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 노성환 명예교수가 통도사국제차문화학술대회에서 한국차의 시작은 8c기 전래설이 아닌 7c 토착설을 주장했다,
울산대 노성환 명예교수가 통도사국제차문화학술대회에서 한국차의 시작은 8c기 전래설이 아닌 7c 토착설을 주장했다,

지난 7월 27일 무더운 여름날 중국 항주 「차엽박물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흔(晏昕) 부관장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으로 전시물들을 상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때 놀라웠던 사실은 중국의 차문화가 주변국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코너에 한국의 차는 김대렴의 차전래를, 일본은 사이초(最澄:767-822)의 차전래를 각각 기준으로 삼고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828년, 일본은 805년을 기준으로 차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차에 대한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역사와 지리적인 상식을 가졌다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될 일인가? 한반도는 일본열도에 비해 중국대륙과도 연결되어있고, 해상으로 보더라도 거리적으로 가깝다. 그러므로 일본보다 일찍이 중국과의 문화적 접촉이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유학승들의 중국 진출도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차문화가 일본보다 늦게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도 벗어난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비단 중국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있어 왔다. 가령 조선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신라기』 흥덕왕 3년 겨울 12월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얻어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명하였다.”고 했다. 그 이후 노사신(盧思愼:1427-1498), 이행(李荇:1478-1534), 이수광(李睟光:1563-1629),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한치윤(韓致奫:1765-1814), 이규경(李圭景:1788-?), 조재삼(趙在三:1808-1866), 박영보(朴永輔:1808-187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었다. 심지어 그 중에서도 한치윤은 『해동역사(海東繹史)』(제26권)에서 일본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동국통감』서 말하기를 신라국에서 대렴을 당나라에 보내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차 종자를 얻게 하였는데, 왕이 명하여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에서 차를 심은 시초이다.1)

이상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신라왕이 대렴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일본에서 수입된 차를 얻어 와 지리산에 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술적 검토없이 대렴공이 전래한 차씨가 우리 차문화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거의 정설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구례 화엄사 입구에 「신라대렴공차시배지(新羅大廉公茶始培地)」, 그리고 하동의 쌍계사 입구에 차나무 시배지와 관련된 「신라견당사 김대렴공차시배추원비(新羅遣唐使 金大廉公茶始培追遠碑)」가 세워졌을 리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존의 상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히 김대렴의 공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릇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성환 명예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학술적 검토없이 대렴공이 전래한 차씨가 우리 차문화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거의 정설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존의 상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히 김대렴의 공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릇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은 옛 통도사 지도.
노성환 명예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학술적 검토없이 대렴공이 전래한 차씨가 우리 차문화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거의 정설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존의 상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히 김대렴의 공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릇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은 옛 통도사 지도.

2.한국 차문화의 기원

대렴을 차문화의 시원으로 잡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제10), 흥덕왕(興德王) 3년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흥덕왕 3년(828) 12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바쳤다. 당 문종이 인덕전에 불러 연회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당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왔는데,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에 이르러 널리 퍼졌다(興德王三年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至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宣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그런데 이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즉, 지리산의 차 전래는 대렴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신라의 차는 그 이전 선덕여왕(606-647) 때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에 차는 대렴이 아닌 선덕왕(善徳王)의 재위기간인 632-647년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된다. 즉, 한국의 차는 대렴의 9세기가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 7세기 때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정희는 “이 기록을 근거로 차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했다.2) 그리고 이행철은 이것은 신라가 7세기부터 차나무를 재배하여 토산차를 생산했으며 9세기 흥덕왕 때 들어와 차의 생산과 보급이 크게 늘어나면서 음다가 성행했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3)

사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신라의 화랑들은 명산대천을 다니면서 차를 즐기며 심신 수련했다. 효소왕(孝昭王: 687-702) 때 사선(四仙: 永郎· 述郎· 安詳· 南郞)이 놀았던 경포대(鏡浦臺) · 한송정(寒松亭) 등에는 다천(茶泉), 돌아궁이, 돌절구가 조선 초기까지 전해졌다. 4)이처럼 화랑들에게 차는 중요한 음료수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하며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원광(圓光: 542-640)은 589년 수나라에 유학을 떠나 600년에 귀국한 승려이다. 그는 진나라 금릉(金陵=남경)에 장엄사(莊嚴寺)의 승민(僧閔) 대사 문하에서 『성실론』 『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소주 호구사(虎邱寺)에 들어가 『구사론』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불경을 강의해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가 거주했던 호구사는 특히 교연(皎然:730-799) 5)스님의 「호구산도 어느새 향기 높은 차를 산출하는 덕이 되었구나」6)한 시에서 보듯이 유명한 호구차를 생산했던 곳이다. 그리고 육우(陸羽:733-804)가 명천으로 꼽고 있는 석천수도 호구사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호구차를 두고 소주태수(蘇州太守)이자 시인인 위응물(韋應物: 737-792)이 삼계정(三癸亭)에서 육우와 마주앉아 「본래 茶란 결백한 것. 그 무엇도 더럽힐 수 없고 즐겨 마시면 세상의 번뇌와 먼지도 씻어준다. 이 물건이 참으로 영물이 아닌가. 그것은 본래 山의 精을 마시며 자랐기 때문이다. 한가한 틈을 타 묵은 뜰에 대충 심어두었더니 풀 더미 속에 자라나 이 은둔자에게 말을 걸어오네」7)라는 시를 남겼다. 이들이 차를 통해 교분을 쌓고 차의 사상을 논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직접 차를 재배하고, 제다한 호구사의 승려들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생활을 한 원광은 당시 중국 선원의 차문화를 익혔을 것이며, 그것이 가지는 효능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신라의 화랑에게 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노성환 교수는 "한반도는 일본열도에 비해 중국대륙과도 연결되어있고, 해상으로 보더라도 거리적으로 가깝다. 그러므로 일본보다 일찍이 중국과의 문화적 접촉이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유학승들의 중국 진출도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차문화가 일본보다 늦게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도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통도사 금강계단.
노성환 교수는 "한반도는 일본열도에 비해 중국대륙과도 연결되어있고, 해상으로 보더라도 거리적으로 가깝다. 그러므로 일본보다 일찍이 중국과의 문화적 접촉이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유학승들의 중국 진출도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차문화가 일본보다 늦게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도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통도사 금강계단.

또 선덕왕 때 차가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원효(元曉:617-686)와 설총의 차와 관련된 전승과 기록이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卷第22)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의하면 「원효방(元曉房)」은 원효가 머물던 곳인데, 그 때 ‘사포성인(蛇包聖人)’이 그곳에서 솟는 물로 차를 달여 원효에게 바쳤는데, 그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아 항상 차를 달였다고 했다.8) 그리고 그의 아들 설총(薛聰:658-730)이 지은 「화왕계(花王戒)」에도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라는 내용이 있다. 이들 부자들이 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활약했던 시기 이전에 이미 신라에 차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원광의 유학생활을 통해 신라 화랑들의 음다문화를 추정하고, 또 원효와 설총 등을 통해 선덕왕 이전부터 신라인들의 음다문화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 차가 국내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니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차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이행철은 “왕실과 불가에서 소비되는 대량의 차를 중국에서 수입한 차에 의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응당 신라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고 생산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선덕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말은 선덕왕 때부터 차를 생산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보았다. 그 증거로 그는 719년 중국으로 건너간 김교각(金喬覺: 697-794)이 구화산에 가져간 신라의 차씨, 그리고 8세기 초 신라승려들이 만행을 떠날 때 차씨를 휴대했다는 것을 들었다.9)

이러한 그의 의견에 대해 7세기 당시 신라 국내에서 차가 생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가 되나, 김교각과 8세기초 스님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7세기의 선덕왕 대가 아닌 8세기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활약상이 간접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7세기 신라에 차밭과 제다를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통도사에 있다. 그것이 바로 1642년(인조 20)에 간행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이다. 이것은 이 책을 구성하는 첫 장의 제목이고, 이 책의 정식 명칭은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이다. 본문에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 「사리영이(舍利靈異)」, 「가사희기(袈裟稀奇)」, 「사지사방산천비보(寺之四方山川裨補)」, 「서천지공화상위사리가사계단법회기(西天指空和尙爲舍利袈裟戒壇法會記)」, 「통도사창조자장행적(通度寺創祖慈藏行蹟)」 등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래 통도사의 사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즉, 통도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적기는 특성상 일단 한번 기록된 것을 반복하며 옮겨 적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통도사사적약록』이 비록 1642년에 간행된 것이긴 하나, 그 내용은 초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차에 관한 기록은 사찰의 정통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는 신뢰성은 높다 할 것이다.

1.韓致奫 『海東繹史』(제26권)「物産志」: 東國通鑑云新羅國遣大廉如唐得茶子于日本來王命植智異山. 是乃朝鮮國種茶之始 和漢三才圖會.

2.박정희(2015)『한국 차문화의 역사』 민속원, p.31.

3.이행철(2021) 「차인(茶人) 최치원과 우리 다도(茶道) 문화의 원류」『2021년도 고운 최치원 학술대회 -고운 최치원과 한국 전통문화』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p.14.

4.『신증동국여지승람』: 「석조, 석지, 석정이 모두 한송정 옆에 있으며, 4신선이 노닐 때 차 달이는 기구였다.」/ 金克己(1148-1209)의 「한송정」: 「신선들 떠나고 송정만이 남았는데, 산속엔 돌부뚜막 그냥 있구나」/ 李穀(1298-1351)의 『동유기』: 「날이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대에는 예전에 집이 없었는데, 요즘 호사자가 정자를 지었으며, 그 위에 옛날 신선의 돌화로가 있으니, 이는 차달이는 도구이다.....다만 돌화로, 돌못과 두 개의 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것 역시 네 신선의 다구이다.」 등의 기록이 있다.

5.당 현종(685~762) 때 詩僧. 皎然은 법명. 그는 사령운(謝靈運)의 10대손이며, 현재 浙江省 江興 출신이다. 출가한 뒤 오흥(五興) 저산(杼山)의 묘희사(妙喜寺)에서 지냈다. 위응물(韋應物), 유우석(劉禹錫), 이단(李端) 등과 깊게 교유하였고 산수와 종교를 주제로 시를 썼다. 주요저서로는 『시식(詩式)』, 시집으로 『교연집(皎然集)』이 있다. 특히 그는 육우(陸羽: 733-804)와는 절친의 지기(知己)였다. 그의 다시(茶詩) 「음다가초최석사군(飮茶歌誚崔石使君)」를 통해 최초로 다도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육우에게 『다경(茶經)』의 집필을 종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논문 울산대명예교수 노성환

6.윤석관(1989)「中國 茶문화紀行(9) <杭州 龍井茶>」 부산일보, 1989. 12.29(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

7.韋應物의 「喜园中茶生」: 潔性不可污,為飲滌塵煩。此物信靈味,本自出山原。聊因理郡餘,率爾植荒園。喜隨眾草長,得與幽人言。

8.東國李相國全集(卷第二十三) 「南行月日記」: 元曉房。.....傍有一庵。俗語所云蛇包聖人所昔住也。以元曉來居故。蛇包亦來侍。欲試茶進曉公。病無泉水。此水從巖罅忽湧出。味極甘如乳。因嘗點茶也.

9.이행철(2021) 앞의 논문,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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