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화의 본질은 차를 왜 마시며, 어떤 차가 좋은 차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차를 마시는 행위의 문화적 속성 및 차를 마시는 목적을 충족시켜주는 주체인 차의 정체성이 차문화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차를 단순히 ‘기호식품’이라고 보는 데서는 ‘차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적 용어가 통용될 수는 없다. 한국 전통 차문화를 생각할 때, 선조 차인들이 차를 마신 목적과 차의 이런 본질적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느냐를 파악하여 계승할 가치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 제다법 한국정통 제다 집대성

이런 맥락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산 정약용이 강진 다산에서 실행한 제다는 당시까지의 한국 전통 제다의 정통을 집대성하고 거기에 독창적인 제다법을 더하여 발전적 계승을 기함으로써 한국 전통 차문화의 금자탑을 이룬 ‘완성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초의차’ 옹호론자들의 다산 제다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강진 전통차 계승 작업을 하는 이들의 다산 제다에 대한 면밀한 분석 맟 이해의 부족으로 다산 제다의 내용과 가치가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 차문화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뒤쳐진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까닭도 중·일의 제다사에 없는 독창적이고 뛰어난 다산 제다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매장시키고 있는 탓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차계 한쪽에서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를 초의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그러나 관련 징후를 보면 그런 주장은 ‘초의차’ 강조로 얻는 명리적 목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초의의 차 행적에 비해 초의의 스승격인 다산의 강진 제다는 오늘에 계승되어야 할 한국 전통 차문화의 완성체이지, ‘초의차’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중흥’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산의 제다가 있기까지 『부풍향차보』의 생배법 및 『동다기(기다)』의 증배법 등 신라나 고려시대와 다른 근현대적 제다가 창의적으로 면면히 그리고 활발히 이어지고 있었기에 ‘단절된 것’을 ‘중흥’시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산 제다의 내용과 가치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증구포 단차와 삼증삼쇄 차떡 제다 

다산 정약용과 다산초당 및 강진은 한국 전통 제다와 전통 차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한국 전통 차문화사에서 ‘전통차의 성지’라고 할 만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진 유배 18년(1801년~1819년) 중 다산은 1809년부터 해배시까지 11년 동안 다산초당에 기거하며 주로 구증구포 단차(團茶)를 만들었고, 해배 이후(1819년 이후)에는 제자들로 하여금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하도록 하여 우전 잎차와 입하전 병차(이 역시 團茶로 추정됨)를 만들도록 했고, 다신계가 해이될 무렵인 1830년에는 강진 제자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내 삼증삼쇄 차떡(餠茶가 아닌 茶餠) 제다를 지시하였다. 즉 다산은 당시까지 전통 제다법으로 전해오던 초배 및 증배 제다를 집대성한 뒤에 자신의 창의성을 더해 구증구포 단차와 삼증삼쇄 차떡 제다로 한국 전통제다의 결론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산 제다와 차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산의 차 인식 및 다산이 강진에서 만든 차의 제다법과 차의 형태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강진에서 보인 다산의 차 인식은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시와 결명소에 잘 나타나 있다. 아래는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소(1)와 다산의 시 '혜장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寄贈惠藏上人乞茗)'(2)이다. 

(1)- 貽兒菴禪子乞茗疏 【乙丑冬在康津作】:을축년(1805) 겨울, 아암선자에게 보냄.

결명소(乞茗疏) : 차를 얻고자 적음

​旅人近作茶饕 나그네는 요즈음 茶 욕심쟁이라네/兼充藥餌 겸하여 약으로 흡족하기 때문이지

書中妙解 글 중에 오묘한 깨달음은/全通陸羽之三篇 육우의 다경 三편을 온전히 통달했지/病裏雄呑 뱃속의 큰 병 움켜 잡고/遂竭盧仝之七椀 끝내는 노동 칠완을 다 들이켯네/雖浸精瘠氣 비록 정기 가라앉고 기운이 없어진다는/不忘棊母㷡之言 기모경의 말을 잊지 않았으나/而消壅破癥 옹울을 해소하고 체증으로 뭉친것 지우자니/終有李贊皇之癖 끝내 이찬황의 버릇 생겼다오/洎乎朝華始起 아침 해 막 떠오르니/浮雲 皛皛乎 晴天 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구나/午睡初醒 낮잠에서 막 깨어나니/明月離離乎碧磵 밝은 달은 푸른 냇가에 흩어진다/細珠飛雪 잔 구슬 같은 찻가루는 눈발처럼 날리니/山爐飄紫箰7之香 산로에 자순차 향 나부끼누나/活火新泉 불 피워 새 샘물 끓여/野席薦白菟之味 야외에 자리깔고 백토의 맛을 올린다/花瓷紅玉 꽃 자기 홍옥의/繁華雖遜於潞公 호사스런 노국공에 못미치나/石鼎靑煙 돌솥 푸른 연기는/

澹素庶近於韓子 담백 소박하여 한자에 조금은 가까우리/蟹眼魚眼 게 눈, 물고기 눈/昔人之玩好徒深 옛 사람들 즐겨 깊이 완미했다지/龍團鳳團 용단 봉단은/內府之珍頒已罄 궁궐에서 진품 나눠줌은 이미 다했다/玆有采薪之疾 이 사람 섶나무조차 못할 질고로 인하여/聊伸乞茗之情 애오라지 茶 비는 정분을 말함이라/竊聞 저으기 들으니/苦海津梁 고해 건너 저 언덕 가는 다리는/最重檀那之施 가장 중한 재물 자비심으로 베품이라오/名山膏液 名山의 고액보다/潛輸艸瑞之魁 서초(瑞草) 중 으뜸인 차를 몰래 나르나니/宜念渴希 마땅히 갈망 희구함이니/毋慳波惠 아끼지 마시고 은혜 베푸시길 바라오

(2) - 傳聞石廩底  듣자하니 석름봉 바로 아래서

由來產佳茗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時當曬麥天  지금은 보리 말릴 계절이라

旗展亦槍挺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았겠네. 

窮居習長齋  궁한 살림 장재(長齋)함이 습관되어

羶臊志已冷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花猪與粥雞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豪侈邈難竝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秖因痃癖苦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時中酒未醒  이따금씩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庶藉己公林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少充陸羽鼎  육우(陸羽)의 차 솥을 좀 채웠으면.

 

檀施苟去疾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奚殊津筏拯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焙曬須如法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浸漬色方瀅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위의 두 시에서 다산은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다가」를 숙지하고 있어서 제다 및 차의 종류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덕리는 『동다기(기다)』에서 노동이 마신 차가 잎녹차라고 하였다. 구증구포에 대한 최초이자 다산의 직접적 언급은 〈범석호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란 다산의 시 둘째 수에 나온다.

​​보슬비가 뜨락 이끼 초록옷에 넘치길래小雨庭菭漲綠衣/느지막이 밥 하라고 여종에게 얘기했지任敎孱婢日高炊/게을러져 책을 덮고 자주 아일 부르고懶拋書冊呼兒數/병으로 의관 벗어 손님 맞이 더뎌진다病却巾衫引客遲/지나침을 덜려고 차는 구증구포 거치고洩過茶經九蒸曝/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厭煩雞畜一雄雌/시골의 잡담이야 자질구레한 것 많아田園雜話多卑瑣/당시(唐詩) 점차 물려두고 송시를 배우노라漸閣唐詩學宋詩.

​또 다산의 구증구포 제다에 대한 근거자료로는 이유원의 『임하필기』 중 「호남사종」에 나오는 ‘죽전차’라는 시(강진 보림사의 죽전차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이유원의 문집인 『가오고략』에 있는 장시 ‘죽로차’(보림사는 강진 고을에 자리잡고 있으니/.../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선생께서/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싹을 골랐다네/.../초의스님 가져와 선물로 드리니.../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 듯/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등이 있다.

위 시에서는 다산이 보림사 승려들에게 구증구포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 구증구포로 만든 차가 찻잎의 개체 형태를 유지한 채 긴압된 團茶(한 점 두 점 작설이 풀어져 보이누나)였다는 점, 그것을 초의 선사가 선물로 가져왔다는 점, 초의는 그 단차를 煎茶法으로 달여 ‘전다박사’라는 칭호를 얻은 사실, 이로 미루어 초의 역시 다산으로부터 구증구포 단차 제다를 배웠거나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삼증삼쇄 차떡 제다법은 다산이 1830년 강진 제자 이시헌에 보낸 편지에 상세히 나온다.

 

최근 강진 차인들은 강진차인연합회를 결성하여 다산의 제다와 차를 계승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들은 해마다 강진차문화학술대회와 강진야생차품평회를 열어 전통 제다와 전통 차로서 다산 제다와 다산 차의 정체성 찾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산 제다 재현 노력 가운데 남부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강진 야생 수제 정차(떡차) 브랜드 개발사업 연구용역보고서(2019~2020)」를 보면 ‘다산 정차’의 종류와 형태를 “발효 떡차”라고 했는데, 이는 일관되게 고급 녹차를 제다하고자 했던 다산 제다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

백운옥판차 다산 전통제다법과 거리 멀어

또 다산 제다의 맥을 잇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한영전통차문화원 원장 이현정은 이한영이 다산의 삼증삼쇄 차떡을 만든 이시헌의 후손으로서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다산 제다의 맥을 이었고, 그것을 이현정 자신이 오늘에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현정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전통 제다의 융복합적 연구」에서 삼증삼쇄는 구증구포의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증포를 거듭할수록 카테킨 함량이 줄어들고 테아닌 함량은 증가하는데 4회 이후에는 의미있는 변화가 없어서 3증3쇄로 줄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구증구포(九蒸九曝)와 삼증삼쇄(三蒸三曬) 제다를 해 본 결과 이현정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정밀성이 부족하다. 첫째 구중구포와 삼증삼쇄는 전혀 다른 차의 제다법이다. 구증구포는 비교적 큰 잎으로 단차를 만든 제다법이고, 삼증삼쇄는 우전 찻잎으로 연고 녹차의 일종인 차떡을 만든 제다법이다. 여기서 曝는 크고 억센 찻잎을 강한 햇볕이나 불기운에 말린 것이고, 曬는 어린 찻잎을 그늘에 말린 방법이다. 또 다산이 구증구포로 떡차를 만들었다고 추정하거나 삼증삼쇄 차병을 병차(떡차)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曝와 曬는 떡차 제다와 무관한 용어이고, 다산은 이시헌에 보낸 편지에서 삼증삼쇄 차떡 제다를 지시하면서 시종 ‘떡차’가 아닌 ‘차떡’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오늘날 초배 산차(散茶)인 백운옥판차는 여느 제다인이나 하는 보편적인 제다의 차라고 할 수 있다. 백운옥판차의 제다나 차 자체에서 차별성이나 다산 제다의 정통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의 백운옥판차 제다나 강진 일대에서 나오는 산화 떡차 제다는 증배 단차 또는 삼증삼쇄로 고급 연고녹차를 만들었던 다산 제다의 맥을 잇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서 다산이 왜 구증구포와 삼증삼쇄를 구분해서 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산은 구증구포한 이유를 “지나침을 덜기 위해서”라고 했다. 당시엔 연료와 증제솥 및 증제시간 측정 시계 등 제다 도구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시루에 넣는 찻잎의 양과 그에 따라 찻잎을 찌는 시간 조절이 그만큼 까다로워 찻잎이 너무 물러지지 않게(싱싱함을 유지하게) 하면서도 찌는 도중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잠깐씩 여러번 증기를 쐬이는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효율적으로 살청하면서 동시에 찻잎의 센 기운을 증기로 여러번 우려내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는 송대 연고차 제다에서 진액을 짜낸 것 보다는 진화된 방법으로, 차의 본성을 보존하는 정도에서 센 기운만 약간 조절함으로써 연고 녹차로서 차의 본성을 거부감 없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로서, 다산의 증배제다의 장점은 ‘초의차’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명대(明代)의 덖음제다(炒焙法)에 비해 차의 본성(茶性)의 핵심인 녹향(청엽알코올)을 적절히 보존시키는 제다법이라는 것이다. 녹향은 비등점이 섭씨 157도여서 300도 안팎으로 덖는 초배법에서는 제다공정에서 대부분 유실되지만 살청 온도가 100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증배 제다에서는 온존된다.

초의차 옹호론자들의 오류

이상과 같은 점에서 다산의 구증구포 단차 제다 및 삼증삼쇄 연고 녹차(차떡) 제다는 중국이나 오늘날 일본의 녹차 제다에서도 찾아볼 없는 과학적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조선시대 차문화 중흥”을 거론하는 이들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조선시대에 한국 전통 차문화가 민멸된 것을 초의가 중흥시켰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부풍향차보』와 『동다기(기다)』 등 제다 관련 다서(茶書)가 전례없이 활발하게 저술되었고, 위에서 본 것처럼 초의와 동시대에 다산이 다양한 전통 제다법을 집대성하고 오늘날에도 손색 없는 증배제다법을 창안하여 전통 제다의 맥을 두텁고 풍요롭게 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한국 전통 차문화가 민멸된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중흥시킬 일이 없었다. 단지 다산이 정리해 놓은 독창적인 한국 전통 제다법 및 그에 따른 전통 차문화를 계승하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박동춘씨는 ‘초의차’를 만든 덖음제다법을 강조하면서 “구증구포는 제다사에 제시된 적이 없다”고 하여 다산 제다의 의미를 부정하고 있다. 박씨를 바롯한 초의차 옹호론자들의 영향 탓인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제다는 초배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녹차가 커피와 보이차에 밀려 차 행사장에서 자취마저 찾기 어렵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 전통 녹차가 사라질 위기에 처함으로써 그에 따른 한국 전통 차문화가 실로 민멸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초의차’ 옹호론자들이 답해주기 바란다. 덖음제다로써 녹향을 날려버리고 ‘고소한 맛’을 내세우며 스스로 ‘기호식품’ 반열에 추락한 오늘의 한국 녹차와 증배제다로써 녹향을 살려내 자연합일의 기제로서 수양다도의 도반이 되어주는 다산 제다의 녹차 중 어느 것이 한국 전통 차문화를 민멸에 이르게 하는 원인자이고, 어느 것이 한국 전통 차문화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생활예절·다도학과 초빙교수.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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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민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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