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된다. 무엇이든 끝까지 누리면 쇠할 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많이 가졌던 만큼, 한없는 기쁨과 쾌락을 누렸던 만큼, 상실의 폭 또한 깊고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수록, 여유로울수록, 잘나갈수록, 더욱 근심하고 몸을 낮춰야 한다. 석복은 한마디로 ‘멈춤의 미학’, ‘절제의 미학’이다. 절제를 모르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멈추고 덜어내는 석복의 뜻이 깊다. 그림 일지 이홍기.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된다. 무엇이든 끝까지 누리면 쇠할 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많이 가졌던 만큼, 한없는 기쁨과 쾌락을 누렸던 만큼, 상실의 폭 또한 깊고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수록, 여유로울수록, 잘나갈수록, 더욱 근심하고 몸을 낮춰야 한다. 석복은 한마디로 ‘멈춤의 미학’, ‘절제의 미학’이다. 절제를 모르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멈추고 덜어내는 석복의 뜻이 깊다. 그림 일지 이홍기.

‘석복(惜福)’은 복을 아낀다는 뜻이다.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을 소중히 여겨 더욱 낮추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오래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이 말을 사랑했다. 아껴둔 복은 저축해두었다가 함께 나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멈춤과 절제를 모른 채 끝없이 야망을 향해 질주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고 욕망의 화신이 되어 살아간다. 겸손하지 못하고 자만이 하늘을 찌른다. 고전에서 시대정신을 길어 올리는 인문학자 정민 교수가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네 글자의 행간에 담았다. 100편의 글을 마음 간수, 공부의 요령, 발밑의 행복,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네 갈래로 나누었다. 풍부한 식견과 정치한 언어로 풀어낸, 오랜 시간 숙고해온 세상과 마음에 대한 간명한 통찰의 완결판이다. 한 자 한 자 곱씹다 보면 어느새 묵직한 이야기들이 마음의 중심을 세우고 생각의 파편들을 정리하게 한다. 이 책이 작금의 시대를 꿰뚫는 혜안이 될 것이다.

제1부 마음 간수: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다잡는 마음 간수법

책의 첫머리를 여는 장은 〈석복겸공(惜福謙恭)〉이다. ‘석복’은 비우고 내려놓아 복을 아낀다는 의미다.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자제들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자만해서는 안 된다〔物盛則必衰 若等無或自滿〕.” 그러고는 두 손자의 이름을 수겸(守謙)과 수공(守恭)으로 지어주었다. 그는 다시 말한다. “처세의 방법은 이 두 글자를 넘는 법이 없다.” 자만을 멀리해 겸공(謙恭)으로 석복하라고 이른 것이다. 소동파는 “입과 배의 욕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매양 절약하고 검소함을 더함이 또한 복을 아끼고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다〔口腹之欲 何窮之有? 每加節儉 亦是惜福延壽之道〕”라고 말했다. 채우지 말고 비우고, 움켜쥐는 대신 내려놓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항상 부족함보다 넘치는 것이 더 문제다. 〈소지유모(小智惟謀)〉는 ‘못난 자가 잔머리를 굴린다’는 뜻이다. 수나라 때 왕통(王通, 584~617)은 《지학(止學)》에서 인간의 승패와 영욕에 있어 평범과 비범의 엇갈림이 ‘지(止)’란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무엇을 멈추고, 어디서 그칠까가 늘 문제다. 멈춰야 할 때 내닫고, 그쳐야 할 때 뻗대면 삶은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학》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권세는 무상한지라 어진 이는 믿지 않는다. 권세에는 흉함이 깃든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뽐내지 않는다〔勢無常也, 仁者勿恃. 勢伏凶也, 智者不矜〕.” 얼마 못 갈 권세를 믿고 멋대로 굴면 파멸이 코앞에 있다. 큰 지혜는 난관에 처했을 때 멈출 줄 알아 파멸로 내닫는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그침의 미학, 지혜의 힘이다.

제2부 공부의 요령: 생각과 마음의 힘을 길러줄 옛글 속 명훈들

이달충(李達衷, 1309~1385)의 〈애오잠(愛惡箴)〉에서 유비자(有非子)는 무시옹(無是翁)에게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이유를 묻는다. 무시옹의 대답은 이렇다. “기뻐하고 두려워함은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거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인지의 여부를 살펴야 할 뿐이오〔喜與懼當審其人吾不人吾 之人之人不人如何耳〕.” 즉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칭찬이라야 칭찬이지,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의 칭찬은 더없는 욕이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주장만 내세우며 틀렸다 맞았다 단정한다. 그럴 때는 어찌해야 할까? 내 마음의 저울에 달아 말하는 사람이 사람 같은 사람인가를 살피면 된다. 이 꼭지의 제목은 〈당심기인當審其人〉이다. ‘마땅히 그 사람을 살펴보라’는 의미다.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손이익난(損易益難)〉은 ‘덜기는 쉽고 보태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은 《산림경제(山林經濟)》〈섭생(攝生)〉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은 이익이라 별 보탬이 안 된다고 닦지 않아서는 안 되고, 작은 손해라 상관없다며 막지 않아서도 안 된다〔不可以小益爲無補而不修 不可以小損爲無傷而不防也〕.” 빠져나가는 것은 잘 보여도 들어오는 것은 표시가 안 난다. 오랜 시간 차근차근 쌓아 무너지듯 한꺼번에 잃는다. 지켜야 할 것을 놓치면 우습게 본 일에 발목이 걸려 넘어진다. 기본을 지켜 천천히 쌓아가야 큰 힘이 생긴다. 건강도 국가 운영도 다를 게 없다. 일 없다가 바쁘고, 잘나가다 시비에 휘말려 역경을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그때마다 주저앉아 세상 탓을 하면 답이 없다. 대숲이 빽빽해도 물은 막지 못한다. 구름은 높은 산을 탓하는 법이 없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아야 삶의 기쁨이 내 안에 고인다.

제3부 발밑의 행복: 사소함을 그르쳐 일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치침

〈검신용물(檢身容物)〉에서는 검신, 즉 ‘몸가짐 단속’에 대한 명나라 구양덕(歐陽德)의 말 “사소한 차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참됨에서 멀어진다〔毫釐不辨 離眞愈遠〕”가 등장한다. 관대한 것과 물러터진 것은 다르다. 굳셈과 과격함은 자주 헷갈린다. 성질부리는 것과 원칙 지키는 것, 잗다란 것과 꼼꼼한 것을 혼동하면 아랫사람이 피곤하다. 자리를 못 가리는 것을 남들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착각해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진무경(陳無競)이 제시한 용물, 곧 ‘타인을 포용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진실한 사람은 외골수인 경우가 많다. 질박하고 강개하면 속이 좁다. 민첩한 사람에게 꼼꼼함까지 기대하긴 힘들다. 좋은 점을 보아 단점을 포용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매섭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반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가?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은 입으로 짓기 쉬운 16가지의 잘못을 경계한 바 있다. 〈구과십육(口過十六)〉은 ‘입으로 짓는 허물의 가짓수’에 대한 설명이다. 허목은 〈불여묵전사 노인의 16가지 경계〔不如默田社老人十六戒〕〉를 통해 노인이 입으로 짓기 쉬운 허물을 주욱 나열한다. 실없이 시시덕거리는 우스갯말(행언희학(行言?謔)), 입만 열면 여색에 대한 이야기(성색(聲色)), 재물을 밝히는 것(화리(貨利)), 걸핏하면 화를 내는 언사(분체(忿?))등 16가지다. 허목은 마지막에 이렇게 글을 맺는다. “삼가지 않는 사람은 작게는 욕을 먹고, 크게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 마땅히 경계할진저〔有不愼者, 小則生?, 大則災及其身. 宜戒之〕!” 구과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바로 침묵이다. 허목이 어떤 말도 침묵만은 못하다는 뜻으로, 거처 이름을 ‘불여묵전사’로 붙인 이유다.

제4부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당장의 이익과 만족에만 몰두하는 세태에 대한 일침

유관현(柳觀鉉, 1692~1764)은 필선(弼善)으로 서연(書筵)에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사도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이 제문을 지어 보냈는데 거기에는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꼽은 대목이 있다.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의미하는 〈난자이사(難者二事)〉이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

1594년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에서 적군을 막아 지키는 방책을 열 가지로 정리했다. 그중 척후(斥候)와 요망(瞭望)의 효율적 운용이 첫 번째로, 적병의 동향을 미리 파악해 선제적 준비를 갖추려면 선기(先期)와 원포(遠布)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미리 보고 멀리 보자’는 〈선기원포〉란 사자성어가 여기서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를 지켰는데 한 사람이 적이 코앞에 와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일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군대를 동요시킨다며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결국 이튿날 전군이 궤멸당했다. 장수들은 큰소리만 뻥뻥 치며 무턱대고 움직이다가 갑작스레 적과 마주치면 놀라 두려워 도망치기 일쑤였다. 유성룡이 말했다. “앞 수레가 부서진 줄 알면서도 바퀴를 고칠 줄 모른다면 진실로 뒤집어지고 부서지는 길이다〔夫知前車之旣敗 而尙不知改轍 則是固覆敗之道也〕.” 닥쳐서 허둥대면 늦는다. 항상 미리 보고 멀리 봐야 한다.

위선과 독선으로 점철된 혼탁한 시대, 몸과 마음을 밝혀줄 네 글자 성찰

위선과 독선이 판을 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른 채 이리저리 휩쓸린다. 섣부른 판단으로 잘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오랫동안 공들여 쌓았던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다. 요즈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모습들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이러한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된다. 무엇이든 끝까지 누리면 쇠할 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많이 가졌던 만큼, 한없는 기쁨과 쾌락을 누렸던 만큼, 상실의 폭 또한 깊고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수록, 여유로울수록, 잘나갈수록, 더욱 근심하고 몸을 낮춰야 한다. 석복은 한마디로 ‘멈춤의 미학’, ‘절제의 미학’이다. 절제를 모르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멈추고 덜어내는 석복의 뜻이 깊다. 이 책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혜훈(惠訓)이 되어줄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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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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