 노스님방(응송스님)을 (이사)짐 쌀 때 경현스님도 며느리(임경수씨)도 안 들어가고 동춘씨와 노스님이 짐을 쌌는데 그 때 이 서류를 발견하고 경현스님이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해남여관은 그대로인데 안흥여관은 부숴지고 없고, 그 자리는 화중스님 미망인이 채소 벌어먹고, 유선여관에서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아 그때 필자는 가슴이 뛰었다. 하나의 실마리가 내 머리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거 같더니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질문과 답이 계속되면서 未裁로 남았던 오랜 숙제가 해결되었다. 초의차 전수자라고 ‘차를 찾아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던 지산 화중스님이 책 밖으로 걸어 나오시는 듯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9월 10일) 바로 해남으로 달려갔다.

▲ 지산 화중스님과 만법심할머니가 살았던 해남여관의 집자리.

경현스님 맏상좌 이정스님(현재 백화사 주지)을 만나 백화사의 옛이야기 秀茶

-“이화중스님의 보살님이 해남여관을 하셨다 하든가요? 우리 스님(은사스님이신 경현스님)이? 그럼 여기 바로 위에 집이 있어요. 그때는 해남여관을 하셨구나. 지금은 요양원에 가시고 집은 비어 있어요. 그 보살님이 만법심보살님(金德心, 1922~ 개띠, 95세) 우리 절에 축원카드 있어요. 그런데 지산 화중스님은 영가를 지내거나 하면 아는데 그렇지 않아서 화중스님 하고 물어보면 몰라요. 그 분은 없지요. 돌아가신 분이라. 그 이야기라면 요 아래 박보살이 기억하실 거 같은데... 지금도 대흥사 공양간에서 일을 돕고 있어요. 그 분 찾아가면 얘기 많이 해 주실 거에요.”

▲ 지산 화중스님의 미망인 만법심 할머니와 네 딸들.

스님 돌아가시고 딸들이 5명이나 되다 보니 만법심 보살님은 먹고 살 일이 막막하여 집은 있었으니 방 세 개를 내어 여관을 치고 식당을 하면서 자녀들을 가르쳤다. 맏딸도 살림밖에 모르는 참한 규수인데다 어머니가 그렇게 강인한 분이었기에 자녀들을 잘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을에서는 대처승 부인으로 살았던 몇몇 보살들이 시집와서 살고 있을 때 이미 해남여관을 운영하고 있고 지산 화중스님은 몇 해 안 되어서 돌아가셔서 차를 만든다거나 차를 마신 것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한 때는 술을 좋아하셨는지 주당으로 소문도 났다는 후문이었다. 처자식 교육문제로 현실적인 삶을 살다보니 차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대둔사 주변 이야기들이 회화처럼 그려지는 이야기는 쉼 없이 이어졌다. 장춘마을 박보살은 화중스님이라고 하면 모르고 동네에서는 지산스님이라고 했단다. 둘째 딸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니 찾아가보라고 약도를 주어서 길을 물어 찾아갔다.

▲ 경현스님 맏상좌인 이정스님 현 백화사주지

둘째 딸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지난 9월 10일 오후 2시 59분. 점심 장사를 마치고 식사중이었다. 화중스님이라는 말에 숟가락을 놓고 “어찌께 우리 아부지를 아시오?”한다. 경위를 말씀 드리고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본인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거의 없고 언니가 대체로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하면서 언니 연락처를 주었다. 자기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초의 관련 유물은 거의 스님들이 가져가시고 마지막으로 용운스님이 가져 가시면서 아버지 영정 하나를 그려 주셨단다. 마치 그제(지난 9월 8일, 음력 8월 8일) 아버지 기일이어서 제 모시고 그 영정이 여기 있는데 보여드릴 수 있다고 한다. 영정과 추원방을 받아 들고 언니인 화중스님의 맏딸과 통화를 했다. 맏딸 춘희(李春熙, 1949~ 소띠, 68세)는, 광주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법대를 나와 현재는 재야국어학자이신 나주출신 남영신(南永信, 1948~ 쥐띠, 69세)선생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마포에서 살고 있다.

▲ 용운스님이 그려다 주신 지산 이화중스님의 영정

지산 화중스님의 맏딸 이춘희씨와의 첫 통화 지난 9월 10일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한국일보 논설위원 예용해선생이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동다송>을 욕심내니까 그것을 드렸다. 예용해선생 역시 초의선사의 차문화 전승에 관한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지산 화중스님(李化仲, 1898~1963 개띠)과 인연이 되어 몇 차례 연락이 닿았고, 편지도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면회도 못 오게 해서 가지 못했다. 이후 그 <동다송>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워낙 오래된 것이었고, 주신다한들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내가 딸이 서너마리 있는데 못 키우고 갈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하시면서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혈압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혈압약이 없어서 출타를 하셨다가 돌아오는 길에 혈압으로 돌아가셨다. 벌써 돌아가신 지가 50년이 넘었다. 맏딸 본인이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려 하는데 호적을 떼보니 주민등록번호가 안 나와 있었다. 母(현 95세)만 생년이 있는데 화중스님은 생년월일이 없는 상태로 되어 있었다. 참 어이없었다.

-선생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아버지(지산 화중 스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제 나이 1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 때 당시 아버지가 年齒 몇이라고 말씀은 못 들으셨어요?

-그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66세라고 했어요. 지금은 50년이 넘었죠. 제가 지금 우리나이로 68이거든요. 그러니까 53년 되었네요. 지금 살아 계신다고 하면 119살이시네요. 그래도 제가 맏이라 아버지를 가장 많이 따라 다녔어요. 어린 저에게 비쳐진 아버지는 아주 욕심이 없으신 그런 분이었어요. 한 10살 때였던가!? 아버지를 따라 병원에를 갔는데 아버지가 합죽선을 들고 계셨어요. 새가 그려진 부채였는데 원장 선생님이 엄청 욕심을 내셨어요. 아마 훌륭한 화가가 그린 것 같았어요. 제 생각에, 그런데 당신 물건을 누가 탐내면 그냥 줘버렸어요. 그냥 드려불어요. 그냥. 성격이 그랬어요.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주신 거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 .

-글쎄요. 워낙 어렸었고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저는(필자는) 지금 해남다인회에 강의 나간지가 8년째입니다. 그런데 해남다인회 우리나라 다인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고, 회원들의 평균연치가 75세 인상인데도 이화중스님을 기억하신 분들이 없었어요. 워낙이 옛날 분이기도 하지만 예용해선생의 기록에는 화중이 법명으로 나와 있어서 화중스님이라고 물으면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지 않았냐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대흥사 아래 박보살님에게 물으니 지산스님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대흥사 문진록을 보면 태섭이라는 이름으로도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만 혹시 태섭이라는 호칭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요?

-(맏딸이) 네 저는 그렇게 들어보았네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럼 태섭이라는 호칭도 속명 중 하나였을까요?

-글쎄 듣기는 들었는데 엄마가 좀 정신이 좋으시면 좋은데...

-아버지의 차생활을 기억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랬죠. 아버지는 대처승이었으니까 술을 좀 좋아하셨는데 어떤 연유로 끊으셨고, 우리 엄마가 아주 잘 만들었어요. 전라도 말로 아홉 번 차를 덖는다 그런가? 그렇게 해서 그 작설차를 아주 새혀 같은 그런 차를 만들어 봤는데 엄마가 하시는 거 보면 이렇게 비비고 여러 번 솥에서 덖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그런 생활을 안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생활을 하셨죠. 그런데 아버지 책이 굉장히 많았어요. 반닫이에 하나 가득 귀중한 책들이 들어 있었어요. 여름에는 그늘에 덕석을 내 놓고 책을 펴서 말리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예 옛 풍습에 曬書布衣라 해서 장마철이나 여름에 책에서 눅진 냄새가 날 때 해가 뺀한 날 우리 전라도 사투리로 그런 날 책과 옷을 마당에 내어 말렸다는 풍속이 있어요.

-예 그랬어요. 어머니는 절에 물건 집에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 하고, 그래서 청신암인가 절에 맡겼었는데 또 이사람 저사람이 하나 씩 둘 씩 가져가고 나중에는 용운스님이 아버지 상좌라고 또 챙겨가시고 그랬어요. 결국 우리는 별로 필요도 없고, 몰라서도 그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성인이었더라면 좋은 것을 구별 했을텐데 다 가져갔어요.

-아버지 유품이나 남기신 사진 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텐데요.

-네 제가 몇 장 가지고 있고, 엄마가 지금은 해남선혜요양원에 계시니까 기억을 못 잡으실 거에요. 엄마가 지금도 그 유선관 앞에 우리집(해남여관)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거의 사진이 한 장도 안 남아 있어요. 응송 영희스님이랑 아버지가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고 예용해 선생님이 막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주셨는데 그런 사진이 있구요. 또 우리 애들 아빠 출판기념일 때 예용해선생님이 오셔서 같이 찍은 사진 등이 제게 있네요.

-그럼 일정이 비어 있는 시간 말씀해 주시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지난 9월 16일 추석 다음날, 서울 마포의 맏딸 댁에서 네 딸과 미팅

추석 연휴로 추석 쇠고 4자매가 다 모였다. 해남의 둘째만 빠지고 다 모인 셈이다. 첫째가 이춘희((李春熙, 1949~ 소띠, 68세), 둘째가 이상희(李相姬, 1952~ 용띠, 65세), 셋째가 이숙희(李淑姬, 1955~ 양띠, 62세), 넷째가 이정희(李正姬, 1957~ 60세), 다섯째가 이명숙(李明淑, 1960~ 쥐띠, 57세) 엄마가 차를 만들었던 기억은 매우 오래 되어서 희미하지만 돗자리가 있었고 가마솥에 덖고 나서 꺼내고 그 돗자리에서 차를 비비곤 하셨다.

-어머니 차 만들 때 기억이...?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별 관심이 없었어요. 엄마가 하시던 것을 배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건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덖을 때는 대나무 솔로 이렇게 이렇게 사용했어요.

-차를 만들 때 찐다거나 물을 친다거나 했던 것을 보신 기억은 없으세요?

-글쎄요. 엄마는 차를 덖었어요. 물은 필요 없었는데요.

-응송 영희스님은 생각 나신가요?

-글쎄요. 동네에서 놀다가 그 댁에 놀러 가면 사모님이 원기소를 몇 알씩 줘서 얻어먹고 그랬어요. 설날이면 세배하러 가면 돈도 주시고 그랬어요. 참 점잖은 양반이었어요. 학교 선생님도 하시고, 절에서 놀다가 가면 바둑도 두시고,

사모님이나 응송 영희스님의 양자이신 박정부선생님은 자매들 담임도 하시고 또 막내 이명숙 다섯째 딸하고는 삼산남국민학교에서 같이 근무도 했다고 한다. 박정부선생님 이야기가 나와서 그 사모님(응송스님 며느리 우주엄마) 참 사람이 깨끗하고 좋았다고 기억한다. 맏딸은 정말 그렇게 얌전하고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분은 처음 보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리고 우주엄마 이전에 약 20여년을 모신 분이 광호엄마라고 그분도 그렇게 스님을 극진히 모셔서 동네에서는 응송 영희스님이 매우 어른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말하자면 큰스님으로 어린 자매들에게는 매우 크게 느껴졌던 인물이라 회고했다.

▲ 응송스님의 부인 이호경여사의 교편생활 당시의 사진

예용해선생님 책에서도 약간의 제다법을 유추할 수 있다고 했더니 맏딸은 그렇게 건강하시더니 그렇게 빨리 가실지는 몰랐다고 한다. 당시 댁이 청담동이었는데 가끔 놀러 가기도 하고 맏사위랑 교류가 있어 왕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댁으로 초대해서 굉장히 대접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한번은 자매들을 불러서 롯데호텔에서 스테이크도 사 주셨다. 막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주례도 맡아 주셨다. 큰 형부(맏사위)랑 같이 가서 인사드리고 주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맏딸의 기억으로는 참 자녀들처럼 아껴주셔서 아버지를 뵌듯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혈압으로 돌아가시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예용해선생님이 내려오셔서 집에 걸린 아버지 영정에 합장하고 예를 갖추고 상경하셨다고...

▲ 맏사위 국어사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예용해 선생 부부.맏사위 국어사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예용해 선생 부부92년 11월 5일 광화문 옆 출판기념회관에서

‘차를 찾아서’이 책의 기록에서 보이는 제다법을 정리하였다. <호남의 명찰 대둔사의 다맥과 제다법>은 다음과 같다.

"차가 간직한 향기와 맛과 색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위해서는 안개가 끼이거나 이슬이 내리지 않은 맑은 날 아침에 찻잎을 따야 한다. 당시 채다의 환경은 숲이 우거지고 덩굴들이 얼기설기 설킨 속에 깊이 숨은 차나무를 찾아 길도 없는 골짜기와 등성이를 수없이 헤매 새끼손가락 한 마디에도 못 미치는 야릿한 잎새들을 한 잎 한 잎 따 모은다. 곡우절 전에 새순을 따서 햇차를 만들었다. 차를 따서 바로 만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하룻밤을 재워서 덖고 비비고 한 것도 있었다. 덖을 때는 무쇠솥이나 돌솥이 너무 달거나 설어도 못쓰니 불을 고르게 맞추기가 어렵고 또 솥바닥에서 자칫 보드랍디보드라운 차의 새순이 타거나 서로 엉겨서도 안 된다. 손으로 비빌 때는 힘을 세게 주면 잎새끼리 덩어리지고 힘을 빼면 진이 제대로 빠지지 않으니 잠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을뿐더러 한시도 손길을 쉴 수가 없으며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채다해서 곧 밑이 두꺼운 가마솥에 불을 뭉긋하게 지펴서 손으로 골고루 덖어내서는 멍석이나 자리에 대고 또 손으로 비비며 진을 빼야 한다.

▲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지산 화중스님의 맏딸 이춘희씨.

이렇게 중간에 쉬는 일이 없이 덖고 비비기를 아홉 번을 거듭 했을 때 비로소 찻잎새 깊숙이에 갊아진 차의 온전한 참모습을 찾아낼 수가 있게 된다. 완성된 차는 백지로 싸서 결이 고운 오동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차통에 담았다. 차라리 차라 하기 보다는 정성의 덩어리라 해야 옳을 일이다. 더불어 차를 향기롭게 우리기 위해서는 차에 못지않게 물도 중요하다. 옛 다인들은 강물 줄기의 한가운데서 떠올린 물을 으뜸이라 했고 그 다음이 샘물이며 우물물은 마지못해 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이 예용해선생이 정리한 대흥사 초의차 전수자 이화중의 제다법이다. 호남의 명찰 대둔사 역시 예선생의 표현이다.

예용해선생은 마치 에세이처럼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이것은 지산 화중스님의 인터뷰를 통한 회고에세이라고 사료된다. 맏딸은 아버지의 추억담을 떠올리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의 집안 오빠의 말이라며 전한다. "아버지는 너무 훌륭한 분이었다. 그 시절에 중국도 다녀오시고, 한자에도 박식하시고, 그런 분인데 시대를 잘못 타고나셔서 고생만 하셨다" 당신의 딸들이 어렸을 때 딸들을 조신하게 키운다고 집안 방이나 마루에 콩을 쫙 깔아두고 발 잘못 디디면 미끄러진다고 얌전히 걸으라고 가르치시곤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손님이 잦았다. 풍수지리를 하시는 분들이나 강진에 사시는 지관이 오시기도 했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곰보아저씨로 기억한다. 해남여관 집터도 이 곰보아저씨가 땅을 보시고 응송 노스님에게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한다.

▲ 해남여관 자리에서 어머니 만법심할머니와 큰딸 이춘희씨 가족들.

-엄마친정 아버지도 스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외할아버지?

-네 아주 유명하셨어요. 육봉스님이라고, 대흥사 대웅전 아래 대흥사가 세워진 내력을 알리는 글이 있는데 8번째 중창주로 되어 있어요. 한문으로 대흥사 중창에 대한 내역이 적혀 있어요. 육봉스님이라고...

-육봉스님이 외할아버지이신거죠?

-네 맞아요. 우리 외할아버지가 짚신을 15켤레를 갈아 신어가면서 한양으로 올라가 영친왕(李垠, 1897~1970) 엄마 엄상궁이 금은보화를 많이 주셔가꼬 그것을 인천으로 배타고 저기 해남 해창까지 가셨데요. 그래가꼬 대흥사 대웅전을 8번째로 중창하셨는데 그 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 금은보화를 넣었다고 하셨어요. 그 대웅전 계단 밑엔가 보면은 육봉스님에 대해 다 나와요. 계단 아래 벽에가 그렇게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해남여관 자리에서 오래 살게 된 것도 엄마가 그 육봉스님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함부로 못하고 그랬어요.

▲ 광무 4년 대둔사 대웅전 충창보수 때 화주 육봉스님의 석문기록

서울에서 내려와 다음날 지난 9월 20일 해남으로 달려갔다. 대흥사 아래 왼쪽 석면에 중창부수 날짜와 함께 내역이 적힌 석문을 발견했다. 육봉스님은(六峯 法翰, 1867 정묘생~1942년) 갑신년 6월 1일 입적한 분이다. 1998년 12월에 간행된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라는 책 대둔사 연혁에 의하면 1899년(고종 25년)에 대웅전 일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리고 1900년(고종 25년) 육봉스님이 대웅전 일대를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황실의 후원을 받은 대웅보전 중건 불사는 1900년에 다시 대대적인 중건 불사가 벌어진다. 이것은 1899년 10월 14일 酉時에 西上室에서 시작된다. 큰불로 하룻밤 사이에 대웅전이 전소되었기 때문이다. 翠雲 慧悟가 1901년 지은 ‘대웅보전 중수기’에 의하면 이 때 대웅보전은 六峰 法翰대사가 대화주가 되고 당시 관찰사 윤웅열과 해남군수 이용우가 대시주가 되어 중건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대웅전 중건 불사에 관찰사나 군수의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웅보전의 중건 불사를 책임 맡고 있었던 육봉대사는 황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서울을 12번이나 걸어서 왕래했다고 한다. 대사의 이런 정성이 갸륵했던지 엄황비는 어린 영친왕을 위해서 기꺼이 중건 불사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후원 받은 돈은 육봉 대사의 인솔 아래 서울에서 해남까지 운반되었다. 중건에 소요될 비용이 막대했던 만큼 쇠돈의 무게와 부피 또한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이 돈을 서울에서 여주까지 수레로 운반했고, 여주에서 해남까지는 바다를 통해서 배로 운송하였으며, 다시 선착장인 해남 해창에서 대둔사까지는 짐꾼들이 지게로 옮겼다고 한다. 최근 개관한 대둔사 성보박물관에는 당시 황실의 후원을 뒷받침하는 3점의 皇室圓牌가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구술조사는 정리되었다. 지산 화중스님은 육봉 법한스님의 막내사위인 것이다. 박동춘선생의 구술조사에서는 은사이신 故 청명 임창순(임창순, 1914~1999)선생이 대흥사에 찾아 갔을 때 초의선사의 유물을 소장하고 계신 분이 있었다. 초의문집이나 또 몇 개의 자료를 얻어 오셨다고 본인(박동춘)에게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분이 화중스님인지는 모르겠다. 본인이 응송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예용해선생이 응송스님을 찾아와서 초의선사 관련 유물을 건네 줄 수 없느냐는 말까지 했는데 응송스님은 그것을 수긍하지 않았고, 화중스님만 <차를 찾아서>라는 책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박동춘선생 구술조사, 지난 9월 8일. 목요일.)

▲ 당시의 문진록을 검토해 준 박동춘선생 구술조사.

차계에서는 이미 주지하다시피 응송스님의 <동다송>은, 우록 선생님이 사진을 다 찍어서 해남의 김두만선생님과 함께 번역하여 <응송본 동다송>으로 발간되었다. 그것이 1975년도에 '문학사상'을 통하여 전국에 알려졌다. 그리고 응송스님의 <동다송>은 전국 차인들에게 보급형으로 배포되었다. 이런 작업은 전국적 규모로 차문화의 확산을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지산 화중스님의 맏딸 증언대로 <동다송>은 예용해선생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나, <차를 찾아서>에는 <초의집>이 사진으로 실리고 <동다송>은 언급이 없었다. 그 사실여부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둔사의 제다법은 지산 화중스님의 구술조사에 의해 밝혀진 셈이다. 이 제다법이 필자가 최근 동분서주하며 현장을 조사했던 제다법과 같았다. 대동소이보다는 오히려 매우 흡사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현장조사에서 재현된 시대의 증언자들의 제다법을 토대로 <대흥사의 다풍과 제다법>은 향후 논문으로 정리될 예정이다. 필자는 초의차 그리고 대흥사의 다풍 전승을 면밀히 밝혀내기 위하여 시간을 벌어 다시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능화 기자  teac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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