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살청을 준비하고 있는 박동춘 소장.
제자들과 살청을 준비하고 있는 박동춘 소장.

본고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을 싣는다. 정서경 박사는 올해 동춘차 제다 현장을 방문 초의 범해 원응 응송으로 이어지고 있는 생생한 제다법의 현장을 담고 있다.<편집자주>

초의-범해-원응-응송-동춘으로 이어지는 제다법 공개

‘동춘차’ 제다꾼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朴東春, 1953~ 65세, 용띠)은 올해도 여지없이 4월 막바지 주말에 순천 주암住岩面 차밭으로 내려왔다. 주암 차밭은 주암댐 전망대 옆을 지나 옛 지명 대광리 용문마을에 다다라야 아스라이 차밭이 펼쳐진다. 석곡에서부터 구봉리 유정리 봉전리, 대곡리, 대구리, 백록리, 궁각리, 신기리(새 터), 고산리, 죽림리를 지나면 주암면 소재지다. 광천리 또는 광천이라 부른다. 주암면소재지에서 약 7~8㎞쯤의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덕흥마을을 지나면 용문다리가 나온다. 차량운행은 여기까지다. 주암호 상류는 신록이 푸르러 창밖은 온통 생태청정지역이다. 나무들은 아치를 놓아 하늘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봄과 초여름 사이의 신록은 옆구리에 끼고 도는 주암호의 민낯을 훔치게 한다. 산길을 굽이굽이 외길을 타고 올라가자 모든 소식통은‘먹통’이 된다. 그마저도 휘게를 원하는 이에게는 선물처럼 느껴지는 곳에 아득히 기와지붕 하나가 보이고 초록 짙은 차밭이 펼쳐진다.

박동춘 소장의 동춘차가 생산되고 있는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일대.
박동춘 소장의 동춘차가 생산되고 있는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일대.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차밭

주암면 대광리大光里는 다섯 개 마을이 합쳐진 이름이다. 용문(龍文, 웃대광), 덕흥(德興, 가운데대광), 신기(新基 아래대광), 모전(茅田, ‘뗏등’, 떼앗등’ 1980년대에 뗏등에 댐을 막는다고 댐등이라고도 한다.), 두지(斗旨, '두지’는 우리말 이름이고 두지(斗冒)는 소리 옮김한 한자일 뿐이다.)등이다. 현재는 통상 덕흥과 신기를 합쳐서 아래대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마을들은 주암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었다. 차밭 가는 길 몇 채 남은 가옥들은 그야말로 마을 변방에 있던 가장자리 가구였던 셈이다. 용문마을에는 두 채가 남아 있다. 이건총(李建總, 1937~ 81세, 丁丑生) 할아버지 댁과 이건국(李建國, 1960~ 58세, 庚子生)씨 댁이다. 할아버지와 건국씨는 6촌간이다. 할아버지는 건국씨 어머니와 동갑이고, 할아버지 아들이 건국씨와 동갑이다. 건국씨에게는 이건총 할아버지가 이러한 내력을 가진 집안 형님뻘이 되겠다. 이건총 할아버지는 주암호가 건설되면서 이주 마을인 구산리로 생활터전을 옮기고, 할아버지가 살던 가옥을 선산관리용으로 두었는데, 박소장(박동춘)이 제다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차밭 아래 한 채 남은 기와집이 제다공간인데, 옛 대광사大光寺 터다. 폐사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말쯤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대광리란 이름이 쓰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전라도 順天都護府 불우조에 김극기(金克己)는 자신의 시(詩)에 대광사를 이렇게 읊었다.

‘대광사는 모후산에 있다.-大光寺 在母後山’

붉은 햇빛 고개로 나오자 숲 속 안개 걷혔는데 紅暾出嶺卷林霏

발길 따라 그윽한 곳 찾으니 앉은 채 세상을 잊었네. 信步尋幽坐息機

어지러운 돌 천 덩어리는 구름물결에 솟았고 亂石千株雲浪湧

흐르는 물 한줄기에 옥무지개 날아오르네. 懸流一帶玉虹飛

숲 사이 비 지나가니 꽃은 머리 무거워 처지고 林間雨過花頭重

시내 밑에 바람 돌아오니 버들은 힘없이 바람 따라 흔들린다. 澗底風迴柳力微

스스로 우습다. 내 속된 발길 깨끗한 이곳을 더럽히니 自笑凡蹤塵淨境

일천 바위 일 만 구렁(개울) 반드시 서로 기롱(譏弄)하고 있으리. 千巖萬壑定相譏

동문선 제13권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오정석吳廷碩이 쓴‘대광사 당두(堂頭 住持의 雅稱)에게 주다(贈大光寺堂頭)’라는 시도 남아 있다. 당두는 주지를 말하는 것이니 이 시를 지어 대광사 주지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비탈을 따라 시내를 건너 구름 속에 들어오니 沿崖踏澗入雲霏

깊숙하고 헌칠한 골 안이 세상 티끌 끊겼네 洞裏寬深絶世機

사면의 이끼 돋은 바위들은 푸른 가리개 두른 듯 四面苔巖靑障合

한 줄기 폭포는 흰 용이 나는 듯 一條溪溜白龍飛

아득한 피리소리 맑은 바람 멀고 笙簫縹緲淸風遠

뽀얀 안개 속에 달빛이 희미해라 煙月空濛晩色微

온종일 진세 밖에 소요하노니 盡日逍遙塵垢外

참언과 비방을 일찍 벗어난 것 기뻐라 喜吾早得脫讒譏

옛 대광사터로 추정되는 한옥에서 동춘차가 만들어지고 있다.
옛 대광사터로 추정되는 한옥에서 동춘차가 만들어지고 있다.

위의 두 시가 말해 주듯 그야말로 청정오지요, 인간의 소리마저 소음으로 들리는 곳이다. 구절구절이 필자가 느낀 그대로다. 명인이 찾아와 시를 지을 만큼 불력佛力이 컸던 절이련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불흔은 지워지고 여염집이 들어서서 다만 어디가 법당 터고 어디가 무슨 당우 터라고 전해올 뿐이다. 1710년경에 약초를 캐던 함평 이씨가 정착하고 1835년경에 여산 송씨가 입주하였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한다. 이 무렵이 대광사가 폐사되는 때일 것이다. 차밭은 서쪽에 밤실산(598m), 서남쪽에 모후산(918m), 동남쪽에 조계산(884m)과 오성산(608m), 동쪽에 유치산(530m), 북쪽에 한동산(648m)등 풍부한 자연 소재 안에 안착해 있다. 전원 관광단지로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이 잘 갖추어진 발전 잠재력이 무궁한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곳만큼은 발전이나 개발이 모른 척해주는 지혜가 필요한 곳이다.

순천시 주암면 덕흥마을 차밭

순천시의 지도를 펼치면 소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소의 형국이라고 할 때 주암면 운룡리와 황전면 비촌리는 소의 두 뿔과 흡사하다. 더불어 해룡면 농주, 선학리, 별량면 학산리는 소의 주둥이(口)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주암면은 소의 한쪽 뿔에 자리한 것이다. 호랑이가 많아 왕래하기가 어려웠단다. 그래서 다래 넝쿨에 종을 달아 놓아 찾아오는 사람이 흔들면 대여섯 명의 스님들이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호랑이를 쫓아 버리려 나무를 베고 불을 놓았고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는데, 그 많은 호랑이가 빈대로 둔갑해 스님을 괴롭혀 폐사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 있다. 지금도 돌을 떠들어 보면 빈대 껍데기가 수북이 남아 있다. 적멸골, 전멸골, 배추밭골이 당시의 지명이었다. 공민왕이 피병했는데 적들이 와서 그것을 먹고 전멸했다는 것이다. 1914년에 용문龍文으로 고쳤다, 지금은 용문龍門이라 쓴다. 용은 산줄기이다. 모후산상봉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산으로 드는 문門에 해당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또 하나의 차밭이 있는 덕흥德興마을은 주암댐에 수몰되어 이제는 마을 터도 볼 수 없다 1580년경에 화전火田을 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함평 이씨가 설촌 하였다고 전한다. 옛날 이름은 아래대광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그렇게 부른다. 대광사 사하촌寺下村이다. 강물이 동출서류東出西流하므로 피난지라고 여겨 함평 이씨가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마을에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것은‘염천박골’의 바위가 불꽃처럼 솟아 마을을 비추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바위를 깨러 석수와 주민들이 올라갔다가 소낙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쳐서 그냥 내려왔다. 이튿날 다시 올라가니 크고 작은 뱀들이 온 산에 깔려 있어 돌을 깨는 일을 포기하였는데 한 노인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고 하면서 나무를 심어 바위를 가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림들이 나무를 심었다. 그 뒤로 화재가 나지 않았다. 덕흥은 화재를 이겨내고 흥성하라는 뜻으로 개명한 이름이다.

현재 법정리는 20개로서 행정, 갈마, 주암, 오산, 창촌, 복다, 문길, 요곡, 구산, 죽림, 고산, 대광, 광천, 비룡, 운룡, 한곡, 어왕, 백록, 대구, 궁각이다. 행정리는 35개, 자연마을 64개에 이른다. 지난 1983년 3월에 착공하여 1992년 12월에 준공을 본 주암본댐이 대광리에 있어 전남 동부지역 뿐만아니라 광주권까지 생활용수를 공급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환경을 청정하게 관리할 수밖에 없는 요지(奧地)에 차밭이 위치한다.

청정지역 죽로차밭에서 찻잎을 채취하고 있는 동네할머니들.
청정지역 죽로차밭에서 찻잎을 채취하고 있는 동네할머니들.

형태는 작설차,생태는 죽로차, 제다는 덖음차

‘동춘차’의 차밭은 네 곳으로 분산되어 있는데 첫 번째 좋은 향과 신선한 맛을 내는 첫물차는 용소에서 딴다. 모후산사 용소바위 언덕 광천리 비끼미 강변이과 닿는 곳이다. 그리고 마을이름을 딴 대광리의 웃대광, 아래대광, 그리고 소정골 차밭이다. 차밭은 제다 공간이 되는 대광사터 기와집 한 채 뒤편 울을 따라 산등성이까지 비탈진 야생이다. 군데군데 대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차나무는 대나무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서 형태로는 작설차, 생태로는 죽로차, 제다 방식으로는 덖음차다. 이 대나무들이 차밭의 그늘을 만들어 그야말로 반양반음의 차밭 조성의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게다가 제다에 쓰이는 대솔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고, 땔감으로도 쓰이니 천혜의 차밭을 소장한 셈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지역, 순천시 주암면 일대는 녹차 재배에 '최적'이라고 한국농어민신문은 발표했다. 주암댐 영향으로 낮은 온도와 높은 습도로 인해 안개피해가 심한 순천시주암면 일대가 녹차재배 최적지로 조사돼 농업인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전남도농촌진흥원 보성차 시험장에 따르면 주암댐 건설 이후 주암면 일대의 연평균 기온이 12.4도, 습도 75%, 안개 4백64.1시간으로 이는 최상급 녹차재배 적정기온인 연평균 13도, 습도 78%와 비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용문마을의 대광사터 3천여평은 최근 수백 년 된 녹차 자생지라고 보도했다. 녹차재배에 따른 소득은 3백평을 기준으로 녹차잎을 가공해 판매할 경우 쌀보다 50배나 많은 1천만 원에 육박해 대체작목으로 주목 받고 있다고 밝혔다.

차를 만드는 철은 그리 길지 않아 바짝 보름 정도를 이곳 주암 차밭에서 보낸다. 올해는 퐁당퐁당 연휴도 끼어 있어 차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성균관대 겸임, 동국대와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차문화를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녹록한 사정은 아니지만 늘 차밭은 관리에서 제다까지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핵심 공간이다. 찻잎을 따는 시기는 닷새 간격으로 채다하고 제다한다. 그래서 보름 정도의 기간에 세물차까지를 맥심엄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올해의 경우는 4월 29일에서 말일, 5월 초하루에 첫물차 채취를 하였다. 두물차는 5월 7일과 8일 양일간 진행되었다. 중간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올해 ‘동춘차’제다는 이렇게 두물차로 끝났다.

오랜 세월동안 동춘차 채다와 유념을 맡고 있는 동네할머니들이 찻잎을 채취한 후 제다장으로 내려오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동춘차 채다와 유념을 맡고 있는 동네할머니들이 찻잎을 채취한 후 제다장으로 내려오고 있다.

주암 차밭은 제다 날이 정해지면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이다. 여기저기서 잔칫집 소문을 들은 차꾼들로 북새통이다. 모두가 제다방법을 목격하고 싶은 차인들이다. 박소장의 학교 내 외부의 제자를 비롯하여 이론과 현장을 공부하기 위한 연구원까지를 포함한다. 거기에 또 전통제다의 기록화 작업을 위한 필자와 같은 목적의 방문객이다. 그러나 모두가 일사불란하다. 각자가 공부를 우선 목적으로 모인 차꾼들이어서 겹치거나 부딪힘이 없이 집중한다. 거기에는 박소장이 가진 차에 대한 신념이 있고, 또 그것을 배운 제자들의 정신이 있으며 그 정신을 존중하는 방문객의 배려가 숨배어 있다.

찻잎을 선별작업하고 있다.
찻잎을 선별작업하고 있다.

올해 동춘차는 두물차로 마무리

채다는 아랫마을 아주머니들이 새벽 7시면 차밭에 도착한다. 대부분 용문마을에서 이주하신 아주머니들이다. 이주처인 구산리에서 산다. 현재는 20가구 정도인데, 구산리로 이주한 이건총 할아버지가 새벽부터 서둘러서 차밭까지 트럭으로 모셔온다.‘동네에서 어머니를 뭐라고 부르세요?’ 하고 묻자 ‘신전댁’이라고 부른단다.용문댁, 대광댁, 상도댁, 임기동댁 등 열 두 분이 채다를 위해 마을로 올라왔다. 택호 역시 용문마을을 중심으로 한 마을 이름들이 등장한다. ‘그럼 봄가을이 어떻게 되세요?’ 하고 연세를 물었더니 ‘7십야달’

평균 연세는 75에서 83세 정도이다. 가장 젊은 분이 70세이다. 78세 이상인 아주머니들이 거의 대다수이다. 대부분 40대 중․후반에서부터 박소장을 만나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 30년이 다 되가는 아주머니도 있고, 33년, 35년째 차를 따고 계신 분도 있었다. 신전댁이 제일 오래 되었다고 자랑하신다. 그 포스가 만만치 않다. ‘댐 막기 전부터 차를 따러 다녔응께.’

‘우덜은 다 댐 막기 전부터 다녔제.’

‘환장하겄네. 그 안 해 안 해부터 했제.’

주암댐은 1983년경에 착공했고, 90년대 초반부터 물담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줄잡아 30년은 족히 (세월이)흘렀는데 아주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안 해 안 해부터 차 따기 작업에 동참했다는 말이다.

‘우리 아들이 시방 마흔이 훨썩 넘었는디 그 아들이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했응께 얼매나 되았겄쏘?’

‘나주댁이 몇 살에 돌아가세?’

‘나주댁이 사~정을 해서 오고 그랬는디, 그 때는 일에 쳐져 사람도 없고 그러등만’

아마도 나주댁이 찻일을 하다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모양이다.

‘전에는 새벽 5시에도 오고 6시에도 오고 그랬는디, 시방은 7시 맞춰서 델로 온께 이 시간이먼 여지없이 차밭에 오제’

찻잎을 따는 솜씨들은 제다 현장을 두루 조사한 필자의 소견으로 최고 수준이다.

차따기 작업은 7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서너시경까지 계속된다. 10시 경에 새참을 드시고, 12시경에 점심을 드시고 나면 오후 마무리하는 시간까지는 종일 채다에 집중한다. 찻잎은 거의 1창 2기를 딴다.

‘사정에 따라 질 밑에 잎이 뻐시먼(부드럽지 않으면) 두 잎만 따고, 보들보들하먼 다 따고 하제’

‘찻잎 상태를 보고 타박 안 들을라고 아주 고냑스럽게(정성스럽게) 따제 다 선수덜이여’

살청을 기다리고 있는 찻잎을 담은 대광주리.
살청을 기다리고 있는 찻잎을 담은 대광주리.

찻잎의 상태는 아주 고르고 광이 나고 부드러웠다. 그야말로 槍은 참새 혓바닥에서 旗는 청설모 혓바닥만 한 것들이었다. 채다를 할 때는 주머니가 크게 달린 앞치마를 앞에 두르고 차를 딴다.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 손수 만들거나 광천 5일장에서 파는 것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주머니가 다 차면 대소쿠리에 담아 찻잎 고르기를 하는데 이때는 박소장의 제자들이 일손을 보탰다. 고르기는 찻잎 아닌 것들을 골라낸다. 예를 들면 채다 과정에서 따라 들어오는 나뭇가지나 나뭇잎 등이고 다듬기는 조금 굵은 줄기나 전잎을 떼 낸다. 살청(초벌덖기)하는 과정에서 설익게 되면 차맛을 저해하거나 굵은 줄기로 인해 槍이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침이다. 그리고 살청하기까지 찻잎이 담긴 대소쿠리는 면포를 덮어 둔다. 위 찻잎만 건조해지는 것을 예방하는 처사이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차를 다루는 솜씨들이 훌륭했다. 긴 세월동안 스스로 터득한 지혜이고 경험에 의한 축적된 기술이었다. 아주머니들의 집단 경험은 차의 융합이고 융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차 한 잔의 기운은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대솔만들어 덖을때 휘저으며 사용

동춘차를 제다하는 차솥.제다에 필요한 대솔가지가 놓여있다.
동춘차를 제다하는 차솥.제다에 필요한 대솔가지가 놓여있다.

찻잎은 이렇게 두고 박소장은 살청을 준비한다. 열 손가락에 23센티 정도 되는 모시천을 휘감는다. 모시천 끝에 밥풀떼기를 붙여 손가락 하나하나에 돌돌 감아 고정한다. 이것은 뜨거운 솥 안에서 살들이 부딪혀 물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박소장은 흔히 사용하는 면장갑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찻잎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차밭에 듬성듬성 나 있는 대나무 잔솔가지를 꺾어 대솔을 만들어 덖을 때 휘저으며 사용한다. 대솔을 이용하여 차를 타지 않게 저어준다. 박소장의 살청은 독특한 방식이다. 옛날 방식 그대로를 고수한다. 최근 대부분의 다원들이 자동화 시설로 차를 만들고, 수제차라 하더라도 가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소장은 대나무 땔감을 사용하여 불을 때고 가마솥에 첫덖음을 한다. 박소장이 부뚜막에 자리를 잡고 솥 온도를 가늠하여 적절한 온도가 되었다 싶으면 제자가 찻잎을 한 쟁반 가져온다. 솥의 온도를 물었더니 ‘글쎄요 아마 250도에서 300도 넘을걸요.’ 뜨거운 가마솥에 얼굴을 대고 덖기를 하다 보니 온도는 저절로 감지되는 것이다.

열 손가락에 23센티 정도 되는 모시천을 휘감는다. 모시천 끝에 밥풀떼기를 붙여 손가락 하나하나에 돌돌 감아 고정한다. 이것은 뜨거운 솥 안에서 살들이 부딪혀 물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박소장은 흔히 사용하는 면장갑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찻잎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에 23센티 정도 되는 모시천을 휘감는다. 모시천 끝에 밥풀떼기를 붙여 손가락 하나하나에 돌돌 감아 고정한다. 이것은 뜨거운 솥 안에서 살들이 부딪혀 물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박소장은 흔히 사용하는 면장갑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찻잎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차를 덖을 때 사용하는 땔감은 대나무다. 박소장은 응송스님에게 ‘다도전수게’를 받고 제다법을 고수하고 있지만 땔감만은 주변 환경에 맞게 그리고 실용성에 맞게 변경되었다고 한다. 차밭의 대나무를 이용하여 불을 때게 되면 불 조절이 잘 될 뿐만 아니라 솥 전체에 골고루 열기를 분산시키는 데 탁월한 땔감이라고 한다. 초벌살청에서 불조절은 매우 민첩한 동작을 요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공정인데 제다 공간으로 쓰고 있는 집주인이었던 이건총 할아버지가 불때기를 담당하여 십 수 년째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궁이에 재를 다 끄집어내 아궁이 오른쪽에 둥글게 쌓아놓고 가운데를 움푹 파서 물을 붓고 물웅덩이를 만든다. 박소장이 초벌살청을 하다가 불기운을 보고 불이 강하거나 약하다 하면 대나무를 꺼내어 이 물웅덩이에 집어넣어 불을 끄기도 하고, 또 불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반으로 쪼갠 대나무를 이용하여 물웅덩이의 물을 떠서 아궁이 안으로 조금씩 퍼나르기도 하면서 불조절을 한다. 이건총 할아버지는 채다할 아주머니들을 트럭으로 모셔오고, 또 차를 덖는 과정에서 불때기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 하고 있다.

살청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솥을 적절한 온도에 이르도록 달군다.
살청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솥을 적절한 온도에 이르도록 달군다.

찻잎을 한 소쿠리, 말하자면 쟁반이나 소쿠리에 차를 적당량 담아 가마솥에 붓고 덖는다. 이 때 찻잎의 무게를 따로 재지 않는다. 무엇이든 눈대중이고 손가늠이다. 과학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찌 묵은 엄마들 솜씨가 갓 시집온 색시가 요리책자의 레시피대로 한 솜씨에 비기겠는가? 찻잎을 솥에 넣고 돌차간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대솔을 이용해 재빠르게 찻잎을 저어가며 굴린다. 첫덖음으로 소요되는 시간은 찻잎의 양에 따라 약 수 분 정도 덖다가 티받이에 담아 다시 쟁반에 옮겨주면 덖은 찻잎은 채다했던 아주머니들 몫이 된다.

첫 번째 살청후 강한 유념

아주머니들은 채다를 마무리하고 오후 새참을 드시고 나면 박소장이 살청한 덖은 찻잎이 배달된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들은 채다에서 유념(비비기) 작업으로 대체된다. 토방(마루)에 앉아 왕골돗자리를 깔고 양 손으로 웅켜쥐고 유념을 한다. 왼손은 찻잎을 잡고 오른손은 오른쪽으로 반원을 그리듯이 비비기를 한다. 차의 진액이 나오고 손바닥에 찻잎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유념이다. 일반적인 제다 방식대로 여러 번 유념하지 않기 때문에 유념의 강도가 있고, 손 안에서 강약을 조절하는 작업은 여러 해 제다에 종사해 온 마을 아주머니들의 노하우이다. 아주 잘 훈련된 하나의 집단경험이었다. 거품이 나오도록 유념을 하는 것이 우리차의 특수성이다. 중국의 유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다신전의 초의의 유념법이라고 하는 ‘경단나수편(輕團那數遍)’ 역시 중국의 강서지역 제다법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강한 유념을 통하여 시원한 맛을 발현하고 유념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데는 우리 사원차의 연원이고 유념 방식의 이유이다. 이화중(李化仲, 1898~1963, 芝山化仲(지산 화중))의 제다법에서도 드러난다.

올해도 여지없이 응송스님(應松 暎熙, 1892~1990)의 시봉자인 임정예(林正禮, 1963~ 55세 토끼띠)씨가 동참했다. 정예씨는 유념하는 일과 재건하는 일을 거든다. 박소장 한 사람이 살청하고, 마을 아주머니 열 너댓사람들과 제자들이 동원되어 유념하는 시간이 약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가량 계속된다. 그렇게 살청과 유념이 마무리 되면 약 6시 전후 아주머니들은 각자 댁으로 퇴청하고, 유념을 마친 찻잎은 탈탈 털어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널어놓고, 한지를 덮어 수분이 증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살청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아궁이 위에 앉아 뜨거운 솥을 안고 오랜 시간 살청해야 하는 공정이기에 다리에 쥐가 날 정도이지만 정작 박소장은 행복한 작업이라 자청한다. 살청 공정이 끝나면 모두가 한 숨 돌리는 브레이크 타임이다. 유념을 마친 차도 잠시 한지를 덮고 돗자리에서 쉰다. 저녁도 먹고 새참도 먹고 한 숨 돌고나면 재건을 시작한다. 재건은 100도가 채 못 되는 솥에서 오랜 시간 진행된다. 한 솥을 재건하는 시간은 약 25분에서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초벌살청 후 유념을 마친 찻잎을 솥에서 온전하게 건조해야 되기 때문이다.

차를 덖고 있는 박동춘 소장. 초의에서 응송으로 이어지는 다풍을 잇고 있다. 그 옆은 어릴적부터 응송스님을 시봉하며 제다에 참여했던 임정예씨.
차를 덖고 있는 박동춘 소장. 초의에서 응송으로 이어지는 다풍을 잇고 있다. 그 옆은 어릴적부터 응송스님을 시봉하며 제다에 참여했던 임정예씨.

유념마친 찻잎 솥에서 25분에서 30분건조

박소장이 유념이 된 찻잎을 솥 한쪽에 몰아놓고 조금씩 펼치기를 하면 정예씨는 이 찻잎을 고르게 폈다가 모았다가를 반복하면서 건조시킨다. 두 사람의 손발이 아주 잘 맞는다. 여러 해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재건은 덖는 듯 건조하고 건조하듯 덖는 과정처럼 보인다. 연녹빛의 찻잎들이 서서히 짙은 진초록으로 변하고, 다시 더 짙은 국방색으로 변하면서 마무리 단계 건조까지 솥 안에서 해결된다. 두 사람이 찻잎을 섞고 굴리고 흩뿌리고 모으고를 반복하면서 완전건조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차의 향과 맛은 결정된다. 수만번의 손동작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차가 완성되는 공정이다.

이때도 역시 불조절은 매우 중요하다. 불기운이 강하다고 하면 바로 대나무가 아궁이에서 나오고 또 약하다고 하면 대나무 하나 정도가 더 아궁이로 들어간다. 이때 불조절은 이건국씨가 맡아서 한다. 건국씨의 역할은 차밭 관리를 비롯하여 제다공간의 청결문제에서부터 살림살이 문제까지를 해결해 준다. 사실은 이건총 할아버지가 해오던 일을 외지에서 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건국씨가 바통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불조절의 방법은 할아버지와 같은 방법이다. 여러 사람들의 내공이 모여 재건이 마무리되면 다시 소쿠리에 담겨 차를 초벌살청할 때 아궁이에 불을 지핀 방으로 이동한다. 이때 차를 기다리고 있는 하리아주머니(엄춘자, 1945~ 73세 닭띠, 완주군 삼례읍 하리)가 있다. 주방에서 찻일하는 사람들의 먹거리를 담당하고 저녁마무리까지 하고나면 할머니는 재건한 차를 받아 채질을 하여 초벌덖음했던 구들방에 한지를 깔고 널어둔다. 이것이 할머니의 역할이다. 뜨끈한 온돌방에서 건조와 숙성을 거치면 마침내 ‘동춘차’가 완성된다. 오후 7시 정도에서 시작한 재건은 자정을 넘어서야 마무리 되었다.

뜨근한 온돌방에서 건조와 숙성

이렇게 완성된‘동춘차’는 우려내는 방법도 다소 차이가 있다. 물식힘사발을 이용하여 80도 정도로 다운된 물로 우려내는 일반 녹차와는 달리 뜨거운 열탕을 부어 한번만 우려 마신다. 이것을 일탕법이라고 한다. 필자 역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흔히 음다에서 고려되는 다례의 격식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를 마실 때는, 예는 기본적으로 갖추는 것이고 절제된 격식보다 차문화의 전승사와 사상, 이념 그리고 차정신이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차는 우리의 자연 환경에서 자란 찻잎으로 한국적인 차맛을 만들어낸 것이다. 맑고 시원하며, 온화한 맛, 은근한 차 기운의 발현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한국차의 특수성이라고 박소장은 강조한다. 담박·소쇄한 차맛의 정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체화된 한국차의 정체성이다. 이것을 함의한 것이 초의차라는 것이다.

유념을 하고 있는 동네 아낙들. 유념을 하는 과정에서 임정예씨의 엄격한 감독이 눈길을 끈다.
유념을 하고 있는 동네 아낙들. 유념을 하는 과정에서 임정예씨의 엄격한 감독이 눈길을 끈다.

‘동춘차’는 그간 많은 논란의 정점에 있었다. 제다 문화재 지정 건을 두고 제다법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덖음차냐? 증제차냐?의 논란이 첫 번째였고, 초의(草衣 意恂, 1786~1866)의 제다법이냐? 아니냐?가 두 번째 논란이었다. 그리고 응송과 초의를 이을 수 있느냐?의 논란이 세 번째였다. 이와 관련한 논쟁들을 풀기 위해 필자는 문헌과 현장을 오가며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초의의 제다법과 전승맥락을 논문으로 정리․발표하였다.(초의차의 제다법 고찰/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대둔사 찻독 초의차의 전승맥락/한국사상문화학회) 더불어 현장조사를 통하여 초의의 제다법을 다시 한번 천착할 것이다.

‘동춘차’제다 현장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공동체적 차정신이었다. 그것은 차를 만드는 사람(인간)들의 합심, 채다와 초벌덖음, 재건을 위한 시간과 주암 용문마을이라는 공간의 조화였다. 차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역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았다. 그 누구도 일에 대한, 일손에 대한 강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성의를 담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뭉쳤다.‘동춘차’는 박소장 혼자만이 제다 공정에 투여된 차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의 역할과 기술이 녹아나 있다. 그 정성과 성의와 합심에서 ‘동춘차’가 탄생하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삶이 유지되고 인간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마을공동체였다. 차를 만들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집단 경험이 하나의 인드라망처럼 인연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집념이 우주만물이 '한몸·한생명'이라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기본이념과도 닮았다.

불을 지피는 일을 도맡아온 이건총 할아버지. 그리고 뒤를 잇고 있는 건국씨
불을 지피는 일을 도맡아온 이건총 할아버지. 그리고 뒤를 잇고 있는 건국씨
제다를 할 때 사용되는 광주리 및 솔. 전통적인 제다법을 고수하는 동춘차의 산파들이다.
제다를 할 때 사용되는 광주리 및 솔. 전통적인 제다법을 고수하는 동춘차의 산파들이다.

뜨거운 열탕으로 한번만 우리는 일탕법

다중이 모였을 때 조화롭게 유기적으로 누구의 통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협력체계가 잘 이루어진 자동화시스템 같은 느낌이었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성의와 정성은 배가 되는 제다 현장, 그리고 차를 대하는 얼굴마다 유쾌해 하는 표정들이 현장의 언어였다. 그것은 그간 긴 세월동안 박소장이 쌓아온 情理가 아니였을까? 그들에게 보여준 인간존중의 사상이나 이념들이 견인되어 현재 나타나는 응축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박소장은 ‘너무 상업화 되거나 어떤 수단으로 제다가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송광사 현고스님의 소개로 처음 이 공간을 만났을 때 정말 이 곳이 내 차의 완성을 지켜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출발했다’고 한다. ‘이 공간에 내가 없고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곳에 있어도 늘 이 곳은 내가 있는 곳인 거죠.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정말 우리차를 제대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이 시대에 하고 싶어요’차는 그냥 마시는 차가 아니다. 제다인의 생각이나 방향까지도 담아내는 것이 차다. 아름답고 크고 깊은 하모니를 이루는 것은 누구나 어디서나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제다 공간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연출이 가능한 그림은 아니었다.

박소장은 ‘한국 차문화의 지속 가능한 대안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내년부터는 이론을 함유한 제다 교육에 공헌하고자 한다.’는 소망도 비쳤다. ‘차를 가장 근거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제다 교육이야말로 대중교육으로써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다 깊고 넓은 의미의 차문화 활성화를 위해 제다인 육성을 큰 교육방향으로 설정하고 매진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용문마을의 차 한 잔이 세상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휘게가 될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차정신이고 공동체적 대동문화가 아닌가 싶다. 이번 이 제다법 현장 공개를 통해 한국 차문화사의 오류가 다소 정립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는 제다 현장을 수없이 스케치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언어가 부족해서 이 글의 마침표는 잠시 놓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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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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