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근현대 차인일본 다도를 미국에 소개한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862∼1913)은 1906년에 영문으로 집필한 『The Book Of Tea(차의 책)』에서, 다도와 선, 도교, 꽃꽂이 등을 폭넓게 다루며 일본인의 미의식과 문화관을 서양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서구사회에 동양 문화의 우수함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동서양의 상호 이해를 논한 미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책인데 다도를 예술지상주의와 함께 종교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오늘날 일본다도의 위상이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원래 차 문화는 인문정신과 예술을 아우르
한국차 부흥을 위한 제언 ➁한국 차계나 차학계에서 한국차·차문화·차산업의 침체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은(걱정하는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그 원인을 주로 “커피와 보이차의 범람”이라고 말한다. 피상적 진단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 말에는 한국차의 쇠망과 부흥의 답이 다 들어있다. 한 마디로 ‘한국차의 정체성 상실과 회복’의 문제이다.‘한국차의 정체성 상실’은 “차는 기호식품”이라는 말이 대변한다. 단적인 예로 ‘00차’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00차’가 한국 전통차의 대표인 양 주장하는 이들도 “차는
(편집자 주 : 한국 차와 차문화가 침체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커피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침투 및 맹목적 보이차 추종 등 직접적인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 차계와 차학계의 잘못이 없는지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성찰과 자기 반성의 관점에서 한국 차와 차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위한 문제 제기로서 ‘한국 차 부흥을 위한 제언’ 시리즈를 시작한다. 토론의 활성화와 건강성을 위해 이에 대한 반론이나 같은 시리즈 제하의 다른 제언을 환영한다.)다예茶藝, 다례茶禮, 다도茶道 구분 못해 질책당한 한국 차학계모든
차의 스승으로 모신 금당錦堂 최규용 선생을 만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당시 나는 문학도로서 아버지가 선물한 차와 다구茶具로 차를 마시며 시와 소설을 쓰면서 봄이 오면 차실로 꾸민 내 방 창문 앞 정원의 백매白梅를 즐기곤 했다. 어느 날 차가 필요해 부산 광복동 입구 건물 1층에 자리한 고려민예사를 찾았다가 운명처럼 금당 차인을 만났다.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의 노신사가 나를 반기며 차를 대접하였고, 차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금당선생과의 인연은,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필자가 국내외 차
경봉선사(鏡峰;1892∼1982)는 간화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불보사찰 통도사 극락선원에 주로 안거하며 가람수호와 중생교화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근현대 인물이다. 근현대 불교개혁의 와중에서도 정신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당대 고승들과의 서신 및 법 거량을 통하여 독보적인 선풍禪風과 다풍茶風을 남겼다. 또한 경봉선사는 시·서·화 삼절에 다도茶道까지 겸비했는데, 특히 다도생활을 하는 나의 눈에 비친 다승茶僧으로서의 선사의 다선일미의 참모습은 아직도 가슴에 아련히 남아있다.70년대 초반부터 친구와 함께 통도사를 자주 찾았다
차 맛의 중독은 담배 중독과 같다고 생각한다. 피워 본 적은 없지만 담배를 피우는 분들을 어릴때 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 곰방대에 값싼 가루담배를 꾹꾹 눌려 담아 피우는 노인들은 아들 친구들이 인사로 고급 담배를 사다 주면 싱겁다고 안 피우고 동네 담배가게에 가서 손해를 보고서라도 봉지에 든 독하고 거친 값싼 담배와 바꿔 피웠다.차도 마찬가지다. 거칠고 강한 차맛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순하고 부드러운 고급 차를 접하게 되면 이미 길들어져 있는 맛에 비하면 싱겁게 느껴져 맛이 없다라고 인식 한다. 부드러운 차맛에 길들여 지면
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 같은 가을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는 미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낙엽들이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 이처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요, 사유思惟의 계절인 것이다. 가을바람은 늘 귓가를 스치며 붉게 물들인다. 마치 단풍처럼 말이다. 가을 속에는 예전부터 사상가들의 삶과 시간 이었다. 차를 마시고 책을 보았다. 낙엽을 밟으며 산책을 떠나곤 했다. 은둔의 시간이다. 때론 긴 여행의 길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사상의 정수리를 향해 영원한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시대를 앞선 사상가는 늘
하루, 하루 차를 달이고 마시는 나날들이다. 필상에 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어떤 날은 고향의 집처럼 문 닫고 하루 종일 잠을 잔다. 근심 걱정 모두 털어버리는 홀가분한 마음이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삶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작고 작은 분쟁들은 또 다른 암투로 번지고, 그 여파에 치이고 치인 것이라고 답한다. 혹자는 술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이고, 독서와 글씨 쓰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다독인다. 젊은 혈기에 앞장서서 금이니 옥이니 구별 못하고 날뛰었던 것, 이제야 생각하니 후회스럽기 그지없다.유중교는
차가 등급이 특품이라 해도 차실의 간결함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40년 전 내가 차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차향보다 간결하고 담백한 차실의 분위기에 반해서 차를 가까히 했다. 찻상이고 차실이고 번잡하면 차를 마실 마음이 멀어져간다. 지나치게 화려하게 차린 찻상을 보면 차를 마실 마음이 사라진다. 간결함을 몸과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차 생활을 권해보는 이유중에 제일 큰 것이다.제법 차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의 차실에 가서 종종 차를 마시는 경우가 많다. 차실을 방문할때마다 항상 나를 돌아본다. 또한 내 모습을 챙겨본다. 모두가 나의
연잎이 즐비한 저수지. 시원한 물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소나기. 짧고 강력한 여운, 뜨거운 여름날의 청량수다. 더위에 지친 나뭇잎들이 생기를 얻는다. 비단 사람만이 더운 것은 아닐 것이다. 동물이며 식물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 또한 그럴 것이다. 팔딱팔딱 개구리는 뛰어 올라 저수지로 뛰어 든다. 저수지의 물고기도 수면 위로 날아오른다. 신이 난 모양이다. 뜨거운 여름인데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햇살을 피하기 위한 파라솔이 소나기까지 막아준다. 아름드리 오동나무 밑. 커다란 키. 숫한 세월을 마주한 듬직한 나무다.오동나무 잎사귀가
차는 교유다. 특별한 교감이다. 그녀는 내가 하고자 하는 세계를 읽고 있었다. 서로 얼굴 마주 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내가 만드는 차향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정신 세계를 유희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몇년간 sns로 그냥 서로가 바라만 보았다. 따로 표현을 했다던가 따로 연락을 해서 긴 수다를 떨었다던가 그럴 일도 없었다. 그녀가 차를 주문을 했고 나는 보냈다. 그런데 빈통을 보냈다. 서로가 깔깔 웃기만 했다. 문득 그녀가 ‘파랑새는 잘 있어요?’ 하고 물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 극한의 더위와 극한의 추위가 수시로 몰려오고 있고, 세상 곳곳은 코로나 19로 인해 아사餓死직전이다. 소통과 교류는 멀리가고 통제와 단절만이 살길이라고 곳곳에서 외치고 있다. 격세지감이다. 글로벌네트워크를 통한 모든 만남이 단절되고 말았다. 초단위로 움직이던 세상이 마치 정지된 느낌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코로나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을거라고. 처음엔 그말이 먼 나라의 이야기로 느껴졌다.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단절된 세상의 고독과 고립에 대해 납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욱 강팍해지고 바다의 부유물
무엇이든 알면 알 수록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지식이 되었건 삶이 되었건 ... 안 다는것, 알고 있다는 것, 지구를 다 돈다고 지구에 대해 다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은 온통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일주일 정도 편차를 두고 대만의 지인으로부터 두번의 차를 부탁해서 받았다. 소통의 부재로 내가 찾는 맛의 차가 아닌 탓에, 혹은 내가 찾는 맛의 차를 정확하게 보낸 탓에 다시 부탁을 했다. 한가지 차는 마음에 들고 한가지 차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합차라고 받아 마셨던 동방미인을 작정하고 감별하면서 마셨는데 나의 입맛을 사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쏟아지는 ‘폭염暴炎’이다. 폭염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중 하나가 뜨거운 차를 마시는 일이다. 향을 사르고 탕관에 물을 올린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어떤 차가 좋을까. 아무래도 여름을 식힐 수 있는 백차가 좋을 듯 하다. 청량한 바람을 담은듯한 백차에 어울릴법한 다관은 백자일 듯 하다. 백차의 색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숙우와 백자 찻잔을 준비한다. 어느덧 탕관에서 작은 소리가 생겨난다. 마치 물고기의 눈 같은 물기포가 생기고 아주 미세하게 물끓는 소리가 난다.첫 번째 물이 끓는 ‘일비一沸’. 물끓는
우리차의 세상을 열기위해 원하고 바랬던 일이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져간다. 사실 골목골목 마을 어귀어귀마다 우리차 향기가 가득한 그런 골목길이 생기길 원했다. 옥정호 내려다 보이는 < 하루 >찻집, 북촌 한옥 골목길에 있는 밥집 에서 일요일에만 마로단차를 우려준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남한산성, 행주산성이 돌 하나로 시작 되었듯 누군가가 그런 자부심 하나로 시작 하는 일이 나중에 한국차의 산을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해본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 2022년 세계 차 엑스포’ 홍보 현수막을 봤다. 벌써 1년도 남지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하며 오로지 입신양명을 쫒아가던 선비가 있었다. 젊은 날 과거에 급제한 그는 나날이 그 품계가 높아졌다. 그의 권력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입신양명을 위한 청탁이 줄을 이었다. 어느날 그에게 친분이 있던 한사람이 그가 좋아하는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한적한 고을의 현령이 되고 싶다는 청탁을 하러 온 것이다.그는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덕망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그 청탁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청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좋아하는 죽로차를 직접 만들어 해마다
작년에 서울 외출 길에서 명동에 있는 오설록에 가보았다. 한국 차를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라 들었기에 궁금했다. 몇년 전 동경을 다녀왔다. 물론 차 문화를 알린답시고 차 도구를 이고지고 갔다. 단독으로 음악공연을 하는 젊은 친구랑 함께 가는 일이었다. 유럽에서 온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우리 차 문화를 알리는 나름 보람있는 일이었다. 동경 중심지에 있는 외국 관광객 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조그마한 찻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세명의 남자 팽주가 하얀 까운을 입고 손님을 응대했다. 그들은 대 여섯 종류의 차가 적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매우 중요한 철학적 명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지향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순간 매순간 어떤 대상에 격렬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언어의 폭력, 권위의 폭력, 육체적 폭력등 매우 다양한 양식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사회적 법규의 처벌을 받는다. 대상화된 분노는 법적인 제약으로 귀결되지만 대상화되지 않은 분노는 자신을 번뇌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어떤 제약에도 빠지지 않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자연에는 주체하지 못해 격렬하게 분노로 치닫는 인간의 욕망을
모든 것은 변화한다. 시간도 자연도 인간도 시시각각 변화를 한다. 변화란 운동성이며 유동성을 뜻한다. 흐르는 물처럼 끝없이 운동을 한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웃고 점심에는 찡그리고 저녁에는 분노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고 한다. 시시각각 생각이 바뀌는 것을 이른바 번뇌라고 한다. 좋은 번뇌도 있고 좋지 않는 번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의 궁극적인 현대적 표현은 스트레스다. 대부분의 인간이 시간과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생각의 물결을 일으켜서 행동을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울땐 즐
차를 만들겠다고 따로 배운적이 없다. 그림도 그랬고 음식도 그랬다. 마음이 일어나면 일단은 부딪쳐 보는 성격이다. 뭐든 궁금한 일이 생기면 실행에 먼저 옮겨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밥을 먼저 지어본다. 실패도 있고 완성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적절하냐 부적절하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는 진 밥을, 누구는 된 밥을 좋아하고, 누구는 죽을 즐겨먹는 다. 그래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도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다. 다만 들여다는 본다. 추측을 할 수는 있는 대목이 많다. 요즘 같이 동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