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회화 작품, 조각상, 문학 작품의 초고나 퇴고 원고, 인형들, 보통 사람들이 서로 나눈 사랑과 이별의 증표, 예술가나 민족 그리고 자연에 관한 물건 등이 모여 있는 공간을 전면에 내세운다. 물리적으로 크지도 않고, 작품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다. 각기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과거를 만나고, 현재를 깊이 생각하며, 미래를 열어갈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같은 공간 즉,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24명의 저자들은 각기 다른 박물관을 찾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현재를 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련의 같은 과정을 거친다. 과거, 현재, 미래. 뭔가 거창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이 모든 시간은 개인의 일상 속에서 반짝거리는 순간들임을, 박물관을 통해 그 순간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어린 시절 내게 박물관은 사실상 고문 장소였다. 양쪽 모두에게 그랬다. 부모님은 박물관에 데려가는 것으로 나를 고문했고, 나는 확고하고 고집스럽게 지루해하는 것으로 부모님을 고문했다. (19 고난이 환희로, 241쪽)

대학 시절에 그(실레)의 그림이 들어간 엽서와 작은 모노그래프 한 권을 구입한 것이 기억난다. 나는 실레의 스타일에, 그 울퉁불퉁하고 사실적인 길쭉한 데포르메에, 그 독특한 왜곡에 완전히 빠져들어 2년 동안 그처럼 그리려고 무진 애를 썼고, 당연히 실패했다. (22 루돌프 레오폴드에게 경의를, 276쪽) 박물관에서 마주한 자신의 과거가 유쾌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때가 있었기에 특정 작품이나 물건이, 해당 박물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것을 지금 알기까지, 그 시간 속에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왜 변했는지에 관한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가 보고 느낀 것이 곧 자기 자신. 그 과정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기준이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오롯이 자신으로서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그 앨범은 첫 번째 결혼은 비참했으나 재혼으로 행복을 찾은 여자가 기증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점점 기운이 났다. 이 물건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중간 과정이 아무리 오래 이어지고 고통스럽더라도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과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20 이별 박물관, 258쪽)

이는 내게 원고의 힘을 알게 해준 최초의 중요한 수업이었다. … 의미 있는 것이란, 원고를 보면 연대와 시기와 창작 속도, 그리고 두 번째든 열 번째든 작가가 어떻게 재고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마술적인 것이란, 백지에 작가의 손이 닿았고, 그 위에 작가의 숨결이 퍼졌고, 그렇게 해서 무(無)에서 불멸의 어떤 것을 탄생시켰구나 하는 생각을 말한다. (21 조용한 극장, 265쪽)

이 책은 [이코노미스트]의 자매지인 [인텔리전트 라이프]에 ‘박물관의 저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던 원고들을 모은 것이다. 예술 작품을 보거나 박물관 안팎을 거닐 때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할지 몰라 서성거렸던 사람, 영감(靈感)을 받는 방법, 그렇게 받은 영감으로 다시 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었던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은 ‘은밀한 과외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다. 맨부커 상ㆍ부커 상ㆍT. S. 엘리엇 상ㆍ마일스 프랭클린 상 등 세계 문학상 수상자들이 써서 ‘읽는 맛이 있다’라는 사실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도서출판 예경. 값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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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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