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농사를 짓는 나도 사월이 되면 마실 차가 바닥이 난다. 여러 가지 차통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니 작년 가을 차 농사를 짓는 사람이 직접 만든 차를 들고 청학동에 찾아 왔었다. 한두 번 마시고 무심히 던져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차를 우려 마셨다. 며칠 전 뒷방 손님과도 함께 우려 마셨는데 그때까지는 괜찮은 차이구나 하며 예사롭게 생각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퇴수기에 쏟아 낸 엽저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그 차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체크를 해 보았다.
우선 퇴수기에 버려진 찻잎은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내가 만든 차는 그렇지 못하다. 그 같은 차는 차를 교과서처럼 배운 사람들에게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완성 된 차가 우려 마신 후 잎이 원형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내용의 이론은 누가 만들어 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차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찻잎이 부서지면 우려 낸 탕색이 뿌옇고 탁하다는 이론은 잘 못 된 것이 아니고 잘 못 전달 된 이론이다. 내 견해로는 찻잎이 부서지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유념을 많이 하는 경우, 두 번째는 마지막 가향처리를 고온에서 신속 할게 할 때 일어나는 부서짐이 있다. 전자에 언급한 부서짐은 탕색이 뿌옇게 탁하고 차맛도 어둡고 무겁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기계 유념에서 강약 조절을 잘 못 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나치게 뜨거운 찻잎을 강한 힘으로 유념하면 당연하게 찻잎이 부서지는 수준을 넘어 짓물러지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후자는 내가 만드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낮은 온도에서 시작해서 두 시간 동안 불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조절하면서 가향 작업을 하다 보니 바짝 익어 건조한 찻잎이 부서질 수밖에 없다. 만약에 원형을 보존하고 싶어서 다른 방법을 택했다면 과연 지금의 차맛을 얻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 온도의 불의 이름을 < 파도불> 이라고 명명했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의 현상에서 따 온 이름이다. 올 봄 나는 시도 해 볼 참이다. 언젠가 여행 중에 만났던 강릉 경포대 앞 호수 같은 바다를 보았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 그 호수 같은 불로 마지막 가향처리를 해 볼 참이다.
유기농 차라며 홍보하는 선물 받은 차맛은 꽤나 좋았다. 밭에서 유기농 거름을 사용해서 재배하는 제법 큰 규모의 차밭으로 알고 있다. 우려 마신 후 원형의 찻잎을 보고 흥미로워 내가 만드는 200년 된 돌 틈 사이에서 자라는 찻잎이랑 비교를 해 보고 싶어져서 혼자 놀이 하듯 품평을 해 보았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이 발견 되었다. 또한 내가 이 원고를 쓰고 돌아보니 더 흥미로운 일이 벌어져있었다. 접시에 펼쳐 놓은 엽저의 변화였다. 유기농 찻잎은 이미 말라져 수분이 사라져 오그라들었고 200년 고목에서 채취한 찻잎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그 원인의 설명은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실물이 보여 주고 있음이다. 육질이 지나친 거름으로 인해 찻잎이 얇은 것이고, 돌틈 사이에 자란 찻잎은 강하다는 이치다. 두 가지의 차에서 향은 깊고, 얇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론 퇴수기에 버려진 찻잎의 기운도 육안으로 느껴진다.
차는 한가지로 보면 품평이 어렵다. 각기 다른 차를 놓고 똑 같은 방법으로 품평 해 보면서로 다른 차를 금방 알아보기 싶다. 사람들은 유기농이라면 가격을 높이 주고 구매하는 것에 이유를 달지 않는다. 왜 찻잎에 대해서는 이유를 달려고 할까 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뒷방 손님과 일주일 동안 차를 마시며 주고받았던 한국 차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귀에 소근소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