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차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마치 ‘초의차’가 전통차이고 ‘초의 제다법’이 한국 전통제다법인 양 주장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왔고, 그에 따라 ‘초의차’론은 한국 차문화와 차산업에 긍정 부정의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른바 그 ‘초의차 신봉자’들 중에는 승려가 여럿 있고,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처럼 승려로부터 ‘유일하게’ 초의다맥을 전수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살’도 있다(이하 경칭 생략).

승려 초의차 신봉자들 가운데는 ‘초의차’ 관련 ‘차명인’ 칭호를 얻어 제다업체를 설립하고 초의차 장사를 크게 하는 이도 있고, 개인 절집에서 차를 만들어 팔며 “초의다맥 0대 계승자”라고 큼직한 간판을 내건 사람도 있고, 피아골 같은 절골 근접한 곳에 솥단지 걸어놓고 승복을 걸치고 초의 제다법이라 할 수 있는 덖음제다로 차를 만들어 팔며 차승(茶僧)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고, 초의차 관련 학회와 연구소를 만들어 해마다 ‘세계..’ 또는 ‘국제..’라는 이름이 붙은 대형 차행사를 열어 중국 보이차 선전도 해주며 차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승려 등속이 있다. 이들이 초의차 신봉자임을 내세우는 데 유리한 점은 초의와 같은 승려신분이라는 것이다. 민간인이 승복을 걸치고 덖음차 비슷한 것을 만들어도 일단 그 ‘유명한’ 초의차류를 만드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니, 승복 입고 큰 차탁 앞에서, 비록 보이차를 따라 놓았더라도, 목에 힘주고 염주 굴리며 근엄하게 “초의차가 어떻고... 동다송이 저쩌고 ... 다선일미란...” 운운하면 내용의 옳고 그른 맥락이나 깊이와 무관하게 그럴싸해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 승려들 가운데 초의차 선양에 공이 큰 자리에 여연스님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승복은 걸치지 않았지만 스님과의 인연과 ‘초의차’를 강조하며 오늘날 초의차를 ‘대단한 차’인 양 인식(또는 오인)되게 하는 데 공을 세운 이는 박동춘이다. 두 사람은 최근 거의 동시에 초의의 『동다송』 관련 책을 경쟁하듯 펴내기도 했다. 위에서 초의차 신봉자들이 한국 차문화 발전에 긍정 부정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초의차’를 강조해 온 추세가 한국 차문화의 양상을 뒤틀어 놓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지, 그런 역할이 한국 차산업 침체와 어떤 영향 관계에 있지는 않은지 한국 차인 모두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차계와 차학계에서는 일찍이 대형 차행사권을 거머쥔 소수의 특정 ‘차권력카르텔’이 나눠먹기식으로 차축전과 학술행사를 천편일률적으로 구태의연하게 상업성 편향으로 독점 주도하다시피 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정설로 통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발붙일 틈이 없는 철옹벽을 두르고 있다. 나는 이 거대 ‘차권력’의 횡포에 아무도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차문화 왜곡과 차산업 침체를 심화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고, 한국 차문화 발전을 위해 계기가 있을 때마다 비판적 발언을 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한국 차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여연스님이 최근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을 거론해 보고자 한다.

초의가 그랬듯이, 여연스님은 오랜 기간 일지암에 기거하며 차를 말했고, 그 일을 인연으로 한 다승으로서 이후에도 강진 백련사 주지를 맡아 차인연을 이어갔다. 또 차와 관련하여 목포대로부터 명예박사학위도 받았으며, 지금은 큰 절 차 관련 직함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연스님의 두드러진 차행적은 그가 오랜 기간 대형 차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차행사 외에도 대형 찻자리들에 주빈으로 초대돼 ‘다담’이나 축사를 부탁받는 등 융숭한 대우를 받곤 한다.

여연스님은 지난 1일 강진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이 무형문화재 전승공동체활성화지원사업 수행의 일환으로 연 심포지움 <월출산 차문화 천년의 역사>에 초대돼 “대종사”로 소개받아 오른 단상에서 축사 겸 다담茶談 부탁을 받고 “....차는 돈이 되어야...!”라고 일갈하였다. 그는 또 심포지움 토론 자리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이 차를 우릴지 몰라서 다동들이 했다. 스님들은 (차를 잘 알아서)....”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나는 그가 몇 해 전 순천만정원에서 열린 한 차행사장 단상에서 “내가 ㅎ00 의원을 만나 (공공 차행사를 위해?) 0억원을 확보해 놓고 왔다”고 자랑삼아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이런 언행을 요약하면 차로써 돈벌이 하는 것이 중요하며,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차를 잘 모르고 스님들이 차를 잘 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도 스님들이나 불가가 차문화의 중심이거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린다. 다승으로서 ‘차에 관한 거룩한 말씀’이어야 할 축사 다담에서 차와 돈을 결부시키는 인식의 틀, 그가 대형 차행사를 주도하고 있고 그런 차 행사장들이 중국 보이차 선전장이 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 승복 입고 고가의 ‘0향차’를 파는 이름모를 차장사꾼들이 요즘 유독 눈에 띄는 현상 등을 연계하여 내가 받은 인상을 간추리자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여연스님의 이런 발언은 그가 고명한 다승茶僧으로 인식돼 차계에서 차지하는 무게로 보아 차에 관한 정설로 받아들여져서 불자와 대중의 차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 우려에서 나는 아래와 같이 여연스님의 발언을 비판하고자 한다.

‘차=돈’이 ‘다선일미’ 정신일까?

돈벌이가 목적인 차상인이라면 몰라도, 모름지기 존경받는 다승이라면 차문화학술심포지움이라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차인, 차학인, 다선일미의 정신으로 차를 하는 불자, 일반인들이 기대했을 만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문화학술심포지움 축사가 차를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할 방안을 학술적·문화적으로 찾아보라는 것으로 들리니 말이다. 그 자리에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차생활을 하고자 하는 일반인, 차모임을 하는 차인, 수제차 제다농가, 차공부를 하는 학생들, 그리고 당장은 차에 관심이 없지만 미래 차 소비자가 될 만한 사람들까지도 차로써 이름 높은 승려나 차명망가들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왜 차를 마셔야 하는가? 어떤 차가 좋은 차이며 그런 차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진정한 다도가 무엇이며 차생활을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가? 등일 것이다. 이런 질문에 누구라도 “차는 곧 돈이다. 차는 돈을 벌기 위해 마신다. 돈버는 데 목적을 두고 차를 만들어야 한다. 다도는 차로써 돈을 추구하는 일이다. 차를 돈과 결부시켜 생각하며 차생활을 해라 .... ”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욕 금전욕을 포함한 오욕칠정을 다 버리고 참 진리를 찾아 수행정진하는 승려의 본분에 걸맞게 여연이 ‘다선일미’의 참뜻을 차문화학술심포지움 축하 다담으로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차농가들의 수익성을 고려해 돈얘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소비자에게 차의 본질을 이해시켜서 바른 차생활을 통한 차소비 진작을 기하도록 하는 게 차인으로서 올바른 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선승 초의를 다승으로 부각시키고 그것에 의존하여 명나라 제다법을 초의제다법이자 한국 전통제다법으로 위장시키는 변칙적이고 공학적인 방법으로 ‘초의차’를 강조한 것이 오늘날 한국 전통차문화와 차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성찰해 봐야 한다는 의미로 앞에 말한 바 있다.

초의왈 “총림에 조주풍은 있으나 다도茶道를 모른다”

여연스님이 그 자리에서 한 “조선시대 양반들이 차를 우릴지 몰라서 다동茶童들이 했다. 스님들은 차를 (잘 알아서)....”란 말도 비판의 여지가 많다. 우선 그는 차문화사적 사실을 잘 모르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 간혹 들에서 차마시는 그림에 다동이 차부뚜막에 불을 지피고 있는 광경이 있다. 다동이 물과 불 심부름을 했을 망정 차를 우린 것은 아닐 터이다. 조선시대 차문화를 주도한 층은 김시습에서 다산에 이르기까지 유·불·선(도)을 섭렵한 선비 그룹이고, 그들이 남긴 차시를 보면 직접 차를 기르고 제다해서 우리고 마시는 흥취나 그렇게 해서 이르는 득도의 정경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여연스님은 ‘초의차’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고려·조선시대 불가 차문화의 역할과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정통성’을 주장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스님들이 차를 잘 알았다거나 불교가 차문화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억측이거나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초의차 신봉자들의 ‘차문화 불교중심설’을 반증(반대를 입증)하는 단적인 물증이 초의의 『다신전』 발문이다. 초의는 명나라 장원이 쓴 『다록』의 주요 내용을 ‘다경채요’라는 이름으로 『만보전서』에 옮겨놓은 대목을 그대로 베껴 『다신전』을 쓰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발문에 “총림(큰 절간)에 조주풍(차를 마시는 풍조)이 있으나 다도(『다신전』에 나오는 차를 만들고 저장하고 우리는 일)를 모른다. 그러니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만보전서 다록 부분을) 베껴 옮겨 다신전을 쓴다. ... ”고 하였다. 스님들이 제다製茶 장다藏茶 포다泡茶를 모르므로 명나라 제다법 장다법 포다법을 소개하는 『다신전』을 써서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초의의 덖음차가 한국 전통차? ‘한국 차문화 중흥조’는 다산!

명나라 제다법을 베낀 『다신전』을 기반으로 하는 ‘초의제다법’과 ‘초의차’가 한국 전통제다법이거나 전통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특정 주체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라거나 “고려시대에 차문화가 성했고 조선시대에는 차문화가 쇠퇴한 것을 초의가 중흥시켰다”는 일부 초의차 신봉자들의 주장도 사실왜곡에 가깝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팔관회등 일부 제천행사에 차를 썼고, 다시茶時 등 궁중의 차행사 제도가 있었으며, 대차와 뇌원차 등 차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차문화의 핵심인 제다나 중요한 찻일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무하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제다와 수양다도론 등 차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다부』 『부풍향차보』 『동다기』 『각다고』 『동다송』 등 현존하는 모든 고전 다서들이 저술되었다. 이 다서들은 『동다송』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가 선비들이 저술한 것이다.

또 다산은 다서 저술 외에도 『부풍향차보』와 『동다기』 등에 전래된 생배生焙 및 증배蒸焙 제다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독창적인 구증구포 단차 및 삼증삼쇄 차떡 제다를 완성함으로써 한국 차문화사상 전무후무한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제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제자들에게 ‘차정신’을 강조한 수양다도를 실천하게 했다. 「다신계절목」‘약조’에 일 년에 두 번, 청명이나 한식날과, 국화가 필 때 계원들은 다산에 모여서 모임을 행하며 韻字(운자)를 내어 부나 시를 지어 연명으로 적어 유산(정학연)에게 보내는 일을 해야 하며, 곡우날 어린 찻잎을 따서 은근한 불에 말려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들어 시로 쓴 편지와 함께 부치기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한 해 세 절기(한식, 청명, 국화 필 무렵)에 시를 지어 보내고 또 시와 차를 함께 부치도록 한 것은 절기의 순환과 시가 갖는 덕성 즉 성실함(誠) 곧 신信을 체득하도록 한 수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에게서 공부한 초의는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에게 보낸 차시 「산천도인사차지작」에서 “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차를 좋아했다/ 차는 군자와 같아 성품에 사특邪慝함이 없다...”라 했다. 여기 군자와 차의 성품의 무사(性無邪)함에서 무사無邪란 성품이 유가(성리학)의 최고 이념인 ‘성誠(정성스럽다)’하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 한재 이목이 『다부』에서 ‘오심지차’라는 개념으로써 ‘수양다도’를 설파한 것과 조선후기에 이처럼 다산이 「다신계절목」에서 차정신과 그것의 실천을 강조한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제다와 다도’라는 진정한 차문화의 구현이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조선시대에 차문화가 단절되었었다거나 초의가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라는 견해는 근거없는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다.

초의가 조선시대 차문화를 중흥했다는 주장은 초의차 신봉자들이 다산의 차행적을 매장시키고 초의의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해 강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중흥시켜야 할 정도로 이전의 차문화가 중단된 적이 없고 오히려 다산에 의해 전에 없이 개화되었으며, 이와 함께 고려시대의 특권지배층 중심 차문화가 조선시대에 선비 일반층으로 저변확대되었고, 다산에게서 차를 배운 초의가 그때까지 다도를 몰랐던 불가에 제다와 포다법 등 명대의 차문화를 끌어와 인식시켜 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어떤 한 쪽이 차문화의 중심이라는 말은 한국 차문화의 진면목을 왜곡시킬 수 있는 막연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억불로 불교 차문화가 쇠퇴되었다는 주장은 불교의 경제적 타격과 차문화 쇠퇴를 연계시켜 확대 부각시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차를 돈으로 계산하거나 불가에서 직접 제다를 하지 않고 차를 사서 썼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절에서 차문화의 핵심인 제다를 직접 했다면 불과 몇 천평의 차밭에 대여섯 명의 인력만 있어도 큰 절 한 해 차농사는 문제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에 억불로 차문화가 쇠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 스스로 제다 등 주요 차문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고백과 같다.

또 오늘날 한국의 전반적인 차문화 행태로써 유추해 보더라도, 도대체 예전에 어느 한 쪽이 ‘차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기나 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일찍이 초의가 다도를 모른다고 걱정했던 곳을 비롯한 이른바 차문화 명소들에 커피 자판기 들어가 있는 데가 많고, 끽다거 화두를 발한 조주스님 초상 밑에서 전통 녹차 보다는 원두 커피나 보이차 얻어 마시기가 쉽다. 특히 여연과 같은 고명한 다승이 차문화학술심포지움이라는 공식 차행사 석상에서 차를 돈과 결부시키는 발언을 하는 것과 ‘불교가 차문화 중심’이라는 주장의 맥락을 상호 연계시키기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철학박사(한국수양다도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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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민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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