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창호의 앞면.
원흥창호의 앞면.

1992년 가을 아주 귀하게 만난 보이차가 있으니 원흥창元興昌이다. 복원창福元昌보다 전대前代의 차이긴 하지만 그 이후까지도 나왔으니, 정확하게는 언제인지 확정짓긴 어렵지만 당시에는 복원창 전대의 차라고 했었다. 복원창을 20통(140편) 이상 구해 마셨지만 원흥창은 1통(7편) 겨우 구했을 정도이니, 아주 소량 들어온 셈이다. 거의 다 먹고 조금 남은 것으로 시음기를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구매해서 다회를 하긴 했으나 차가 남아 있지 않아 시음기를 올릴 수 없는 차가 상당히 많다.

원흥창호에 붙어 있는 내비(內飛).
원흥창호에 붙어 있는 내비(內飛).

90년대나 2천 년대에는 시음기를 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다회에 사용해 버렸던 것이다. 50인 이상이 다회를 할 경우 보이차 1편으로 4~5회면 사라지는데, 대중다회를 매달 10회 이상 했으니 차의 소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몇 사람이 하는 다회는 거의 매일 지속되었다. 2018년 7월 25일 밤에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이미 칠일 째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은 용맹정진을 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2018년 7월 19일, 대만에서 차와 향의 대가가 방문키로 되어 있었다. 몇 팀과의 만남을 정리하고 기다리는데 비행기 연착으로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잠시 짬을 내어 법당 뒤 정원공사를 하는 곳에 사진 몇 장만 찍고 오겠다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청(淸) 도광연대의 평개자사호.
청(淸) 도광연대의 평개자사호.

이미 두 달 넘게 진행된 공사는 후반부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매일 격려하고 조언을 하면서 반은 노동자로 살고 있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전날 공사를 하면서 모래가 뿌려진 것을 모른 채 경사로를 밟았다가 뒤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하필 뒤에는 공사에 사용된 바위가 있었다. 정통으로 등이 바위와 부딪혀 30분 정도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마침 도착한 대만 손님과 일행에게는 인사만 나눈 채 팽주 자리를 내어주고, 병원에서 X-레이를 촬영했더니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돌아와 팽주로 2시간 정도 차를 마시고 손님들을 배웅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엎드릴 수도 누울 수도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1992년도부터 사용해온 원흥창 보이차통.
1992년도부터 사용해온 원흥창 보이차통.

이튿날까지는 몸이 멍한 상태에서 무언가에 부딪히기만 하면 경기 일으키듯 했다. 3~4일 째는 등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종일 지속되었다. 결국 23일 출발하기로 한 운남과 곤명의 야생차밭 답사여행도 전격 취소하고, 통증과의 기나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5~7일째는 옆구리와 가슴께로 통증이 옮겼다. 그렇게 7일간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을 하게 된 셈이었다. 어쨌거나 눕지 않고 7일 이상 버티고 있는 몸에게 좋은 차를 선물해주고 싶어 선택한 것이 원흥창이다. 원흥창을 마실 다호로는 청淸 도광道光년대에 만들어진 평개주사호平蓋朱砂壺를 선택했다. 딱 두 잔이 나오는 사랑스런 다호이다.

원흥창 보이를 매크로렌즈로 확대 촬영한 것. 이것이 건강하게 발효된 오래된 진년 보이차의 모습이다.
원흥창 보이를 매크로렌즈로 확대 촬영한 것. 이것이 건강하게 발효된 오래된 진년 보이차의 모습이다.

평소 눈요기만 하던 벽장속의 주석통을 꺼냈다. 1992년 이후 계속 사용해온 차통이었다. 당시는 고급 주석통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평범한 수준의 주석통이다. 뚜껑에는 원흥창(복원창전대)이라고 한자로 견출지에 쓴 이름이 붙어 있다. 대략 120~90년 정도 세월이 흐른 차로, 매크로렌즈로 확대 촬영한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건강하게 발효된 골동보이차이다. 통증을 피하려고만 하다보면 더욱 힘들어진다. 그 통증과 벗이 된다고 통증이 없어지진 않지만, 자신이 통증을 괴로움으로 만들진 않는다.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음반.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음반.

원흥창元興昌을 마시며 들을 음반으로는 에스토니아 태생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선택했다. 1992년 미타사 다회를 시작하면서 다회에 필요한 음반을 구하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건너편에 있던 ‘신나라레코드’에 갔을 때 만난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백지白紙’라는 뜻이 있지만, 나는 ‘생각 이전의 마음’이라고 해석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마음은 선禪에서 좋은 화두가 된다. 이 음반은 현대음악의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를 만나게 해 주었고, 이후 20여장이 넘는 그의 음반을 사게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정교의 교화 중앙 홀. 저 높은 돔에서 음악이 내려온다면 어떨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정교의 교화 중앙 홀. 저 높은 돔에서 음악이 내려온다면 어떨까.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는 독일로 망명하기 전 러시아정교를 믿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음악은 그의 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17년 6월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정교 교회를 찾았을 때 중앙 돔 아래에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쏟아져 내리는 패르트의 음악을 혼자 떠올리며 마음으로 감상한 적이 있다. 그의 음악은 마음의 동굴로부터 울려오는 영혼의 울림이다.

원흥창의 찻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위에서 차례대로 아래로 내려옴.
원흥창의 찻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위에서 차례대로 아래로 내려옴.

음악이 흐르는 동안 7g의 차로 20회를 우려 마셨는데, 대부분 100도의 물을 바로 부어 즉시 따르는 방식이었다. 뒤의 몇 잔은 예외로 오래 우렸다. 찻물은 사진에서 보이듯 처음 중간색에서 시작하여 네 번째 잔까진 아주 진했고, 다섯 번째 잔부터 점차 연해졌다. 잔의 횟수는 숫자로 표시한다.

(01)오래 삭은 짚의 냄새가 맑게 피어오름. 머금으니 잘 발효된 진년차陳年茶의 넉넉하고도 맑으며 푸근한 맛.

(02)곰삭은 삼 잎(대마 잎) 향과 짚의 향이 섞여 올라옴. 머금으니 건창乾倉 보이 특유의 맑고 미세하게 쌉싸래한 맛에 이어 단침이 솟구치고 목에서 단맛과 짙은 향이 올라옴回甘. 입안이 화해지는 느낌. 기분 좋은 트림.

(03)대마大麻와 짚과 맑은 한약의 향이 올라옴. 머금으니 쓴맛과 신맛이 조화로운 진년 보이의 맛. 침의 홍수. 강렬한 회감. 입이 화한 느낌으로 시원해짐.

(04)새콤하며 풍성한 한약재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신맛과 쓴맛 그리고 단맛에 미미한 짠맛이 섞여 있음. 가을바람이 입안에서 일어나는 느낌. 회감 극대화. 심신탈락心身脫落.

(05)몸을 깨우는 넉넉한 한약재의 향. 머금으니 오래 발효된 야생차의 깊고 맑은 맛. 삭은 짚과 부드러운 대마와 나무 한약재의 맑은 맛. 장운동 극대화. 머리는 아주 맑아지고 손발은 따뜻해짐. 등에 땀이 솟지만 덥다는 느낌보다 시원한 느낌. 임맥독맥 소통. 두 번째 차 트림.

(06)곰삭은 짚과 대마의 잎과 한약재의 향 올라옴. 머금으니 약간의 신맛과 깔끔한 쓴맛이 나는 향기로운 한약을 마시는 느낌. 눈이 아주 시원해졌고 몸 전체가 쾌적하다. 회감은 아주 좋고 혀가 사라진 느낌. 잘 발효된 타닌의 깔끔한 느낌.

(07)오랜 세월 발효된 보이차의 향. 머금으니 백년의 세월을 머금은 깊고 오묘한 맛.

(08)부드러워진 삭은 짚과 대마와 한약재의 향 피어오름. 머금으니 여전히 강렬한 야생의 기운. 기분이 좋아지는 미세한 떫은맛과 신맛. 세 번째 차 트림.

(09)다시 향이 강하게 올라옴. 더 맑아지긴 했으나 기운은 여전한 야생차의 맛. 입이 시원하고 단침 많음. 회감 좋음.

(10)향은 강하고 맛은 시원해짐. 강렬한 뒷맛.

(11)맑은 한약재의 향기. 머금으니 맑고 시원하며 넉넉한 진년 보이 야생차의 맛. 입안 매끄러움.

(12)꺾이지 않는 향. 머금으니 맑으나 강한 기운이 마치 높은 산의 정기가 느껴지는 맛. 입안은 화함.

(13)야생 고차수 진년 보이차의 맑으나 강한 향. 머금으니 맑으나 강한 기운의 깊은 맛. 부드러운 칡의 맛도 살짝 느껴짐.

(14)30초 우림. 삭은 짚과 대마와 한약재의 향. 머금으니 맑고 청량하며 곧은 대나무의 느낌이 드는 맛.

(15)맑아진 향. 머금으니 시원하고 상쾌해진 맛. 입안은 청량함.

(16)맑으나 후덕한 향. 머금으니 맑고 정갈하며 깊은 맛. 부드럽게 마시는 이들이 좋아할 맛. 부드러우며 화한 느낌.

(17)2분 우림. 향은 은근함. 머금으니 대숲 바람 같은 느낌.

(18)5분 우림. 삭은 짚의 향. 머금으니 맑은 샘물에 마른 꽃잎 띄운 맛.

(19)5분 우림. 맑아진 삭은 짚 향. 머금으니 고요하고 청량함.

(20)5분 우림. 맑아진 삭은 짚 향. 머금으니 시원하고 아련한 고향의 맛.

우린 뒤에 퇴수기 물에 잠긴 찻잎.
우린 뒤에 퇴수기 물에 잠긴 찻잎.

원흥창元興昌은 복원창福元昌 보다는 동경호同慶號에 더 가까운 향과 맛을 보여준다. 복원창이 달마대사의 칼칼한 선禪의 맛과 향이라면, 원흥창은 후덕하나 흩어지지 않는 삼매의 경지인 혜능대사 선禪의 향과 맛이라 하겠다. 다 우린 뒤 퇴수기 물에 잠긴 찻잎을 보니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싱싱하다.세월이 흐를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야생 고수차로 만든 보이차처럼, 사람도 그런 기운을 지니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울 개화사를 창건해 차와 향을 공유하고 있는 송강스님의 차에 관련된 편안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사랑하기’란 이름으로 차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송강스님의 허락을 받아 전제한다. 송강스님의 ‘사랑하기’는 현대인들에게 차 생활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제대로된 차 마시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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