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의 아침-1' 16.0x16.0x9.1cm. 樂邱茶碗 2016. 해동海棟 양동엽楊東燁作.세상의 온갖 먼지가 오고 가더니 깊은 산골짜기 차싹들이 솟기 시작한다. 개울물을 흐르고 벚꽃이 피어난다. 차농들의 손길이 바쁘다. 솥을 닦고 차밭에 넝쿨을 걷고, 봄이다 이제 햇차의 계절이다. 심산유곡深山幽谷 비슬산의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이 작품은 비슬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기물의 형태와 표면에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의 균형이 잘 어울리며 여기에 말차 한잔을 한다면 비슬산의 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더없는 멋진 작품이다.
'비슬산의 아침-1' 16.0x16.0x9.1cm. 樂邱茶碗 2016. 해동海棟 양동엽楊東燁作.세상의 온갖 먼지가 오고 가더니 깊은 산골짜기 차싹들이 솟기 시작한다. 개울물을 흐르고 벚꽃이 피어난다. 차농들의 손길이 바쁘다. 솥을 닦고 차밭에 넝쿨을 걷고, 봄이다 이제 햇차의 계절이다. 심산유곡深山幽谷 비슬산의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이 작품은 비슬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기물의 형태와 표면에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의 균형이 잘 어울리며 여기에 말차 한잔을 한다면 비슬산의 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더없는 멋진 작품이다.

다도도 기技와 예藝와 도道를 그렇게 수없이 많이 연마하고 수련해야 한다. 선인들은 ‘차생활을 하려면 기술 10년, 예술 10년, 도 수련 10년 합해 30년은 닦아야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차 한 잔 마시는 거야 아주 간단하다. 물을 끓여 차관에 달여 마시면 된다. 그런데 차 마심이 예사로 거듭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불완전 속에서 차의 깊은 뜻과 지극히 그윽하고 오묘한 경지를 만나 깨닫게 된다. 그간 많은 차 마심과 다른 사람들의 차생활을 보면서 수련을 쌓는다. 이런 과정에서 분별심을 나타내는 따짐의 상태나 지각의 사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도는 말이나 글로 표현해서 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필자는 다도교실에서 “찻잔을 들고 마시는 일을 적어도 3천 번은 해봐야 제대로 된다”고 가르친다. 한 순간에 최고의 만남을 이루는 작업은 한 잔, 또 한 잔이 쌓이고 쌓여 크고 높은 수련의 탑을 세워야만 차의 아름다움이 영글어진다. 정성스럽고 열심히 차를 마셔야만 다도를 체득할 수 있다. 한 잔의 차 마시는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때 바깥세상인 우주 만물과 관계 설정이 원활히 이뤄진다. 한 잔의 차에 감사하고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주 만물의 그 어느 대상도 감사하고 사랑하게 된다.

찻잔을 잡을 때 두 손으로 다소곳이 포근하게 안아보라고 한다. 찻잔을 만날 때는 마치 사랑하는 임을 맞이하듯이 다정하게 하고, 찻잔을 놓을 때는 임과 이별하듯이 작별의 정을 아쉬워하듯이 여운을 남기라고 한다. 찻잔을 들 때는 가볍게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향해 들어라고 한다. 찻잔을 놓을 때는 바닥에 닿는 충격이 적도록 2단계법을 써서 천천히 부드럽게 조용히 놓으라고 가르친다. 잘못 받아들이면 ‘구질구질한 기교 연습 이라니’ 할지도 모른다. ‘차 한잔 마시는데 왜 까다롭고 복잡하냐’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성취하려면 숙련은 필요불가결하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을 아무렇게나 키운다는 자책의 소리가 높다. 대부분 아이들이 그릇이나 물건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들고 놓는다. 커피나 물 따위를 예사로 흘리고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그릇을 부딪치고 깨고 야단들이다. 문을 열고 닫을 때도 쾅쾅거리며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동차를 타고 내릴 때도, 길 건널목을 걸을 때도 주위를 살피지 않는다. 잘 간수해야 할 물건을 정리정돈은 뒷전이고 아무렇게나 취급한다. 사물을 적재적소에 처리하고 잘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 같은 지적들은 물론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대체로 그런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 표명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원만하고 완전하게 한다면 일상의 모든 행동도 원만하고 완전하게 처리, 대처하게 된다. ‘불완전을 사랑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물 속에 머물러 있자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사물에 자비로운 마음과 친근감을 쏟아부어 불완전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즉,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빚는 불안과 공포, 증오심을 떨쳐버리고 완전에의 도달을 쉽고 편하게 이뤄야 한다. 불완전을 싫어하고 미워한 나머지 피하거나 도망쳐서는 안 된다. 좀 더 가까이 사랑으로 접근하여 시공을 함께 하면서 갈고 닦는 수련과 수행을 쌓아가야 한다. 불완전은 완전에 이르는 길목이며 과정이다. 불완전이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참으로 싫어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은 불완전조차 알지(깨닫지) 못하는 무명無明덩어리다.

다도는 차 마심과 차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올바른 모습으로 행차와 다회를 줄곧 연습하고 연마하여 수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연습하고 또 되풀이하는 동안 마음을 갈고 닦아가는 것이다. 행차를 하면서 자세와 손 움직임, 걸음걸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모습 따위를 바로하고 유연해지게끔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어깨와 허리, 손끝과 발, 눈 등도 앞과 같이 훈련함으로써 새로운 인간미를 창출하게 된다.

불완전을 사랑하는 수행의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마음은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인 ‘청정한 마음’이 됐을 때 세상만사는 고요해지고 안정을 가져온다. 나아가 육체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잘 연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때를 벗기고 탐욕과 어리석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청정심 수련’이 중요하다.

차를 배우고 연습을 반복하는 것은 끝이 없다. 10단계를 다 지났다 해도 거기서 전 과정을 마친 게 아니다. ‘이만하면 다 됐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진보가 중단되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차를 탐구하고 수련에 수련을 더 해야 한다. 차인의 아름다운 동작은 계속된 훈련과 수련의 결과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마음 씀씀이를 아름답게 해야 차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다도는 종착점이 없다.

평생 수행을 이어가는 고행이다. 불완전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완성’을 이루는 가장 쉽고 편한 지름길이다. 파형을 아름답게 보고 기수를 즐겨라. 우주 만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대아大我와 무아無我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며 자기완성의 도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본성을 깨달은 후 죽을때 까지 계속 닦는 것을 보호임지保護任持, 줄여서 보임 또는 보림이라고 한다. 즉, 깨달은 본성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니 견성見性한 뒤에 반드시 보림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고려 중기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얼음이 곧 물인 줄 아는 것이 견성이고 그 견성을 토대로 해 얼음을 녹이는 것이 보임이다. 보임이 물을 자재롭게 이용해 식수로 쓰고 빨래도하고 논물을 댈 수도 있게 된다고 했다. 깨달음에 빠져 자칫 헛된 길로 빠지기 쉬운 수행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보림은 필요하다. 그 까닭은 견성하였지만 아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섞음의 티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대한 스승의 인도로 이 같은 티끌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보림공부를 한다. 보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중생교화의 길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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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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