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서금오산 산자락 밟으며부처님 만나고 오는 길천년의 바람결 풀잎도 그대로네고즈넉한 옛 삼층석탑 아래찻자리 펴고 앉아 가을을 품는다. 당신을 만난 이 세상산 언덕 구절초도 웃으며 반겨주네시월의 따뜻하고향기로운 차 한 잔하늘과 땅 온 누리에신화처럼 그윽하구나 한줄기 청량한 바람으로신라 원효스님이내게 묻는다마음 밖에 진리가 없는데그대는 어느 마음에차를 마시고 있느냐고 문득 걸림없는 그 푸른 화두에묵묵부담 차만 마시는데선도산 너머로 지고 있는석양 닮은 낙엽 하나가 떨어진다신라 천년의 역사 한 순간이삼존석불의 미소에 담겨있네. 시 여천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 지나면 곧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농부에게는 휴식의 계절이다. 하지만 성실한 농부는 쉴 수 없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내년 농사를 위해 밭을 쟁기질 하고 두엄을 삭힌다. 그러나 그 속에 성급함이 없다. 쉬엄쉬엄 하루하루 조금씩 다듬고 되새김질 한다. 자신의 삶이고 하루 일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견학도 가고 여행도 간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내일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다. 준비되지 않는 것은 미래가 없다.
날이 갈 수록 낮이 짧아지는 시간이 짧은 계절. 마음만 앞서는 반추反芻의 나날. 밤의 시각들이 훨훨 용솟음치는 한해의 언저리. 그리 긴 시간이건만 조급함이 나를 불러 세우고. 팽나무를 쓰다듬고 보듬는다.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말하건만. 공부를 하고 또 마음공부를 하고, 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저 한 인간임을 알고 치밀어 분노할 수밖에 없다. 100년이 넘었을 팽나무 아래 무릎을 꿇는다.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한다. 나는 한 인간이라고. 머리를 숙인다. 고개를 젖힌다. 바람소리가 들린다
별들이 총총거리는 하늘, 코발트색 실크로드다. 여름 같은 가을밤. 숫한 이야기들이 넘실대며 화려하게 밤을 밝힌다. 저 하늘 실크로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희망과 사랑, 그리움으로 가득한 길이다. 그 길속에 신선한 밤의 아지랑이들이 호흡하고 사라져간다. 넓은 반석위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저 하늘의 별들과 함께. 꿈을 꾼다. 꿈꾸는 남자. 꿈꾸는 여자.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무수한 영상들을 만들어내고 잊어버린다. 아니 잠에서 일어난 그 순간 망각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간다. 왜 내가 이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꿈은 자
가을 하늘 청명한 밤이다. 소쩍새와 꿩 울음소리가 도심 속 400고지 산을 울린다. 길게 늘어선 산맥을 따라 2시간 반이면 족하다. 축복 받은 시민들이다. 숲속 소나무 위로 작은 별들은 춤을 춘다. 어둠 속 별들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살아간다. 그 희망을 찾아 빛과 어둠이라는 이중적변주곡을 넘나든다. 세대와 세대를 뛰어 넘어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산책로는 가로등이 길을 인도한다. 예전에 비해 야간 산행객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빛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반석 위에 앉는다. 어둠은 소리를 크게 맑게 들려준다. 두려움을 가
가을 햇살 너머로 풍경소리가 들린다. 꿈인 듯 서성거리는 그림자.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나침판. 아련히 들려오는 것들. 그것이 무엇이었든. 지그시 눈을 감고 만다. 살며 배운다는 것. 자신도 모르게 피부가 되어가는 것.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조금씩 자신의 아집을 버리며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만의 아집 즉 고집이 더 견고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놓지 않으려는 자신과의 사투다. 그 고집, 아집을 버린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잃어버리
하루, 하루 차를 달이고 마시는 나날들이다. 필상에 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어떤 날은 고향의 집처럼 문 닫고 하루 종일 잠을 잔다. 근심 걱정 모두 털어버리는 홀가분한 마음이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삶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작고 작은 분쟁들은 또 다른 암투로 번지고, 그 여파에 치이고 치인 것이라고 답한다. 혹자는 술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이고, 독서와 글씨 쓰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다독인다. 젊은 혈기에 앞장서서 금이니 옥이니 구별 못하고 날뛰었던 것, 이제야 생각하니 후회스럽기 그지없다고 답하고
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 같은 가을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는 미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낙엽들이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 이처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요, 사유思惟의 계절인 것이다. 가을바람은 늘 귓가를 스치며 붉게 물들인다. 마치 단풍처럼 말이다. 가을 속에는 예전부터 사상가들의 삶과 시간 이었다. 차를 마시고 책을 보았다. 낙엽을 밟으며 산책을 떠나곤 했다. 은둔의 시간이다. 때론 긴 여행의 길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사상의 정수리를 향해.가을을 품었던 사상가 장유. 윤근수尹根壽, 김장생金長生의
대사에서 장검 노래 바야흐로 부르면서/ 문원의 목이 그야말로 컬컬해질 때옛 친구가 소식을 전해 왔나니/ 새로운 그 미각이 술과 안주 압도하네팔팔 끓인 죽순국 얼마나 기막힌지/작설 넣어 달인 차 혀에 설설 감치누나번거롭게 부채 따위 부칠 필요 있으리까/ 올여름은 서늘하기 가을 같으니이식의 ‘차와 죽순을 부쳐준 한태수에게 사례하며’폭염의 계절이다. 차 향기가 가신 산천곳곳에 뜨거운 열기가 소나기처럼 내리고 있다. 산천도 중생도 뜨겁다. 그 뜨거운 계절 물을 팔팔 끓여 뜨거운 햇차 한잔을 털어 넣는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징광사澄光寺와 자생차(400년부터)징광사터로 부터 십리 지점엔 마한의 부사분사국不斯濆邪國의 치소治所 분촌(分村, 옛부숫골, 金村)과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 편입된 부사군夫沙郡의 도읍지 고읍古邑이 있다. 일찍이 대가람이 들어설 여건이 형성되었다. 동진의 마라난타는 마한에 이미 와서 366년 불회사를 창건한다.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384년 불갑사를 창건하는 등 잇단 불사를 일으킨다. 이때 징광사(벌교읍 징광이 산173번지 일대)도 창건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김주희 등).박용구 등의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마라난
대한민국녹차수도 보성군차역사를 밝혀주는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본지는 보성군의 자료제공으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보성군차역사를 연재한다.보성에는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보성군사’의 기록이 있다. AD369년(근초고왕 24년) 3월 마한馬韓의 비리국卑離國이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으로 통합될 때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설이다. ‘비리’는 마한의 소국 이름에 많이 붙여지고 있는 말이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에는 모두 54국이 있었다. 마한의 ‘비리’의 어원은 ‘불火’이라고 생각한다. 마한의
제다철이 왔다. 지금 남도의 제다 현장 곳곳에서는 ‘좋은 차’ 제다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차계의 한편에서 한국 차의 전형은 제다법에 있어서 ‘덖음차’(炒製茶), 그 이상적인 모델은 ‘초의차’로 일컬어지고 있다. ‘초의차’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지금 남도의 제다 현장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의차’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비사비 혹은 와비사비의 미학 등의 말은 매우 익숙한 용어 일 것 이다. 와비와 사비의 미학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은 단순한 미학을 넘어서 일본의 제도권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아 현재 일본의 아름다움을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야나기와 동시대인인 기타오지 로산진은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 대해 모순점들을 지적 했다. 이와 관련 본고 에서는 기타오지 로산진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 비판을 통해 두
이우환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둘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불완전에서 오는 완전함의 미학이 그것이다. 완전함이라는 것은 더하기나 곱하기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더해나간다고 할지라도 완전에는 도달 할 수 없다. 비워냄을 통해 채우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임을 야나기는 그의 저서에서 수차례 강조한다. 이우환 역시 비워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논한다. 본고에서는 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이자 설
현대사회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 비해 물건과 풍요가 넘치고 있다.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수립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에 분명하다. 풍요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물건과 행위들을 어떠한 기준에서 이쁘다 아름답다라고 분류 할 수 있을까? 또한 이 기준이라는 것은 어떠한 준거하에 성립하는가? 매우 현학적인 이야기 일 수도 있으나, 입을 옷을 고르는 것부터 취미생활에 사용할 도구를 고르는 것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미의 기준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여러 예술가및
홍인은 신중국 건국 이후 50년대에 생산된 차이다. 홍인은 생산 시기에 따라 조기, 후기로 나누어지며, 포장지의 인쇄에 따라 정홍인, 갑급홍인, 일점홍인, 쇄자홍인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홍인은 1990년 전후 홍콩의 창고로 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1920년대 몇 종류의 호급차와 골동보이차의 전설을 이룬 1950년대의 홍인은 최고의 가격으로 골동보이차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호급보이차의 맛에 익숙한 50년대 홍콩의 차시장에서는 신중국 건국 후의 첫 작품인 홍인의 쓰고 떫은 강렬한 맛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보이차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골동 보이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수요에 못 미치는 한정된 수량은 그 가격이 상승할 밖에 없었다. 골동보이차는 이렇게 전설이 되어 일반적인 보이차 애호가들은 마실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중국 역시 차 문화의 보급에 따라 보이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다보니 시장은 신차의 투자로 이어졌다. 골동보이차 가격 상승으로 보이차 투기로 활발해지면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난다. 보이차는 출시되자마자 가격이 몇배나 상승되기도 하고 있다. 품질이 급격히 좋아지거나 그
신종 코로나로 세상은 지금 카오스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가져다준 파괴의 역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 또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코로나다. 코로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져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구반대편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아마존의 산불, 호주의 산불, 미국의 산불이 가져온 효과는 우리에게 추운 겨울을 빼앗았다. 그 결과로 피해를 보는 것들이 있다. 겨울철 축제로 먹고 살았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