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중이던 선승이 움막을 박차고 나와 몇 구절의 시를 휘갈긴다. 시를 본 스승이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깨달았구나.’ 시를 통해 스승은 제자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아본다. 범인의 눈으로는 암만 보아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소통방식이고 통과의례다. 이때 지어진 시를 오도송이라 한다. 열반송도 있다. 덕이 높은 승려가 삶의 끄트머리에서 육신을 벗으며 남기는 마지막 가르침과 생을 벗어나는 소회를 시로 남긴 것이다. 오도송과 열반송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을 노래한 게송 등을 일컬어 선시(禪詩)라고 부른다. 선시는 사전에 등재된 정식 단어는 아니지만 불교문학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승들이 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뜻을 펼친 까닭은 무엇일까? 일상의 말이나 설명으로는 자신의 깨우침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이지만 언어가 아닌, 혹은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진리의 영원성을 순간으로 압축했다. 어디로 향하느냐는 물음에 하늘 언저리를 가리키고는 홱 돌아서는 뒷모습, 물 위에 뜬 달, 소나무 우거진 숲으로 스며드는 안개, 평상에서 졸고 있는 노승 등 찰나의 풍경 속에서 섬광처럼 찾아든 깨우침의 순간을 그대로 포착했기에 선시는 회화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선시의 속뜻이 깊고 오묘하면서도 일반 대중의 마음을 끄는 이유 역시 한 폭의 수묵화나 민화를 대하는 듯한 친숙함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작자미상의 선시가 15편 실려 있다. 선시는 일반 문학과 달리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비율이 꽤 높은 편이다. 이 작자미상의 선시들을 읽을 때의 울림이 남다른데, 바람을 종이 삼아 시 한 수 던져놓고는 훌쩍 떠나버린 사람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시들은 구름인 양 물결인 양 세상을 떠돌다가 후학들의 깨우침과 조응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하고, 일상과 현실에 젖은 중생들에게 마음의 휴식과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지은이가 따로 없기에 마음껏 가질 수 있고, 또 나누어줄 수도 있다.

예전에는 시인(詩人)이란 직종이 따로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읊고 지었다. 제대로 된 선비(그 시절의 지식인)라면 시(詩), 서(書), 화(畵)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보편적인 교양이었다._ 법정의 산문 「하늘과 바람과 달을」에서

법정 스님은 여러 편의 에세이를 통해 시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법정 스님이 시를 사랑했던 이유는 시가 지니고 있는 미학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소박하고 절제된 삶의 풍경과 사유의 깊이 때문이었다. 평생 무소유와 절제를 생활화했던 법정 스님에게 선시 속의 세계는 자신이 누리고자 했던 이상향이자 도달하고자 한 지향점이었다. 이른 새벽과 늦은 밤 선시를 읊으며, 법정 스님은 그 풍경 속을 거닐고 시를 지은 고승, 시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가 깊은 산 속의 외딴 오두막으로 돌아오고는 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은 시 한 줄 읊고 먼 하늘의 달에게 눈길을 던질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보다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 책의 선시들을 통해 팍팍하게 메말라버린 우리의 마음을 잠시나마 축축하게 적셔보기를 바란다.

도서출판 책읽는 섬, 값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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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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