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의 구비전승과 차의 기원 3

그렇다면 통도사의 차는 누구에 의해 시작된 것일까? 많은 구비전승은 창건주 자장을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전승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930년대 일본인 모로오카 타모쓰(諸岡存:1879-1938)과 이에이리 카즈오(家入一雄:1900-1982) 등이 통도사를 직접 방문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경내에 야생차가 번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내의 차수는 자장이 입당하여 가져온 차종을 재배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차에 관해서는 문헌이 분명치 않으나, 이 절의 개조인 자장율사는 고승으로, 그 이름을 전국에 떨쳐 그를 스승으로 구하여 온 자가 많았고, 이들은 좌선을 하고 차를 마셨다고 했다. 1)이처럼 통도사의 차문화는 자장율사가 당으로부터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차씨앗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승은 언제부터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에도 차연구가들의 조사에서도 그러한 전승들이 끊임없이 채집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항은 김대철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올 때 불적(佛跡)을 가져왔는데 그 속에는 부처의 진신 사리와 함께 사찰에서 불공을 드릴 때 필요한 차와 향이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2) 즉, 자장이 당에서 차를 향과 함께 가지고 온 것은 그것들이 불공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안직수는 당에서 가지고 온 차씨를 자장이 “그 귀하디 귀한 장소를 빙 둘러가며 차나무를 심었다”고 했다.3) 실제로 금강계단과 정변전 뒤에는 야생차 군락이 있다. 아마도 이를 두고 그렇게 보았을 수도 있다. 또 박상규도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과 함께 차 종자를 구해 왔다고 했다. 이처럼 통도사의 차문화는 7세기 자장율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하여 임선숙은 신라의 차문화 역사는 김대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사찰에서 이미 차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증거가 통도사의 사례라고 했다.4)

이러한 견해들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 김기원의 연구이다. 그는 자장암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차 종자를 자장암에 심었다는 차나무 전래설이 있다고 소개했다.5) 즉, 그는 자장이 최초로 차나무를 심은 곳을 자장암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장암에는 다음과 같은 차민요가 있다고 소개했다.

(1)

영축산록 자장골에 자장율사 따라왔던

자장암의 금개구리 차씨한알 토해주소

우리딸년 시집갈때 봉채집에 넣어주어

떡판같은 아들낳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문중에 꽃이되고 이가정에 복을주소

점제하려 비옵니다.

(2)

둥개둥개 두둥개야 금자동아 은자동아

천리금천 내새끼야 자장암에 금개동아

영축산록 차약일세 좀티없이 자라나서

한양가서 장원급제 이낭자의 소원일세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처님전 비나이다.6)

이상에서 보듯이 통도사의 차민요는 2절로 구성되어있다. 전체 내용은 시집온 며느리가 봉채집에 넣어서 가지고 온 차씨를 가지고 차를 심어 그것을 차약을 만들어 아들 딸 낳아 건강하게 잘 길러, 그 자식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러한 가운데 차는 혼인할 때 봉채로서 사용된다는 것과 그것으로 아이들을 건강을 지키는 차약을 만든다는 민속적인 지식도 함께 들어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축산록 자장골에 자장율사 따라왔던 자장암의 금개구리 차씨한알 토해주소」라는 가사에서 보듯이 이 민요를 불렀던 통도사 인근 지역민들은 통도사의 차가 자장율사를 따라왔던 금개구리가 토해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자장암의 금개구리를 통도사 신자들은 「금와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보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출현하면 보기 위해 자장암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 금개구리에 대해서도 『통도사시(通度寺誌)』는 「금와변현(金蛙變現)」이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자장암 뒤 석벽 아래에는 작은 샘 있는데, 스님이 지팡이를 꽂아 물을 나오게 하였으므로 석벽 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개구리 두 마리가 물을 흐리게 하므로 스님은 무명지로 돌을 뚫어 구멍을 내고 개구리를 집어넣어 맑은 물을 흐리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로 한 쌍의 금개구리가 어떤 때는 벌과 나비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미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숨거나 나타남에 신처럼 날아다녀 명산(名山)과 여수(麗水)에 자재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떤 때는 밥 위에서 울고, 어떤 때는 어깨 위의 옷에 올라가며, 있다가는 갑자기 없어지고 없다가는 갑자기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기 어렵게 하고, 아직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가리키기도 어렵게 하여, 어떤 사람이 한 번 보기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게 되어 입에 침이 마르는 것이었다.

이상의 전승에서 보듯이 자장암 뒤 석벽에 작은 구멍에 사는 한쌍의 금개구리는 자장과 함께 통도사에 왔다. 이러한 금개구리가 차씨를 토해낸 것이 통도사의 차라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음을 차민요를 통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이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통도사 차민요의 특이한 점은 다른 자료와 달리 통도사의 차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자장암의 금개구리가 토해냈다는 것은 외부전래가 아닌 원래부터 있었다는 자생설의 시각이다.

사실 자장율사는 636년(선덕5) 왕명으로 제자인 승려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으로 건너갔다. 그는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인 오대산(五臺山)에 올라가, 문수보살상에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고, 가사(袈裟, )와 불사리(佛舍利)를 얻었다. 그 이후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자, 당의 태종(太宗)이 그를 맞아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게 했다. 그 후 그는 태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절벽바위에 기대어 집을 만들고, 그곳에서 3년을 살면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장안으로 돌아온 자장은 명성을 떨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활약을 하였는데, 643년 선덕여왕이 자장을 불러들여, 7년의 중국생활을 접고 당 조정으로부터 받은 많은 선물과 함께 신라에 없는 불경과 여러 불교 물품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행적으로 보아 그가 거주하고 활동한 영역은 중국에서도 당시 수도였던 장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지역은 차가 생산되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자장이 차씨를 가지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귀국 이후 곧 바로 통도사를 창건한 것이 아니다. 3년 정도 황룡사에 주석했다. 따라서 그가 당시 완성된 중국의 차를 가지고 왔을 수는 있으나, 그것을 재배할 수 있는 차씨 또는 묘종을 가지고 귀국했다는 견해는 그다지 설득력을 지닌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의 차밭은 당나라 불교사원에서 익힌 차문화를 고국인 신라에서도 펼치기 위해 기존의 차를 이용하여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능화(李能和:1869-1945)가 일찍이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에서 “김해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世傳 首路王妃許氏自印度持來之茶種)”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장이 통도사 차밭조성에 이용한 차는 오래전부터 신라에 있었던 차나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이 통도사 차문화에 관련한 기록과 전승은 7세기 이전에도 신라에 차가 자생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차밭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실로 중요한 자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諸岡存, 家入一雄共著, 崔淳子譯(1983) 『朝鮮의 茶와 禪』 삼양출판사, pp.55-56. 

2)김대철(2003) 『우리 차 문화』 차의 세계, p.320. 

3)안직수(2009) 「통도사와 신라 차나무」 불교문, 2009.04.18(http://www.ibulgyo.com)

4)임선숙(2021) 「경봉선사의 선다시 고찰」, p.697

5)김기원(1995) 「한국차민요조사」『한국차학회지』(제1권), p.86. 

6)김기원(1995), 앞의 논문, pp.85-86.

7)성범중(1999) 「통도사와 한시」 지역문화연구, p.67. 원문은 다음과 같다. 「慈藏庵後石壁下有小泉. 師揷錫出水 石壁上有小穴. 二蛙濁水. 故師以無名指穿石. 出穴入蛙 勿濁淸水. 自此以後. 一雙金蛙. 或現蜂蝶. 或現蜘蛛. 隱現如神飛行 自在名山麗水 無所不到. 或上飯器. 或上肩衣. 有忽無 無忽有. 令人疑信 難指於未見之人. 若人一見. 向人健誇 乾於脣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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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 명예교수 노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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