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이와 채희가 그린 법진스님.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된 줄무늬 원피스를 입혀 꽃 그림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속눈썹인 여인으로 그렸다.
하윤이와 채희가 그린 법진스님.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된 줄무늬 원피스를 입혀 꽃 그림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속눈썹인 여인으로 그렸다.

누구나 사상가가 될 수도 있고, 철학자가 될 수도 있고, 성자처럼 살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악한 사람도 될 수 있음이다. 그러나 그 열매가 익고 맺기 전에는 그 어디에도 그 사람 이름앞에 함부로 이름부쳐 명찰을 달 수 없는 것이다. 평소 착하고 부드럽고 자비스러운 사람도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영역을 침범 당하면 발톱을 세우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사월 곡우 전 어린 우전 잎과 오월 단오의 큰 대작의 찻잎은 한 나무 한 줄기에서 나온 똑 같은 잎이다. 그런데 그 맛의 실체는 너무나 다르다. 사람인 나도 너도 그러하다. 언제 어디에 누구랑 어떻게 만났을 때 그 모습이 각각 다른 것이 생명의 본질이요. 생명의 참 근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아이를 만나도 그 마음, 노인을 만나도 한마음, 악인을 만나도 한 마음, 선인을 만나도 그 마음을 지켜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허상이고 조작 된 마음이라고 감히 말 하고 싶다.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이 한결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결 같을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걸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발걸음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누구도 틀리고 맞고 정답을 논 할 일이 아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끼는 습한 곳에서 자라고 번식한다. 양지 바르고 건조한곳에 나오면 이내 말라서 죽는다. 사람도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고, 동물도 밝은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활동하는 동물도 있다. 꽃도 마찬가지로 밤에만 피는 것이 있다. 늘 진지한 모드로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밝고 명랑하고 양명한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 동물이고 식물이고 사람이고 모든 생명의 본질은 참 묘한 것이다.

사람은 일어나는 감정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 평소 제 아무리 유순한 사람도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일에는 앞 발톱을 세워 지킨다. 차가 지닌 성품 또한 그러하다. 차 속에 숨겨진 본질을 잘 드러내려면 차와 딱 맞는 물이 필요하다. 제 아무리 잘 만들어지고 좋은 차맛이라고 해도 물 맛이 아니면 차 맛도 아닌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그 말은 허공에 빈 메아리가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금강경>에 나오는 사구게 내용중 마지막 대목에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란 말이 있다. 우리의 삶은 물거품이요 그림자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거울을 들여다 보듯 훤하고 뻔한 일을 들여다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윤이와 채희가 법진스님을 부처님 모습으로 그린 그림.
하윤이와 채희가 법진스님을 부처님 모습으로 그린 그림.

어린 하윤이와 채희는 나의 오랜 친구다. 함께 만나면 차 마시고 색칠 놀이를 하는 사이다. 때로는 내가 살고 있는 절에서, 때로는 내가 바구니에 차와 찻잔을 담아 아이들이 살고 있는 창원으로 달려가 동무가 되어 차 마시고 색칠 놀이를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돌아 온다. 두 녀석은 자매가 아닌데 자매처럼 어울린다. 한 살이 많은 채희는 한 살 어린 하윤이에게 엄격한 언니 노릇도 하고, 자상한 언니 노릇도 한다. 한 살 어린 하윤이는 언니인 채희를 언니로서 존중하고 따르고 잘 논다. 아이들 사이에도 무언으로 지키는 위계질서가 분명 있다. 성장한 어른들 사이에도 그러한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지속 될 수도 없고 지켜낼 수도 없다.

어느 겨울 방학이었다. 두 아이가 절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차 마시고 색칠 놀이하고 지루하면 햇살 따사로운 양지녘에 뛰어 놀다가 며칠만에 집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제법 나랑 정이 들었는지 하윤이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 스님은 무슨 색깔 좋아하세요.?"

" 음 ~ 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그런데 요즘은 노란색도 좋아졌어." 하고 별 이야기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참 후 아이들에게서 카톡으로 파일이 하나왔다.

“스님을 그렸어요.”

색칠놀이를 하고 있는 하윤이와 채희
색칠놀이를 하고 있는 하윤이와 채희

하윤이와 채희가 그날도 함께 놀면서 색칠 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두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나를 그려서 보낸 그림 두장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한장의 그림은 부처님을 달은 내 모습을 그렸고, 한장의 그림은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된 줄무늬 원피스를 입혀 꽃 그림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속 눈섶 긴 여인을 그려 베게까지 베게하여 누워있는 나를 그려 보냈다. 아이들 마음에 나는 부처님도 되었다가 예쁜 여인도 되었는가 보다. 참 나를 흐뭇하게 만들어 준 두 그림이다.

아이들과 함께 그린 그림중에 한 점이 지금 청학동 마로다연 차실 입구에 걸려있다. 그 날 그 천의 얼굴을 한 모습의 그림을 그렸던 날 하윤이가 했던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매일 수십번 들락 거리는 차실 현관에 걸려있는 우리 셋이 함께 그렸던 그림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번진다.

“너무 아름다워 행복해 눈물이 나요.”

법진스님, 하윤이, 채희가 그린 그림. 지금 청학동 마로다연 차실 입구에 걸려있다.
법진스님, 하윤이, 채희가 그린 그림. 지금 청학동 마로다연 차실 입구에 걸려있다.

하면서 행복의 눈물을 흘리던 하윤이가 그림속에서 웃고있다. 지금은 초등학교 삼학년이 된 하윤이가 일학년 때 일이었다. 엄마 배속에서 부터 나와 인연이 된 하윤이는 이름도 내가 지어주었다. 한동네 사는 채희는 하윤이를 통해 알게 된 인연이다. 나는 가끔 두 아이가 보고 싶어 찻잔을 싸 들고 창원으로 달린다. 아이들과 동무되어 차 마시고 색칠하고 노는 동안 우리의 우정은 더욱 깊어간다. 요즘 고학년이 되면서 나랑 만나는 시간이 줄어졌다.

마로다연의 차를 마시고 있는 하윤이와 채희.
마로다연의 차를 마시고 있는 하윤이와 채희.

“하윤아 채희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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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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