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시간이 흐르고 인류의 문화수준이 높아질 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더 많은 필요성을 느끼고 더 많이 회자 되어지고 더 많이 향유하게 되는 문화상품이다. 차는 인류의 역사와 비슷하게 함께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차의 이런 문화적 흐름은 시대적 변화가 속도감을 가지고 진행되면서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차가 가지고 있는 여유로운 속도감 때문이다. 티타임의 속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속도와는 완전 다른 패턴이다. 티타임 속의 시간은 깊이 있으면서도 여유있는 나름의 속도감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티타임에 임할 때는 누구나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생각을 제대로 멈추고 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 여유 속 찰나를 쉬는 마음을 알게 모르게 느끼면서 인류는 그 시간을 평생 혹은 대대로 이어 왔다. 이렇게 대부분의 티타임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스타일은 나름의 속도감과 패턴을 가진 채 계속 그렇게 수 세기 혹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다. 차는 느림의 문화상품이다.

차는 그 역사가 오천 년이 넘고, 홍차 역시도 사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켜켜히 쌓여가는 세월 속에 차의 영역은 더 넓어지면서 세분화되었다. 예전엔 녹차와 홍차만으로 분류해도 충분하던 것이 이젠 여섯 가지 분류로 나뉘어지고, 각 부분별로 최고급 품질의 차들이 만들어지고 선택되고 있다. 그리고 각 영역 별로 혹은 영역 간에 차와 차가 합종연횡하는 각종 결합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이름하여 티블랜딩이다Tea blending이다. 티블랜딩은 수많은 경우와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각종 결합으로 수많은 종류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차가 여타 재료와 만나면 그 영역은 훨씬 더 넓어진다. 이름하여 베리에이션티Variation tea이다. 베리에이션티의 종류에는 차에 알콜을 첨가해 마시는 스피리츠티Spirits tea, 차에 향신료를 첨가해 만드는 스파이스티Spice tea, 과일을 혼합하여 제조하는 후루츠티Fruits tea, 그리고 허브와 차가 만나는 허벌인퓨전티Herb tea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완성품으로 출시되어 사랑을 많이 받으며 회자되는 인기 티블랜딩 제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재료로서 더 인기있는 다류도 있다. 녹차, 백차, 청차, 황차, 홍차, 흑차로 분류되는 6대 다류 중 전 세계 차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단연 홍차다. 그리고 블랜딩의 재료로서도 역시 홍차가 가장 많이 유용되고 있다. 이렇게 홍차가 유독 많이 쓰이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전 세계에서 홍차의 수요가 가장 많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홍차가 이러저러한 혼합 과정에서 여타 재료를 잘 융합하여 살려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GDP가 높아질 수록 티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시장확대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 GDP에 따른 그런 추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시장이 확대되고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욱 주목받는 분야가 수 많은 차의 종류 그리고 티블랜딩 분야다. 티블랜딩이라 함은 차의 혼합을 이야기 한다. 차의 혼합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는 아직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역시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티블랜딩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짜릿하다. 만들어진 블랜딩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매력은 배가 된다. 그러나 원하는 캐릭터나 강도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반대로 많은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즐거움과 노력이 병행되어 완성되어야 하는 분야가 티블랜딩이다. 치열한 노력이 없어서도 안되고, 그 사이의 즐거움이 있는 걸 무시해서도 안된다.

생각을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나는 간혹 집에서 블랜딩티를 마시곤 했다. 블랜딩티를 마셨지만 그것이 블랜딩티였다는 것을 미처 몰랐을 뿐 사실은 특별한 레시피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나에게 중요한 순간에 우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힘든 순간의 나를 소중하게 도와주었다. 소중했던 나의 첫 블랜딩티는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약이었다. 여리고 허약했던 어린 시절의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나는 학교에서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내가 어떻게 집까지 옮겨져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마셨던 모종의 약이 기억 한 켠에 남아있다. 그 때 더위를 먹고 쓰러진 나를 위해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건 커다란 스프 그릇에 따끈한 홍차와 생강 한 편을 넣고 익모초 한 잎을 띄워주신 한 잔의 차였다. 기력이 없이 창백했던 나는 입맛조차 없었는데 어머니는 거기에 마시기 좋도록 까만 흑설탕도 큰 스푼으로 푸욱 퍼서 넣어주셨었다. 매우 쓴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설탕이 들어가 달콤하게 녹은 그걸 나는 달게 마셨고 금새 기력을 차렸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랜 동안 내가 마시고 기운을 차린 그건 검붉은 빛깔의 약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음료로서의 차가 아닌 몸이 아팠을 때 약으로 먹고 나은 것이었으니까 그런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확인해 본 바, 그 진하고 검붉은 빛깔의 액체는 약이라기 보다 블랜딩티였던 것으로 판명났다. 어머니는 쓰러진 아들을 보고는 놀란 마음에 급하게 집에 있는 음료를 따뜻하게 한 잔 해서 먹인 것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설탕물 정도만을 마시게 할 요량이었는데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넣다 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어쩌다가 얼떨결에 만들어진 블랜딩이었던 셈. 그렇지만 나는 그 옛날에 어머니께서 우연히 보여주신 지혜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 상황에서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온 것이었는지 지금도 궁금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생강 한 편과 익모초 한 잎이 들어간 차 한 잔은 지쳐 쓰러지고 힘든 육체를 보듬은 희망 같은 음료로 나의 무의식 속에 계속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첫 블랜딩티는 차가 아닌 약이었다.

차는 그리고 홍차는 그 매력이 대단하다. 누구나 한번 홍차의 맛을 알게 되면 그 환상적인 맛과 향에 푹 빠져버린다. 홍차가 가진 매력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서 홍차를 좋아하게 된 나는 홍차를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블랜딩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블랜딩을 할 때마다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기대가 묘하게 흥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기대와 긴장감이었다. 그런 긴장감은 작품의 실패를 걱정해서라기 보다는 기존의 작품을 똑같이 밀밀하게 다시 재창조해낼 때의 긴장감이었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작품이 잘 탄생할 것이라는 설레임 속에 있는 기대감과 긴장감이었다.

 

글 | 티아트 대표 박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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