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인연중 여러 가지 단상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을 꼽으라면 단연 정호다완 특별전을 다녀온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정호다완 특별전을 보고 오신 몇몇 작가분들과 통화도 하면서 오직 이 전시를 보기 위해 당일치기 일본행을 결심했었습니다.

도록속의 이도를 보고 또 보며 400년전 우리땅에 살던 누군가의 손에서 탄생했을 이 막사발이 길고 긴 세월을 지나 어떤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을지 너무나 기대가 컸었지요.

‘기자에몬 이도’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막부시대의 큰 가문들이 이 다완을 사용해왔는데 이 다완을 사용하는 사람마다 전부 종기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결국 이도는 일본 대덕사라는 절에 보관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진만 돌아다닐 뿐 그동안 실제로 이 다완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지요. 정계나 차문화계에 줄이 있거나 아주 큰돈을 기부하지 않는 이상 이 다완은 쉽게 관람조차 할 수가 없어서 ‘한번 보았다더라’하는 것만을도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 여겨졌다 할 정도입니다.

수 많은 한국작가들이 ‘정호다완’을 재현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실제로 그것을 본 작가들 또한 많이 없을 정도지요. 그런 귀중한 다완들을 심지어 70여점이나!. 단돈 만이천원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고 하니 이는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저 취미로 하는 저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이는데 사진으로만 보고 평생을 바쳐 재현해 왔던 작가들 심정이야 말로 표현해 무엇할까요. 위 사진속의 다완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런 작가들의 열정을 재현해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출발하기 전날 이 다완을 만지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보았지요. 그렇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부터 공항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눈보라와의 만남...

당일 저녁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폭설이 내린다는 뉴스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다음날 진료를 해야하는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더군요.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볼펜을 하나 사려고 기프트샵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볼펜이 5,000원이나 합니다. 무슨 볼펜이 이렇게 비싸?하고 봤더니 우리 딸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엑소 기념품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연필, 카렌더, 다이어리, 새음반, 포스트잍등, 있는대로 주워담았네요. 다 샀더니 브로마이드도 몇 개나 공짜로 줍니다. 중국인인줄 알았을겁니다. 아마도...

딸아아기 좋아할 생각만 하며 일단 사고봤는데 출발 하기도전에 짐이 산더미가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 여행내내 들고 다녀야 했지요. 공항 보관소에 맡겨놓고 갔으면 되었을 것을, 돌아와서 아내가 말해주니 그제서야 무릎을 치며 머리가 안돌아갔던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지요. 짐을 가방속에 가능한 구겨넣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어 영어는 단 한마디도 안하고 다녀왔네요. 택시운전사에게도 주소 복사한거 보여주니 바로 데려다줍니다. 택시안에서 구두가 다 떨어져가는걸 발견했습니다. 얼마전에 바닥을 붙이는 공사를 했었는데 이게 또 떨어지교 하더군요. 지금와서 어쩔 수도 없고 일단 잘 버텨주기만 바래봅니다. 그렇게 목적지인 ‘네즈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봤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어서 그냥 한번 죽 둘러보았지요. 비행기에서는 정말 떨렸는데.

보고싶은 애인을 만나서 밤새 달려왔는데 막상 봤더니 시큰둥한거 같은 기분이랄까. 히말라야를 보는 듯한 엄청난 감동이 밀려올거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정호다완’을 보고는 복잡하게 밀려오는 묘한 감정을 어찌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도 다섯시간이나 남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와서 천천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밖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전시장 외부에는 그야말로 일본스러운 아기자기한 정원이 있더군요. 동전들과 함께 연필이나 볼펜이 가득 쌓여있는걸 보면 이 석상은 아마 공부의 신 정도 되는 모양이구요. 일본어를 몰라서...

그렇게 전시장을 빠져나와 자그마한 라멘집을 찾아서 한 그릇을 비우고,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봐두었던 골동품점에 잠시 들렀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했더니만 한국 골동들도 있습니다. 같은 작품을 저는 훨씨 저렴한 값에 구입했었는데. 높은 가격표를 보고는 왠지 뿌듯한 마음에 기분이 좋아졌지요. 일본에서도 제 캔커피 사랑은 여전해서 캔 커피 한잔으로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어딘가 많이 뵈었던 분을 만났습니다.

“홍 작가님 아니세요?”

반신반의하며 인사를 건내니 진주요 홍성선 작가님이 맞더군요. 그동안은 사진으로만 뵈었던 분인데 실제로 뵈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3대째 요장을 해오며 아버님 고 홍재표 옹부터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작가이지요. 교통사고로 몸이 안좋다는 글을 보고 약도 보내드린 적이 있었고, 얼굴을 처음 뵙지만 서로 알고는 있던 사이였기에 그곳에서 우연이 만난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커피 한잔 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작가님께서는 3일이 넘도록 ‘정호다완’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명상을 하셨나?

사실 전시를 보러오기전에 여러 작가분들과 통화를 하면서 기물들의 특징과 불, 흙, 소성시간등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공부를 했었습니다. 이 작가님과도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거라 생각했는데 작가님께서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시더군요.

“여기 왜 오셨어요?”

당황했습니다. 왜 여기에 왔냐니?. 생각해보니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왜 오고 싶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었지요. 그 한마디의 질문이 제게 던져진 화두가. 자칫 실망이라는 감정만으로만 기억되었을지도 모를 이번 일본행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걸려있고 그 아래 이웃나라에서 온 72명의 선사들이 무심하게 서 있다. 나란히 줄을 서서 이국의 선사들을 알현한다. 그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저는 이후로 작가님과 함께 한 시간동안 다완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이도가 있고 그 주위를 관찰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이도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창피하기도 했지민...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400년간 이 선사들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고, 또 앞으로 1,000년 이상 보존되며 사람들에게 교감을 주겠지요. 소박하고 작은 이 기물들에서 느껴지는 포근하고 겸손하고 따뜻한 느낌이 잔인한 칼질을 하기전 사무라이들에게 묵묵한 용기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 또한 칼은 안들었지만 몇 백년이 지난 현대사회의 경쟁과 불안속에서 이 선사들을 통해 위로를 얻고 무심한 마음에 공감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러운 평화의 순간을 기물을 통해 교감받듯이..

과거 관악산에 철심을 박고 사람도 실험하는 치밀한 일본이었습니다. 그때의 작품을 이토록 오랫동안 보존하고 국보로 지정했다는 것은 다 그들만의 치밀한 분석과 이유가 있었겠지요. 어떻게든 숨기려고 절 속에 은닉해두었던 이 작품들은 왜 지금 시점에 세상에 공개하는 것일까요. 한점도 아닌 일본에 있는 모든 이도들을... 방사능의 위험속에서 모든 산업은 물론 국가와 국민 모두가 위태로운 이 시점에 이 선사들을 통해 어떤 결집과 기운을 얻고자 함은 아니었을까요. 사진만 보고 재현을 할때 작가들은 보통 힘이 있어 보이는 그 기상을 재현하려고 많이 노력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소박하고 드러냄이 없는 포근한 느낌이었지요. 눈물이 날만큼 포근했습니다. 우리 할머니처럼.. 그래서 자칫 그냥 지나치거나 실망해버릴 수도 있을만큼 평범했습니다. 하지만 그점이 오히려 더 놀라운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피를 보고 칼을 들고 긴장을 해야했던 사무라이들에게 이 평범하고 소박한 다완은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힐링이 되었을 테니까요. 이미 깊어진 마음을 떼어내기 못내 아쉬었지만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다녀와서 내가 이제껏 모아왔던게 전부 가짜였구나, 헛짓거리 했구나...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느낌이 조금 달랐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찻잔에서도 전혀 다른 모양을 가진 찻잔에서도... 우리 땅, 우리 흙, 그리고 소박함과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 조상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도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까요.

그렇기에 실제로 본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우리 흙으로 우리의 영혼을 깃들여 만드니, 우리나라 작가들의 재현품들이 비슷하게 나올 수 있었겠지요. 멀고 귀한 것만을 쫒는 것이 의미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그릇을 보더라도 이도를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언제나 현재의 모습만을 쫒아서 낡고 오래된 느낌이 나는 작품을 갖고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400년전 이도 또한 제가 가진 이 그릇과 같이 새것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대를 물려쓰고 아끼고 길들이는 과정을 통해 이렇게 낡고 깊이 있는 모습으로 변해온 것인데 그 400년의 세월을 나는 공짜로 받으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기물 또한 그저 이도의 400년 전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에서 자유러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백성들의 아무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기물이었을지도 모르고 혹자는 제기라고도 하며 누군가는 당대 최고의 고수가 한번에 말아올렸다고도 하지만, 조선땅에 있는 이 기물을, 그들의 안목으로 찾아내고 스토리도 입히고 오랜 세월 길들여오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본받을만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결국 포기했겠지요, 일본화를 온전히 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DNA가 다르기에, 그리고 지금 제 소유아래 있는 기물들이 어떻게 가치가 변해가는 가는 모두 제손에 달려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지요. 이도의 DNA가 흐르는 다완들을 길들이고 명품으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이제 저의 몫이라는 사실을요. 정호다완 특별전은 벅차고, 감사하고, 부족했던 저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시간인 만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글 자하연한의원 원장 임형택

SNS 기사보내기
자하연한의원 임형택원장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