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頤齋亂藁》2책의《부풍향차보》원전, 출처 황병관씨 소장.
<사진 1>《頤齋亂藁》2책의《부풍향차보》원전, 출처 황병관씨 소장.

부풍은 1416년(태종16) 10월에 부령현扶寧縣, 別號-扶風과 보안현(保安縣, 별호-浪州)을 합병하여 부령의 부扶와 보안의 안安을 따 扶安縣이라 고쳐 불렀다. 부풍은 현 부안의 옛 이름이다. 부풍은 고유한 지역명이고 鄕茶는 특정 지역의 향토성을 띤 차라는 뜻으로 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향차의 해석이 분분하다. 향차는 香茶와 鄕茶로 구분하여 표기할 수 있다. 香茶는 차 이외의 향이 있는 재료를 넣어 만든 차라는 의미이다. 차의 제법에서 나오는 용어다. 鄕茶는 한정된 지역의 공간성을 나타낸다. 특정 지역의 차문화를 기술한 데에서 나오는 용어 정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鄕茶는 지방이라는 內意가 담겨 있고, 특정지역의 차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譜를 빌어 이름한 이운해의 의도를 비친 大題(앞머리글)이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鄕藥의 개념으로서 쓰였다면 부풍향차는 향차의 제다법을 중심으로 쓴 의도가 엿보인다.

무장의 찻잎을 이용하였지만 부안 현감이 지시하여 만든 차다. 현감으로 부임한 이운해의 결의나 포부도 내재되어 있다. 현감으로서 권위를 웅변하고자 한 정치적 동기도 숨어 있다고 이해된다. 정조만 하더라도 <동의보감>의 체제를 보완하고 그 내용을 보강하여 스스로 <壽民妙詮>이라는 의서를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지역민을 계도하기 위한 취지를 보인 하나의 표어로써의 조치나 작용까지도 해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하겠다.

이운해는 최적의 입지를 갖춘 지역의 찻잎을 이용해 차를 만들게 된 동기와 내력, 향차의 효능과 제다한 차의 종류, 완성된 차의 주된 치료효과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다법과 음다법, 다구의 실측을 통해 당대 차문화의 편린을 살필 수 있게 하였다. 실험적 정신을 발휘하여 음다 체험을 기록함으로써 조선시대 지역 차문화를 고구하는 자료로써 가치가 있다. 부풍향차보는 이운해가 부풍 현감으로 발령을 받고 내려와 무장 선운사 인근의 차를 이용해 향약차 7종을 만들었다.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의《頤齋亂藁》2책에 그림과 함께 실려 두 쪽 분량으로 남아 있다.

<사진 2> 황윤석의 8대손 황병채 옹
<사진 2> 황윤석의 8대손 황병채 옹

그의 학문은 사후(死後) 53년인 1829년(순조 29)에 후손 수찬(秀瓚)과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에 의하여 간행된《頤齋遺藁(이재유고)》12권 7책과 이 유고가 간행된 지 114년 뒤인 1942년에 황병관(黃炳寬)씨의 부친 황서구(黃瑞九,1896~1966)와 향유(鄕儒)들에 의하여 속간된《頤齋續藁(이재속고)》14권 7책, 그리고《理藪新編(이수신편)》10책에서 그 학문적 도량을 알 수 있다. 이어 1975년에 황병관씨가 소장한 고서를 포함하여 호남 실학의 3걸로 일컬어지는 이재 황윤석, 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의 글을 한데 묶어 내기도 하였다. 황윤석은 이운해의 기록《부풍향차보》를 시골집(전북 고창)에서 일기에 필사하여 담았고 20여년 정도 후에 중요한 내용을 다시 발췌하여 덧붙였다. 그 원본을 다 필사할 수 없어 全文 해석이 아쉽다.

<사진 3>《부풍향차보》를 소장하고 있는 황병관씨
<사진 3>《부풍향차보》를 소장하고 있는 황병관씨

필자는《이재난고》를 확인하기 위하여 2017년 5월 28일 황윤석 생가(시도민속문화재 25호)가 있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353번지를 방문했다. 황윤석의 8대 후손들이 현재 마을을 지키고 살고 있다. 직계인 황병관(黃炳寬, 1944~甲申生)씨가《이재난고》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는 2015년 전주로 이사 가고,《이재난고》는 DB구축을 위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1차적으로 1권부터 30권까지 가 있는 상태였다. 황윤석의 8대 후손들과 족보(平海黃氏從仕郞公派世譜)를 살펴보았다. 황윤석은 평해 황씨 22세손 황전(黃㙻, 肅宗 甲申(1704 정월 9일)생~辛卯(1771 12월 14일) 졸)의 장남으로 英祖 己酉生 辛亥卒로 되어 있다. 슬하에 一漢, 七漢, 輔漢, 弼漢과 딸 셋을 두었다.

이재 황윤석은 興德縣 사람으로 理學, 天文學, 韻學, 文學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 通儒로서 어려서부터 博覽强記로 이름이 높았다. 당대 대 유학자였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하에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을 접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신경준(申景濬, 1712~1781)과 교류하면서 성리학과 자연과학 등을 폭넓게 섭렵하여 석실서원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1584),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존중하며 노론 낙론계 학풍을 따랐다.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을 대표한 인물이다. 이재 황윤석은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君子恥一物不知)”는 신념을 가지고 박학의 학문체계를 지향했다.

<사진 4>《부풍향차보》가 실린 《이재난고》2책.
<사진 4>《부풍향차보》가 실린 《이재난고》2책.

그 결과 문학, 경제, 經學, 禮學, 사학, 算學, 兵刑, 종교, 道學, 천문, 지리, 易象, 언어, 典籍, 예술, 의학, 陰陽, 풍수, 譜學, 物産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실사(實事)를 망라하여 쓴 일기 또는 기사체(記事體)로서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라는 표제를 달았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보다 1세대쯤 앞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학문의 영역이 광범위하고 학풍이 정치(精致)한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된다. 그의 기록벽에 의해 남겨진《이재난고》는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활용․분석되고 있다. 황윤석은《부풍향차보》를 1757년 6월 26일자 일기에 베껴 적었다.

六月二十六日, 曉前 有異夢 在京中 大闡甲科 作家書 將走一伻 而家親 亦在旅次 敎以不必汲汲馳書 是時 訪安佐卽及諸親舊 而李雲擧 亦在座矣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서울에서 갑과가 크게 열리는 꿈이었다.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장차 심부름꾼을 보내려고 하는데 가친 또한 여관에 머무르고 계시니 굳이 치서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이 때 안좌랑 및 여러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이운거 또한 좌중에 있었다.

이재 황윤석이《부풍향차보》를 필사한 때는 이운해가《부풍향차보》를 기록한 1755년으로부터 2년째이고, 이운해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1754년 10월 3일과는 3년 째 되는 시점이다. 황윤석의 나이로는 26세 때의 기록이고, 10살 때부터 기록하였다고 하니 16년째의 일상의 기록 중 필사였다.《이재난고》에 남아 있는《부풍향차보》는 다섯 개의 항목 <서문(序文)>과 <차본(茶本)>, <차명(茶名)>, <제법(製法)>, <다구(茶具)>와 1개 추기로 구성되었다. 이재 황윤석이 저자 필선 이운해의 인적에 관한 글을 붙여 적은 것이다. 이운해의 유년기와 수학했던 내력 그리고 이운해의 저서를 남겼다. 추기를 한 때는 ‘이운해 형제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슬프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윤석이《부풍향차보》를 만나게 된 이유에는 태인현감 조정과 김이신, 흥덕현감 閔鏽, 정읍현감 韓光載, 장성부사 정경순, 부안현감 李雲海가 황윤석 형제의 서울 유학을 후원하였다고 한다. 이운해의 경우 서울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무신란 때 진주우병사로 재직하다 충군죄인이 된 李時蕃의 지친으로 한직을 떠도는 처지에 있었다. 그 결과 이운해나 이중해 형제의 중개로 李家煥의 처남인 鄭喆祚를 만나 󰡔수리정온󰡕과 천문학서적인 󰡔역상고성󰡕 중 일부를 빌려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인연이 되어 일기에《부풍향차보》를 필사했을 개연성이나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글. 사진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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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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