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밀크티. 그림 이경남.
영국식 밀크티. 그림 이경남.

산업혁명 후 영국 도시 노동자 들에게 우유와 설탕을 넣은 따뜻한 홍차는 단백질과 당분의 공급처이자 피로 회복제였다. 홍차가 노동자들의 열량 보충제로 인기를 끌자 독일 주도하에 값비싼 설탕 공급이 폭증하면서 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영국’ 하면 밀크티를 떠 올린다. 밀크티는 홍차의 쓰고 떫은 맛을 중화시키며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우유를 넣어 마시는 음료로 영국에서 가장 즐겨 마시는 차의 형태이다.

“Milk in First or Last?”

영국에서는 오랜기간 동안 우유가 먼저냐 (M.I.F) ? 홍차가 먼저냐 (M.I.L)?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여 왔다. 찻잔에 우유를 먼저 넣는 ‘우유 먼저파’ 와 차를 먼저 넣는 ‘차 먼저파’ 의 논쟁은 백년 이상 국가적인 논쟁거리가 될 정도 였다. 노동자 계층이 많았던 ‘우유 먼저파’ 의 주장은 우유를 먼저 넣어야 뜨거운 차가 도자기에 닿을 때의 충격을 완화해서 찻잔이 잘 깨지지 않고, 찻잔에 찻물 때가 남지 않고 차가 더 맛이 있다는 이유이다. 상류층이 주류였던 ‘차 먼저파’ 의 주장은 당시 매우 고가였던 홍차의 색, 향, 미를 제대로 감상한 후 우유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를 먼저 붓고 우유를 부어야 차와 우유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03년에 태어난 20세기 문학의 거장 조지 오웰은 1946년에 쓴 에세이 ‘완벽한 차 한잔을 만드는 방법’에서 차를 찻잔에 먼저 붓고 우유를 첨가한 후 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를 처음에 넣고 저으면 우유의 양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지만 반대로 하면 우유를 너무 많이 넣기 십상 이라고 하면서 “내 논거에 반론이 없을 것이다” 라고 덧붙였다.

‘우유가 먼저냐, 차가 먼저냐’ 를 놓고 노동자냐 귀족이냐를 가리는 기준으로 삼을 정도로 갈등을 일으키며 100여 년 넘게 찬반양론이 계속되었다. 2003년 오웰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영국 왕립화학협회(RSC)가 교통 정리를 하게된다. 영국왕립화학협회는 과학자, 과학교육자, 화학산업 관계자 등 4만 5000명이나 되는 멤버로 구성된 세계적인 연구단체이다.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학술단체에 로열 칭호를 수여하는데 현재의 영국 왕립화학협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로열 칭호를 수여 받았다. 왕립화학협회는 수 개월의 연구 끝에 “수 개월동안 가정을 분열시키고, 우정을 가르고, 인간관계를 분열시켰던 답으로 우유를 먼저 넣어야 한다” 결론을 발표했다. 왕립화학협회의 결론은 차를 넣은 후에 우유를 부으면 우유 단백질이 변성을 일으키기 쉽고, 우유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 가는 바람에 차의 맛과 향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 쪽은 각자의 방식으로 밀크티를 만들고 있는 듯하다. 영국인들의 80퍼센트는 ‘차 먼저파’다. 왜냐하면 현대의 찻잔은 뜨거운 차를 먼저 넣어도 그리 쉽게 깨지지 않으며 , 고온 살균 되어 나오는 우유의 경우 단백질 변성도 별로 일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왕립화학협회 발표에 우유 외에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항목이 있다. 그것은 사용하는 찻잎이 ‘아쌈 잎차’라는 것이다. 영국인은 원래 중국차를 동경하여 중국종 묘목을 인도에서 재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얼그레이나 랍상소총 등의 발명품까지 만들 정도 였다. 중국차가 여전히 제일인 상류계급과 달리 서민들에게는 값싸고 맛도 좋은 아쌈차와 실론티야말로 생필품이었다. 이후 영국인들은 아쌈 홍차를 최고의 차로 공식 인정했다. 영국인의 마음속에는 브랜드와 권위는 중국차, 속마음은 아쌈차라는 이중 구조가 있다. 이러한 이중 구조 속에서 영국화학협회의 밀크티에 관한 발표는 ’영국인이라면 홍차를 마셔야 한다’는 인식을 다시 일깨우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옛 제국의 번영을 그리워하며 국민들의 용기를 고무시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이티high tea와 로우티low tea, 티 브레이크tea break

하루에도 몇번 씩 이루어 지는 영국인의 홍차 티타임 가운데 귀족들의 애프터눈티 와는 달리 하이티high tea는 주로 서민들이 간단한 저녁식사와 함께 하는 차로 19세기에 생긴 차문화이다. 하이티high tea라는 용어는 서민층의 부엌에 있는 높은 식탁의자를 의미하며 반대로 로우티low tea는 귀족계층의 낮은 접대용 탁자에서 즐기는 애프터눈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티라는 이름이 저녁식사를 의미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은 오후 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와서 바로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변변한 주방시설이 없었던 노동자들은 미리 조리한 빵과 고기를 따뜻한 차와 먹으면 배불리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이티를 미트티meat tea라고도 부른다. 하이티의 가장 큰 장점은 저녁 식사를 겸할 수 있었고, 시간, 격식에 매이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이나 아이들까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홍차에 설탕을 넣어서 마시면 요리하지 않고도 따뜻하게 칼로리를 보충할 수 있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산업혁명시대에 남자들은 저임금으로 하루 15~16시간씩 힘들게 일 했다.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알코올 음료를 취하도록 마셨다. 음주때문에 사고도 잦았고 작업 능률도 오히려 떨어졌다. 이때문에 공장주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쉬는 시간에 술 대신 차를 제공 했다. 노동자들이 술 대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함으로써 작업 능률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티브레이크(tea break)타임의 탄생이다. 영국인 일인당 연평균 차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840년대에 이르러서는 1인당 730g, 1850년대에는 1인당 1040g으로 늘어 났다. 10년동안 1.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CTC홍차의 탄생

차는 ’몸에도 좋고 가계에도 도움이 되는 ’음료였기에 수요는 날로 늘어갔다. 단순한 기호 식품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생존에 꼭 필요한 생필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홍차를 손에 넣기 위해 사투를 벌일 수 밖에 없었다. 홍차가 노동자 계급의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의 차가 환영받았다. 중국차가 이상적인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아쌈차를 중국차에 블렌딩해서 싸게 팔 수밖에 없었다. 중국차는 완성단계에서 솥에서 덖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차의 떫은 맛을 줄이고 향을 좋게 할수 있었지만, 아쌈차는 이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맛이 강하고 수색이 짙은 아쌈차의 특징을 외려 강조할 수 있었다. 아쌈차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붉은 색에 가까운 옅은 주황색의 차와 진한 흑갈색의 차다.

이 중 진한 흑갈색의 차는 바로 CTC 홍차이다. 이것은 1930년대 신공법으로 C(CRUSH부수다) T(TEAR자르다) C(CURL둥글게) 로 불렸다. 찻잎을 아주 작게 비틀어 자른 후 대형 기계에서 가공하는 작업을 말한다. CTC는 아쌈차를 전 세계에 보급 시켰던 차로 밀크티와 티백 홍차의 주 원료이이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값이 싸며 짧은 시간에 우려 낼 수 있어 마시기 간단하고 색과 맛이 맑으며 진하다. 바쁜 현대인에게 잘 맞는 차로 인식되며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져 갔다.

이렇게 값이 싼 CTC홍차가 만들어 지면서 전 세계인들은 누구를 만나도 부담 없이 “차 한잔 할까요?”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된지도 모른다. 차를 마시는 즐거운 일상 속에서 대량의 찻잎을 채취하기위해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인도, 스리랑카,케냐 등 대규모 다원의 차 노동자들의 힘들고 어려운 수고로움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17세기에 처음 차를 접하게 된 영국은 이후 홍차를 얻기 위해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치르고 식민지에서 직접 홍차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하는등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차가 옮겨 가는 과정에서 영국은 세련된 홍차의 나라가 되었다. 몇 백년간 영국의 홍차 문화라는 옷을 입은 무력은 중국과 인도, 스리랑카 등 동양의 차 산지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약탈과 충격을 주었던 사실을 떠올리면 서양의 차에 대한 탐욕이 동양의 오랜 차 정신을 짓밟은 것만 같아서 왠지 씁쓸하다.

참고문헌

베아트리스 호헤네거, 차의 세계사, 2012, 열린 세상, p.285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이소부치 다케시, 글항아리, 2010, p.341

홍차학개론, 정영숙, 차와 문화, 2021,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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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부산여자대학교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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