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한국 근. 현대 차 문화 전승의 줄기를 캐다>란 세 번째 기고문이다. 본 기사에 실린 사진의 저작권은 정서경박사에게 있으므로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게재할 방침이다. 독자제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1985년 3월까지 응송스님-백화사, 경현스님-관음암

이후 응송스님-극락암, 경현스님-백화사

백수를 누렸던 응송스님 차 덕분이었다고 회고.
백수를 누렸던 응송스님 차 덕분이었다고 회고.

경현(敬賢, 1942~)스님은 응송스님 이후 백화사에 거주하신 비구니스님이다. 노스님은 백화사를 떠나게 되자 이호경여사와의 지난 세월의 흔적이 있는 백화사에서 祭日을 모셔주기를 부탁하며 경현스님에게 백화사를 양도하였다. 그런 연유로 28년간 백화사 주지로 계셨다. 초의선사의 다맥이 이슈화 되면서 당시 대흥사를 기억하고 계시는 스님들을 찾아다니던 중 필자는 경현스님의 연락처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날이 2014년 12월 19일. 벌써 2년 전 일이다. 필자의 집안과 집안끼리 왕래하던 해남 출신 정재철씨(1964년~ 용띠)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정재철씨는 대흥사 불교학생회장을 하였기 때문에 대흥사를 자주 왕래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연락을 해 봤더니 경현스님이 주지로 있던 백화사를 자주 갔었고, 그런 인연으로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아내와 함께 경현스님이 계시는 논산 사찰에 가서 뵙고 1박도 하고 왔다는 것이다. 너무 반가워서 당장 연락처를 받았고, 바로 경현스님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관음암, 극락암, 백화사의 정황을 잘 알기 때문에 비구니스님이 노스님을 시봉했다는 말은! 글쎄요.

-관음암과 백화사 시절 응송스님에게서 대흥사의 제다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는가? 그리고 대흥사의 제다맥을 잇고 있었는가?

“응송스님이 독립운동을 할 때 파고다 공원에서 총을 맞았다. 그리고 쓰러졌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니까 어느 집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이 당시 배화여고에 다니던 여학생 집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 그 여학생이 응송스님의 부인이 되었다. 그 분이 이호경여사이다. 응송스님은 태고종이었기 때문에 법계를 이을 사람을 찾았다. 대흥사 아래 탱화장 하던 스님의 상좌 고재섭(고재섭,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도 돌아가시고 고민하다가 백운스님에게 법계를 물려주었다. 응송스님에게 불교학 이론과 차를 전수 받은 사람은 유발상좌인 박동춘이 있었다. 박동춘은 동다정통고가 번역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공헌이 있었으며, 응송스님의 유발상좌로 후일을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제자였다. 본인은 응송스님 생전에 차를 만드신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가끔 손이 부족할 때 도와드린 적은 있지만 전문적으로 차를 하지 않았다. 차를 전문적으로 배운 제자는 박동춘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30년 넘는 이야기를 선명하게 풀어낸 경현스님
당시를 회상하며 30년 넘는 이야기를 선명하게 풀어낸 경현스님

2014년 12월 19일, 경현스님과의 첫 통화

-그런데 스님께서는 왜 차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으셨어요?

-차야 먹죠. 그런데 차를 전수받을 의욕을 갖지도 안 하고 그냥 보통 스님네는 차를 마시잖아요. 그 정도 우리 스님네 수준에서만 하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스님 그런데 차계에서는 초의선사의, 말하자면 대흥사 다맥에 대한 논란이 좀 있습니다. 응송스님이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잇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인데요. 스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가장 근거리에서 보셨던 분으로서...

-그러니까 응송스님은 초의선사의 13대 법손이에요. 법손이라는 것은 스님네끼리 이렇게 일반 마을 같으면 아버지 아들 이렇게 대를 잇잖아요?. 예, 그런데 13대 손자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응송스님이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이으셨죠.

-아 이었다고 볼 수 있는가요?

-그럼요. 그리고 촌수로 치면 13대 손자니까.

-그러면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응송스님이 잇고 있기 때문에 응송스님의 제자인 박동춘선생이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잇고 있다고 봐야 되겠네요?

-예. 예. 그렇게(봐야죠)

-그러면 혹시 박동춘선생을 뵌 적은 있으신가요?

-예 최근에는 안 만났어도 많이 보았죠.

-혹시 박동춘선생하고 스님과는 얼마나 연배가 차이가 있을까요?

-글쎄 내가 그것을 물은 적이 없어서,

-예 제가 알기로는 박동춘 선생은 62세!? 정도 되었을 겁니다.

-예 제가...

-원래 스님의 속납을 여쭈면 실례인데. . .

-노스님 백화사에 계실 때 박동춘씨는 아주 자주 봤습니다.

-전화로 너무 죄송합니다. 언제 스님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시게요. 극락암 아래채에서는 며느리가 시봉했어요.

극락암에서 차를 만들고 있는 말년의 응송스님(사진제공 박동춘선생 photo by 김대성선생)
극락암에서 차를 만들고 있는 말년의 응송스님(사진제공 박동춘선생 photo by 김대성선생)

이런 대화를 남기고 짬을 보고 있다가 다시 경현스님에게 연락을 드린 것은 지난 8월 21일이다. 제다 중요무형문화재를 둘러싸고 차계는 술렁거렸고 대흥사 다맥을 위시하여 초의선사의 제다맥의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필자는 응송스님을 10년 넘게 시봉한 임정예를 만나 사실 관계를 기사화 했던 이후였다. 응송스님의 제자라는 모 비구니 스님이 차계에 알려지고 다맥에 대한 논란이 이슈화 되고 있어 그런 관계를 기억하는대로 들려주시기를 부탁한다는 필자의 말에 경헌 스님의 답은 이랬다.

“(응송스님을 시봉한) 비구니 없는데요, 왜 그러냐면 제가 대흥사에 살면서 응송스님 당신이 그 집을 저한테 넘겨줬기 때문에 그런 사실 이야기 다 해 주셨고, 또 동춘씨는 제가 볼 때 학교 졸업하고 와서 노스님을 모시고 제다법을 다 배우고 그랬어요. 그래갖고 그 <동다정통고>를 윤문할 때도 동춘씨가 많이 공헌 했고, 85년 송헌클럽에서 출판기념식을 할 때도 동춘씨가 윤문한 <동다정통고>를 공양물로 했거든요. 노스님 94세 때 제가 백화사를 받았어요. 99세 때 돌아가셨는데... 백화사와 극락암 중에 어느 절이 더 편하냐고? 편한 곳에 있으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대흥사가 큰절이고 본사 말사이기 때문에 백화사에 있겠다하여 백화사를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화순 운주사에 노스님 상좌를 했던 비구니 도의스님이 담양에서 광주로 침을 맞으러 다닌다 하여 멀리서 그러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다니라고 극락암에 거처할 방을 하나 내 주고 백화사로 돌아왔어요. 도의 스님은 극락암을 많이 고치고 불사도 하고 고생 많이 하셨는데 나중에는 태고종 소유라 해서 다 가져갔어요. 도의스님은 차는 안 하고 시봉도 며느리가 했어요. 집이 윗채, 아래채 있는데 윗채 법당채는 스님이 살고 아래채에서 며느리가 시봉했어요.”

응송스님은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항상 주장하셨어요. 지난 9월 6일. 전화통화.

-응송스님 제자라고 하는 00비구니스님을 아시나요?

“제가 청도 운문사에 있을 때(1974~76) 거기서 공부하고 있드라구요. 제 은사스님이 운문사 주지스님이셨어요. 그래서 그 밑에서 제가 교무소임 봤어요. 00스님은 학인 때였어요. 그때 보고,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모 비구니스님이 다도를 한다는 말만 들었어요. 졸업한 것은 못 봤고요. 응송스님과 모 비구니스님과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다도를 배운다고 들렸는지? 어쨌는지? 글쎄 응송스님은 박동춘씨 이야기는 항상 하세요. 그리고 동춘씨는 보면은 한문을 공부하고 있을 때 어디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소개 했는가봐요. 비행기 타고 와서 응송스님 밑에 배우고 가고 또 책 번역하고 가고 그랬어요. 승가의 법맥이 있는데 응송스님은 초의스님의 13대 손주란 말이에요. 그래서 늘 초의선사가 하시던대로 제다를 주장하셨어요. 그러니까 다 뭐 각자 자기 주장하는거죠. 일지암이 초의선사가 거주하시던데잖아요. 그래갖고 일지암도 응송스님이 계실 때 지금 어디 초의선사 고향 무안에 계시는 용운스님 그때 제가 봤을 때는 스님 된 지 얼마 안 되가지고 해남다인회에서 일지암을 복원할라 하는데 스님을 세워야 하니까 용운스님을 세우고 그때 또 용운스님이 차에 대해 조혜가 깊으니까 용운스님을 세우고 어디 고건물을 뜯어다가 일지암을 복원했잖아요. 그렇게 하다가 일지암 내놓고 나가셔서 초의선사 고향땅에 가서 또 차를 보급하고 그러시죠. 용운스님은 북암에 계셨어요."

돗자리위에서 차를 만들고 있는 응송스님과 제자 박동춘선생(사진제공 박동춘선생 photo by 김대성선생)
돗자리위에서 차를 만들고 있는 응송스님과 제자 박동춘선생(사진제공 박동춘선생 photo by 김대성선생)

경현스님의 회고는 계속 이어졌다.

“응송스님은 백화암에 계실 때 제가 극락암에 있었는데 제가 극락암에서 관음암으로 관음암에서 백화사로 온 뒤로 노스님은 극락암으로 나가 계셨어요. 응송스님의 현장은 백화암에 가면 백화암에 차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차를 따서 만드실 때에는 꼭 백화암에서 만드셨어요. 해년마다 차를 만들고 1년치 차를 만들어 마셨기 때문에 장수비결이 녹차를 잡수시고 삼시로 하얀 찰밥을 잡수셔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응송스님은 녹차를 지금 다도하는 사람들이 하는 그런 쪼그만 잔에 잡수시는 것이 아니고 큰 사발에 잡수셔요.”

응송스님 며느리에 대해서도 경현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며느리가 참 잘해요. 차도 잘 만들고... 백화사에서는 거처하는 이들이 주로 했는데 항상 갈참나무, 잡나무를 (가지고 불을)때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불은 꼭 당신이 봐 주셨어요. 불을 잘 때야 거시기한다 그러고 며느리랑 같이 했든 거 같아요. 저는 운문사에서 교무일을 접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백화암 위에 있는 관음암에 83년도에 갔네요. 가서 2년 정도 관음암에 있다가 85년에 백화암으로 갔어요. 그러니까 그 안의 일은 이야기로 듣고 그 정황만 알 뿐이지요. 그런데 동춘씨는 그때 봤어요. 그 비구니스님은 학승일 때 보고 차 하는거는 안 봤는데 소문에는 차를 그렇게 잘 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다맥 전승에 대한 현장조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9월 6일 모 비구니스님이 광주에 왔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약속을 잡았고 응송스님 며느리와 함께 자리를 했다. 모 비구니스님이 이동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 장소는 광주버스터미널로 잠정 잡았고, 필자가 이동하는 시간, 또 버스 출발시간이 있어 30여분 정도의 짧은 인터뷰였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비구니스님이 응송스님을 시봉한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두 사람의 증언이 엇갈렸다. 그리고 서로 연락이 단절되었던 (응송스님의)며느리와 경현스님을 연결하였다. 당시 경현스님은 해남 관음암과 백화사 그리고 광주 극락암의 정황을 소상히 기억하고 계신 분이었기 때문에 두 분의 해후가 어떤 해결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마치 경현스님은 해남에 내려와 계신다고 했다. 9일 정도에 광주에 나올테니 그 때 보자는 약속을 하였다. 두 분의 대화가 필자에게 어떤 해결점을 가져다줄지 매우 흥미롭게 기다려지는 사흘를 보냈다.

응송스님 며느리와 경현스님의 해후, 지난 9월 9일

동다정통고 왼쪽 1985년 초간본, 오른쪽이 2015년 복간본이다.
동다정통고 왼쪽 1985년 초간본, 오른쪽이 2015년 복간본이다.

대흥사의 다맥을 정리하기 위하여 경현스님과는 몇 차례 통화는 더 이어졌다. 증언과 당사자의 진술에서 발견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통화였다.

-응송스님에게 차를 배웠다는 제자(모 비구니 스님)가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보지 못 했어요. 안 봤거든요.

-응송스님을 시봉했다고 하는데,

-우주엄마가 있기 때문에 딴 사람이 안 모십니다. 그리고 박동춘씨는 공부하기 위해서 차 만들면서 왕래한 거 저도 봤고, 그랬지만은 모 비구니스님이 응송스님을 시봉했다는 것은? 말이 안 맞아요. 우주엄마가 얼마나 어른을 잘 모시는데 스님한테 맡겼겠어요?

-예,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 지금 네 번 정도 뵈었는데 정말 진실성이 보였거든요.

40년전인연, 경현스님과 응송스님 며느리가 해후를 했다.
40년전인연, 경현스님과 응송스님 며느리가 해후를 했다.

-예 정말 진국이에요. 우주엄마.

-우주엄마는 (그 비구니 스님이)한 번도 차를 만든 적이 없다 하시는데

-그럼요. 얼굴은 봤는지 모르지.

-예 한 두 번 찾아오시기는 하셨데요. 그리고 우주엄마가 차를 대접한 적은 있데요.

-예 저는 00스님 본 적이 없거든요.

-00스님과는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청도 운문사에 계실 때 학인이었다면서요. 그런데 백화사에서 시봉할 정도라고 하면 00스님을 모를 리 없을테고~

-예 그때 저는 교무 소임을 했고 00스님은 상감을 받았어요. 그리고 옆에서 노스님을 떨어지지 않고 시봉한 분은 우주엄마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주엄마 말이 맞지! 항시 삼시를 대접하고 꼭 찰밥을 삼시로 잡쉈기 때문에 삼시로 대접하고 옆에서 시봉을 했는데 차 대접도 우주엄마가 했는데 그걸 왜 모르겠어요.

-극락암에서도 차를 만들었다고 해요.(00비구니스님이)

-극락암 그때는 다른 사람이 차를 안 만들었을 거에요. 노스님이 법당 아래채에서 사셨는데 제가 여기 사는 동안에 거기 나가셨거든요. 그런데 극락암에는 차 만드는 공간이 없는데요. 왜 그냐면 법당이 있고 요사채가 있는데 아주 골방 같애가지고요. 극락암이 그래요. 솥을 걸만한 데가 없었어요. 응송스님이나 며느리나 그 아래채에서 살았기 때문에 진짜 당신들 양식만 만들지 손님들이 와서 차를 만든다거나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요사채나이나(요사채라고 할 것도 없이) 정말 좁고 그때는 그랬어요.

-예, 며느리 증언에 따르면 극락암에 계실 때 응송스님이 95세 96세 되셨을 때에요. 그런데 거기서 차를 만드실 때에는 박동춘선생님이 오시고 또 며느리가 오셔서 만든 적이 있지만 며느리를 대동하지 않고 차를 만들 정도의 정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말씀 하셔요. 그러면서 며느리 없이 한 번도 차를 만든 적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 안 맞으니까요.

-그럼요. 그렇지요. 극락암 집 구조가 차 만들 공간도 없어요.

-그런데 극락암에서도 2,3년 만들었다고 했다가 또 3,4년 만들었다고 했다가 그래서 제가 매우 혼란스럽네요. 며느리 증언에 의하면 극락암에서 1년 정도 조금 더 살고 사가로 이사를 가셨다고 하는데... 더욱이 극락암에는 도의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가에 계시다가 차철에 며느리랑 차를 만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그러게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리고 거기는 어디에 차가 있습니까? 백화사에서는 그래도 응송스님이 심기도 하고 도랑에 차가 있어서 하기는 했는데...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차를 따 오시기도 하시고...

대웅전 마래부처님의 모습은 묵묵히 과거를 기억하시는 듯 하다.
대웅전 마래부처님의 모습은 묵묵히 과거를 기억하시는 듯 하다.

필자의 단상

당초 이 글(한국 근․현대차문화 전승의 한 줄기를 캐다.)의 연재 계획은 특별기고로 3차례를 예정하고 집필하였다.‘2016 초의열반추모기념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할‘초의차의 원형과 전승맥락 그리고 제언’이라는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진행되었다. 현장을 들여다 본 현장론적 방법론으로 조사된 사례이다. 그래서 대흥사의 다맥, 그리고 초의선사의 초의차를 계승한 전승맥락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전승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을 연구자로서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라는 거대담론을 고민하게 되었다. 현장은 사실을 고증할 수 있는 담보 같은 것이었다. 그 첫 번째로 응송스님의 시봉자(임정예씨)를 찾았다. 그리고 응송스님의 며느리(임경수 여사)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응송스님의 제다법이 부초차냐? 증제차냐? 하는 논란이 핫 이슈인 정점에서 응송스님을 시봉했다는 비구니스님을 조사하였다. 여기에서 10년 넘게 응송스님을 시봉했던 정예씨, 그리고 21년 이상 스님을 곁에서 모셨던 며느리와 00스님의 구술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분석하여 내 개인의 견해로 구성하기에는 예민한 부분들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구술조사 그대로를 여과 없이 전달하자는 취지로 기사를 썼다. 진단은 차계에 맡길 생각이었다. 지엽적인 이야기까지 다루었던 것은 다 이런 취지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것이 진실이든 날조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 판단했다. 최소한 필자는 학문도 따뜻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난 이들이 다시 만나 응송스님 영전에 따뜻한 차 한 잔 올리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응송스님 며느리와 00스님이 한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다. 이날 00스님은 본인의 기사가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3번째 기사는 경현스님과의 인터뷰 내용이 주가 되었다. 당시 관음암과 백화사 그리고 극락암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경현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의 연결을 통해서 응송스님의 며느리와 경현스님이 해후했고, 하룻밤을 같이 묵었다. 구술조사는 장시간 진행되었다. 이 세 분(시봉자, 며느리, 백화사 후임 경현스님)의 증언은 근․현대차문화 전승의 실증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향후 더 확장된 연구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욱 발전된 문헌의 탐구와 현장성이 드러나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또 박동춘선생님을 포함한 응송스님의 제다법 역시 구술조사를 하면서 재현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대흥사의 다풍과 제다법’이라는 논문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그래서 이번에 진행된 모든 기사에서는 언급을 금했다. 시대적 정서를 배경으로 정밀한 분석을 통하여 근․현대 차문화 전승의 일맥으로 정리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추신-이렇게 현장을 누비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1960년대 초의선사가 계시던 대둔사 대광명전을 지키고 있었던 이화중스님이다. 1997년 대원사에서 출판한 예용해선생의 유작인 '차를 찾아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선생이 현장을 조사하고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97년 동학과 후학들에 의해 책으로 엮어졌다. 이 책 속에서만 계시던 화중스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으나 풀리지 않았던 실체가 이번 현장에서 밝혀졌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는 다음 기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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