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사람 갈명상의 자사호.
흙사람 갈명상의 자사호.

때로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나옵니다. 갈명상 선생이 그렇고, 그의 자사 및 도자가 그렇습니다. 선생의 명성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특별 회고전이 열리게 된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유명을 달리한 노대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대만이나 일본에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회고전이 열리게 된 것도, 뜻 깊은 일입니다. 선생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애호가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흙사람泥人이라 불렀던 갈명상 선생을, 저는 삼무대사三無大師로 부릅니다. 조상이 없고, 스승이 없고, 면류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사실 선생의 부모 역시 자사의 장인이셨고, 이싱의 명문가인 갈씨 문중은 자사호에 있어서도 뚜렷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명이인인 갈명상은 청나라를 대표하는 자사명인이셨으니,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선생은 스스로 스승이 없다고 했지만 가풍이 있고, 받은 피가 있고, 소년시절부터 보고 들은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생은 부모를 팔고, 조상을 팔고, 스승을 파는 것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고 철저히 배격하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진정한 대가는 본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참된 예술적 품격과 성취는 성씨가 아니라 땀과 열정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이 증명하셨듯이, 대가는 가르침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자신과의 싸움으로 연마된 결과입니다. 선생은 한때 장지안 선생이 ‘자사호계에 일정 직분을 만들라’, ‘고급공예공 자격이라도 취득해라’고 권면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 ‘돈 버는 직함’이 그에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작품과, 실력과, 예술적 소양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검증해낸 진정한 가치, 로마나 파리 같은 국제예술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실력을 갈구했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이 같은 노력은 이미 하나의 성취로 나타납니다.

“과거에 여러 도자기 장인들을 발굴하고 홍보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중국도자기박물관의 시순화 관장 말입니다. 시관장이, 공예미술대사 참여경력이 없는 선생을 가르켜, 무면대사無冕大師로 불렀던 것도 그와 같은 연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어찌하여 이러한 지난한 역정을 택하였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탓이겠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젊은 시절 일본인들과의 교류충격에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 중국의 전통 도자기를 일본에 전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전시에서 중국 도자기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반응이 ‘저급하고, 품격이 떨어진다’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 경험은 선생에게 굴욕감과 도전의식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도자기 흙의 배합, 수동 성형기의 개발, 유약의 배합, 유약 입힘기술의 연구, 가마제조 등에 전력질주하게 됩니다. 선생 자신의 표현대로 침식마저 잊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새천년의 출발을 장쑤성의 인민병원 입원실에서 맞이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선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미 열정과 의지의 방어막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수술한 몸을 추스려 다시 작업실에서 고독한 밤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병실에서 선생은 하나의 도리를 깨달았는데, ‘인간은 언젠가 신을 만나러 간다는 것’,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다는 것’, ‘유일하게 남는 것은 인생의 족적과 사회에의 공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고, 무엇을 남기셨을까요? 그 자신은 스스로를 ‘업계의 모든 역사에 대한, 반항적 태도’로 묘사한 일이 있습니다. 과거의 작품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고,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소위 창작과 혁신입니다. 이것은 뚜렷한 생각과, 우아한 예술성, 적절한 공예성의 결정체를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내포된 정신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즐거움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의 경우, 90년대 초부터 시도한 자사와 서화와의 결합이, 그 결과물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깊은 의미를 지닌 서화를, 그 의미 그대로 조각으로 재현하여, 자사와 일체화함으로써, 공예품을 예술품으로 승화시켰고 진정한 걸작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오관남, 진전석 등 당대 서화 명인들과의 공동작업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예술을 결합하여 자사호에 있어서의 일대 진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집요한 도예 모험을, 혹자는 ‘현대관요’라고 표현합니다. 각 시대마다 관요가 도자 문화의 정수를 이루었는데, 더 이상 관요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의 풍토에서도 선생의 작품만은 가히 관요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업계의 평가입니다. 흔히 도자기 예술은 흙의 예술, 유釉의 예술, 불의 예술 등 세 개의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선생의 작품들은 이 세 가지 방면에서 여타 작가들과는 결을 달리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불과 유釉를 다루는 측면이 그렇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선생의 성취가 부의 축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 역시 선생의 선택이기는 합니다. 선생은 ‘물질은 그저 생계를 이을 정도면 된다’며 ‘정신적 만족감’을 줄곧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전문가와 예술가로부터 격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결벽은 작품의 가격에 무신경 했습니다. 아니 자사호 가격이 고가화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평가절하하고, 의도적으로 조절하기조차 했습니다. 속된 행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93년부터 선생의 작품이 여러 비양심 세력들에 의해 모방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료에 대해, 형태에 대해 표면적 유사성을 지닌 모방품들을 감별하려면 니료와 공법을 잘 알고 분별해 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선생의 애정 어린 작품을 친히 보고 감정함으로써, 애호가 제위의 안목에 일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열고, 작품도록을 내는데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당연히 갈명상 선생과 그의 작품들입니다. 선생의 작품들은, 끝없이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선생의 말씀처럼 형태는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작품정신은 결코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십 여 년 전 처음 선생을 뵈었을 때 친히 건네어주신 석표호에 차를 우릴 때면, 마주 앉아 같이 이싱의 홍차를 나누는 느낌입니다. 정표로 받은 요변의 자사를 꺼내어 볼 때도, 선생의 강렬한 눈빛이 느껴집니다. 외길만을 고집하던 외곬수, 그 고독자의 뒷모습이 그립습니다.

  글 차우림 차문화박물관 관장 이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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