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를 찾으라는 문자를 본 순간,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여자분인 줄 알았으면 아마 안갔을거예요. 그 분도 한국에서 일본까지 훌쩍 날라온 인스타 친구가 누군지, 불안하셨던 걸까요. 남자 친구분을 함께 모시고 오셨더군요. 그 덕에 저도 덩달아 안심했습니다.

당황스러움을 미처 수습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께 물려받았다는 그녀의 150년된 집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골동품이나 찻잔을 수집하고 판매를 하기도 한다는 그녀의 집 2층에는 작은 차실이 있는데 저를 초대하기 위해 준비를 해두셨다고 하더군요. 많은 다실에 가보았지만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어요. 낡고 오래된 진열장 위에 드문 드문 올려진 기물들이 왜 이리도 멋스러운지...정신없이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남자 친구분 께서 차 한잔을 내주셨지요.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잔, 처음 본 이와의 낯설고 조금은 어색한 기운도 이내 스스륵 녹아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배운 것을 써먹을 기회가 주어졌는데 놓칠 수 없죠. 저도 정성껏 배운대로 한잔을 타드렸습니다. 이렇게 배운걸 써먹는 날이 오긴 오는군요. 속으로 혼자 엄청 뿌듯했습니다. 언제나 즐거운 기물 구경시간. 시작 머리에 말씀드렸듯 이 단지가 시작이었어요.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작았는데, 역시나 예뻐서 마음에 쏙 들더군요.

한국에서 사온 찻잔과 노트를 선물로 드렸더니 저에게도 선물을 하나 내어주십니다. 집에서 나와 동네에 있는 도자기샵을 함께 구경했는데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도 몇 개 사고 사진도 찍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묵는 료칸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해주신다고 해서 가이세키 요리를 두시간 가까이에 걸쳐 담소와 함께 천천히 즐겼어요. 언어의 장벽이 무색할만큼 편안하게 해주시는 덕분에 아주 맛있었고 황송한 저녁식사였습니다. 너무 훌륭한 식사였고 너무 예쁜 음식들이라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드리고 싶지만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쳤는데 한쪽에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꺼내시는 남자분, 알고보니 저를 위한 작은 차회를 마련해주시려고 또 이렇게나 준비를 해오신 거였어요. 감동이었습니다. 조용히 불을 끄고 어둠이 내려앉은 작은 방안에 흔들리는 촛불로 빛을 밝히고 차분히 앉아 즐기는 야간 차회는 또 평생에 잊지못할 경험이 되었습니다. 큰 그릇에 진하게 타 주신 농차와 입끝을 개운하게 하는 박차까지. 스시의 대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오마카세의 코스처럼. 한치 나무랄데 없는 아름답고 훌륭한 차회를 대접을 받았습니다. 어떤 말로도 감사인사를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은 귀한 선물이었어요.

친구들을 보내고 온천을 하루의 일을 곱씹어 봅니다. 만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한달 정도 여행을 한 것 처럼 많은 일을 겪은 기분이 들었어요. 노곤한 몸으로 푹신한 요 위에 몸을 뉘어보았으나, 평소 같으면 금방 잠들었을 정도로 피곤했는데도 쉬이 잠지 오지 않더군요. 한 시간이 지나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차만 10잔도 넘게 마셨으니까요.

다음날 아침 밤새 머릿속을 맴돌던 깨진 찻잔이 있어 아침 7시부터 친구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오기전에 마음에 두고 온 것이 몇 개 있었는데요. 막상 와서 보니 어뚱한 것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죠. 이 잔은 <카라츠>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조상들이 일본에 가서 만든 잔이에요. 그래서 그럴까요. 왠지 꼭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할 시간. 남은 시간 한톨이 아쉬워 동네 한바퀴를 다시한번 돌았습니다. 반려견 한 마리와 함께 아침 산책 나온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구요. 문열기전의 상점들, 절도 있고, 나무도 있고, 종도 있고, 묘지도 있고. 개인적으로 일본은 새벽이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라시키는 더더욱. 료칸에서 주는 깔끔한 아침으로 속을 채우고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지금 제 책상에는 구라시키에서 데려온 찻잔이 있습니다. 꿈같기도 한 짧은 여행이 절대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처음 들어보는 일본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인터넷을 통해 외국 친구를 사귀고 또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고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고도 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늘. 전생에 어떤식으로든 깊은 인연이 있었던 분들일테지요. 그래서 그렇게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뜻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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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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