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30주기 시전집 이명규 기자l승인2019.03.30l수정2019.03.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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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라는 긴 세월은 기형도라는 이름을 잊게 만들기보다는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어떤 문학, 어떤 이름들은 망각을 향해가는 시간의 힘을 거슬러가는 기이한 힘이 있다. 그 힘을 만든 것은 기형도 시 내부의 뜨거운 생명력이며, 기형도라는 이름과 함께 30년을 보냈던 익명의 독자들이다. 저 30년 동안 새로운 독자들이 나타나 기형도 시를 새로 읽었고 다시 읽었다. 기형도의 시는 잊히기는커녕 끊임없이 다시 태어났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추억에 대한 경멸」)라는 그의 문장과는 달리 기형도의 추억은 중단된 적이 없다. 30년 동안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이 계속 출현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사의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우리는 다시 기형도의 거리에 서 있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질투는 나의 힘」)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라고 탄식하던 거리, 길 위에서 문득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진눈깨비」)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고 읊조리던 바로 그 거리 말이다.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가수는 입을 다무네」)라는 문장처럼 시인은 거리에서 어떤 낯섦과 경이를 마주한다. 거리에서 그는 목표도 경계도 없는 헤맴 사이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었다. 거리는 가야 할 곳을 알려주지도 머물지도 못하게 하지만, 다른 시간을 도래하게 하는 유동성의 공간이다. 거리의 낯선 순간들에 대해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 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 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푸른 저녁」 시작(詩作) 메모)라고 쓴다. 기형도는 거리의 혼란과 현기증을 새로운 감수성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거리는 특정한 장소에 고정될 수 없게 하고 그 장소의 정체를 알 수 없게 한다는 측면에서 ‘장소 없음’의 공간이지만, 장소 없음은 역설적인 희망의 사건이었다. 거리는 현대적 불안의 공간이며, 무한한 잠재성의 시간이었다.

기형도의 거리는 시인의 사회적 경험과 미적 감각이 동시에 관여하는 현대적인 지점이다. 거리는 동시대의 사회적 감각을 일깨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에서 쓰는 자로서의 새로운 심미적 개인의 얼굴을 탄생시켰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입 속의 검은 잎』 시작(詩作) 메모)는 기형도와 그 세대의 문제적인 감수성이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같은 글)라는 고백은 그 시적 감각의 일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 문장을 변형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형도의 상상력은 고통이었으나 우리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고통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만이 아니며 권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기형도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이 우정의 지평에서 아무도 기형도를 독점할 수 없다. ‘거리’의 문맥을 지우고도 기형도를 읽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기형도의 시 앞에서 다만 그 고통을 나누어 사랑할 뿐, 기형도 시의 비밀은 세대를 이어가며 오히려 풍부해진다. 깊은 사랑의 경험은 대상의 정체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더 두텁게 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한다. 지속되는 사랑은 새로 읽기와 다시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차라리 은밀한 무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바라건대 이 시집을 통해 기형도 시의 비밀이 더 두터워지기를.” - 이광호(문학평론가), 「발문에서」 기형도지음. 문학과지성사. 값 13,000원


이명규 기자  teac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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