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오룡차를 보는 듯한 죽로차. 자세히 보아야 녹색을 찾을 수 있다.
마치 오룡차를 보는 듯한 죽로차. 자세히 보아야 녹색을 찾을 수 있다.

2018년 6월 17일 밤, 순천 주암에 있는 지방문화재인 600년 고택의 대밭에서 자란 차나무 잎으로 만든 죽로차(비매품)를 시음했다. 처음 포장을 열고 만난 향은 녹차로선 더 이상 구수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풋풋함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덖고 비비는데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완급을 조정했음을 뜻한다. 맑음과 중도는 통한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 음반.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 음반.

찻잎은 대략 20~35mm로 녹차 첫물로서는 큰 편이었다. 찻잎을 얼핏 보면 마치 오룡차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 자세히 보니 녹색이 옅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40여년 사용해온 토정 홍재표 선생의 다관에 6g을 넣고 은차관의 물이 정제될 동안 여류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Maria Joao Pires, 1944년~)가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1~10번)을 오디오에 걸었다. 피레스는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이지만 쇼팽의 탐미적인 밤의 몽상과 낭만을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잘 연주해준다.

중앙이 첫잔이고 열두시 자리에서 시계방향으로 진행됨.
중앙이 첫잔이고 열두시 자리에서 시계방향으로 진행됨.

첫째 잔 - 90도로 10초 우림. 찻물은 맑은 연두색. 맑고 싱그러우며 구수한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으면서도 들척지근하고 싱그러운 맛. 입안이 맑게 개임.

둘째 잔 - 90도로 10초 우림. 찻물은 약간 짙어짐. 풋풋하고 구수한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잘 볶은 보리의 구수한 향과 싱그러운 맛. 빈 잔에서는 맑은 벌꿀의 향.

셋째 잔 - 90도로 10초 우림. 찻물은 맑은 연두색. 맑고 구수한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고 풋풋함. 찻잎을 키워 따서인지 아주 미세한 목 아림이 스침.

넷째 잔 - 95도로 10초 우림. 찻물은 맑은 연두색. 온화하게 구수한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풋풋하면서도 구수한 맛. 아주 여린 타닌의 느낌이 있음.

다섯째 잔 - 90도로 15초 우림. 찻물은 맑은 연두색. 은근한 녹차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고 온화하며 구수한 맛. 차 트림.

여섯째 잔 - 90도로 20초 우림. 찻물은 맑은 금색. 여린 녹차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여린 녹차의 맛.

일곱째 잔 -95도로 15초 우림. 찻물은 맑은 금색. 피어오르던 향은 숨었음. 머금으니 맑고 부드러운 맛. 약간의 텁텁함이 느껴짐.

여덟째 잔 - 95도로 20초 우림. 찻물은 황금색. 향은 숨었음. 머금으니 여린 차의 맛. 찻잎의 기운이 강성하지 않다고 느껴짐.

아홉째 잔 - 95도로 30초 우림. 찻물은 황금색. 맑은 날 산자락의 바람 같은 향이 느껴짐. 머금으니 맑은 석간수에 찻잎 두엇 띄운 맛. 타닌 느껴지지 않음.

열째 잔 - 95도로 1분간 우림. 찻물은 황금색. 비온 뒤의 여린 풀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은 석간수 맛. 타닌은 크게 느껴지지 않음.

다인의 저서에 <제다>에 있는 사진을 스캔한 것으로, 고택의 대밭에 있는 차나무에서 채다하는 모습.
다인의 저서에 <제다>에 있는 사진을 스캔한 것으로, 고택의 대밭에 있는 차나무에서 채다하는 모습.

처음 다인에게서 찻잎을 키워 땄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짐작했던 것이 있었다. 아마도 다인은 법제를 하면서 기대했던 만큼의 향과 맛을 지닌 차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죽로차를 마셔보니 다인의 공력은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95도의 온도에서 시간을 늘려 1분까지 우렸지만, 떫은맛도 거의 없었고 데친 느낌도 없었다. 그것은 정성과 공력이 대단했음을 뜻한다.

문제는 찻잎에 있는 것이 아닐까? 대밭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예로부터 자주 언급되는 얘기이긴 하다. 사실 어린 시절 가늘고 중간키의 대나무 밭에 있는 차나무를 보기도 했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차나무가 주인이었고 대나무는 그저 띄엄띄엄 있는 장식과 같았다.

차를 우린 뒤 퇴수기에 있는 찻잎으로 색은 짙으나 강한 기는 느껴지지 않음.
차를 우린 뒤 퇴수기에 있는 찻잎으로 색은 짙으나 강한 기는 느껴지지 않음.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자. 다인의 저서에 있는 사진에서 보이듯 왕성한 대나무 사이에 있는 차나무는 어쩌면 대나무 온실과도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햇볕도 약하고 서리와 눈으로부터도 과보호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한 바람도 피할 수 있었다.

비록 문화재인 저택에 있는 대밭이지만, 좋은 차를 얻기 위해서는 차나무 주변의 대는 잘라주어 좀 멀리서 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게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충분한 햇볕과 바람과 서리와 눈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린 뒤 퇴수기에 있는 찻잎을 보니 색은 짙으나 강한 기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에게서 독특한 향기와 깊이가 느껴지듯이, 차나무도 제 스스로 많은 고난을 이겨낸 후라야 향과 맛이 깊어지지 않을까?

<서울 개화사를 창건해 차와 향을 공유하고 있는 송강스님의 차에 관련된 편안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사랑하기’란 이름으로 차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송강스님의 허락을 받아 전제한다. 송강스님의 ‘사랑하기’는 현대인들에게 차 생활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제대로된 차 마시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편집자 주>

SNS 기사보내기
개화사 주지 송강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