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 (1837-1901) 영국의 차 문화는 정점에 이르렀고, 7대 베드포드공작 부인 안나마리아(1783~1857)가 창시자로 알려진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문화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그림 이경남.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 (1837-1901) 영국의 차 문화는 정점에 이르렀고, 7대 베드포드공작 부인 안나마리아(1783~1857)가 창시자로 알려진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문화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그림 이경남.

그림으로 만나는 차 이야기

차의 시작은 중국이지만, ‘홍차의 나라’ 하면 영국을 연상한다. 유럽에서 차를 맨 처음 접한 이들은 포르투갈인이었다. 1498년에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직항로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베네치아 중심 무역 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방무역의 중심 도시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후 중국 광둥을 거쳐서 도자기와 비단, 향료 등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1541년에는 일본 나가사키까지 활동을 넓혀 마침내 유럽 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차를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이들 특산물을 리스본 항구로부터 프랑스와 발트해 방면으로 운반 무역을 했다. 포르투갈이 1595년 네덜란드 선박을 축출하는 바람에 직항로를 개척하여야 했다. 이듬해인 1596년에 네덜란드 상선대가 말라카(Malacca)제도와 인도네시아 자바(Java)섬을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는 무역 강대국이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10년 일본 히라도(平戶)로부터 자바의 반탐을 거쳐 유럽으로 차를 수입했다. 이것이 차가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일이다.

영국 차 문화의 인플루언서(influencer), 캐서린 브라간사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 차가 전파되었으나, 그 전부터 가장 관심이 뜨거웠던 곳이었다. 차가 언제 영국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지만, 독일, 이태리, 프랑스와 비슷한 시기인 1640년~1650년 즈음 네덜란드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네덜란드 보다 약 50여 년 정도가 늦은 것이다. 그 시기에 차는 음료라기보다 귀족층을 중심으로 동양에서 온 진귀한 ‘약’으로 소개되었다. 또 하나의 설은 1662년 영국 찰스 2세와 포르투갈의 왕녀 캐서린 브라간사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인도 뭄바이 땅과 차, 설탕 등을 일곱 척의 배에 실어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일곱 척의 배에 실려있던 차는 캐서린 브라간사가 마시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당시 설탕은 라틴아메리카 등 먼 나라에서 가져와야 했던 값비싼 물건이었다. 캐서린은 이국땅에 시집간다는 염려로 만병에 효과가 있다는 동양의 신비한 약초인 차를 지참한 것이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고 영어를 못했던 왕비 캐서린은 영국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차를 마시는 습관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캐서린 왕비의 왕실 휴식시간은 주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많은 귀족이 빠르게 차를 접하게 된다.

홍차의 나라가 된 두 가지 이유

영국이 홍차의 나라가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예로부터 갖고 있던 알코올의 섭취 풍습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알코올 중독을 초래했다. 알코올 중독 증세로 인해 산업국가였던 영국의 산업생산력이 저하되는 국가적 위기의식으로 인해 건강 증진을 위한 음료로 차가 권장되었다. 17세기 무렵 영국은 오크통의 발명으로 진토닉 등 맛있는 술이 제조되면서 알코올 중독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알코올의 대체품인 권장 음료로 선택하였다. 원래 영국은 유럽 최대의 커피의 소비국이었다. 초창기 카페의 개념인 커피하우스에서는 커피, 초콜릿, 셔벗 등을 팔았는데 차도 곧 커피하우스의 대표 메뉴가 되었다. 영국에서 차를 소개하는 첫 번째 광고는 1658년 술탄레드 커피하우스 차 상인 토머스 개러웨이의 “차는 건강에 좋은 음료”라는 문구였다. 커피하우스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1700년대로 들어설 무렵 약 50년간 500개로 늘어났다. 커피와 코코아보다 차가 더 많이 팔리면서 영국의 중산층은 차를 커피하우스에서 맛보며 활기찬 사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귀족 중심에서 의회 체제로 변했으며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중간 계층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알코올의 대체품으로 늘어난 차는 커피 하우스를 중심으로 국민 음료로 등극하였다. 더구나 1페니라는 낮은 입장료로 말미암아 소득이 낮은 손님도 이용할 수 있는 런던 사람들의 일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대학이라니/ 1페니밖에 쓰지 않으면서/ 당신이 학자가 될 수 있는

대학이 어디 있으리

-<커피하우스 뉴스> 1667년 선전 팸플릿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발전에 중요한 요소인 인구의 증가와 노동력의 안정을 이루었고 이 무렵 차 세금도 현저히 낮아지며 경제력이 생긴 중산층을 중심으로 차의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영국은 눈부신 발전을 하였고 차를 마시는 영국과 커피를 마시는 유럽을 대조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프랑스가 쥐고 있었기에 커피 수입이 어려웠던 점도 중요한 이유이다.

캐서린의 지참금으로 받은 뭄바이를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한 영국은 동인도회사의 주요 무역 품목에 차가 포함되어 독점 거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66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100파운드(약 45kg) 고급 차를 처음으로 직수입하면서 중국과 영국의 첫 번째 차 교역이 이루어졌다.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영국까지 차가 도착하기까지 약 6주가 걸렸지만, 이윤을 내기 위해 열심히 홍차를 보급해야 했다. 중국에서 들여온 녹차를 주로 마시던 영국인들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된 청차의 일종인 산화차 보-히차(Bohea)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차는 서민계급에까지 전파되었지만, 여전히 상류층에도 부담되는 값 비싼 음료였다. 당시 차 1파운드에 부과된 세금은 노동자의 일주일 임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18세기 후반 차의 연간 수입량이 1000만 파운드를 넘어 찻값이 저렴해지고 차 세금도 현저히 낮아져서 차 밀수와 위조가 줄고 대부분 가정이 차를 즐겼다. 또 차를 마실 때 물을 끓임으로써 수인성 전염병을 예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혁명이 완성된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식민지인 인도와 스리랑카의 대규모 농장에서 차를 재배하게 되어 싼값에 차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서민들도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 되어 대영제국의 국민 음료이자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안나마리아의 애프터눈티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 (1837-1901) 영국의 차 문화는 정점에 이르렀고, 7대 베드포드공작 부인 안나마리아(1783~1857)가 창시자로 알려진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문화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캐서린 왕비에게 배운 습관대로 영국인은 오후에 차를 마셨는데 1700년대 초에는 차 예절도 관례화되어 컵을 드는 동안 약지를 펼쳐 우아함을 표시하고, 차를 그만 마실 때는 컵위에 티스푼을 걸쳐 놓았으며, 후루룩 소리를 내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19세기 중엽은 산업혁명의 완성 시기로, 해가 져도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귀가 시간이 늦어 졌다.

사교 문화가 발달되어 귀족일수록 에티켓을 중시하였고, 당시 유한계급은 저녁을 매우 늦게 먹었다. 애프터눈 티는 점심과 저녁 사이에 차와 함께 먹는 간단한 식사를 말한다. 안나 공작부인은 점심과 저녁 사이에 자신의 저택 ‘푸른 응접실(Blue Dining Room)’ 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애프터눈티의 필수품인 3단 트레이(케이크스탠드)에 1층 샌드위치, 2층 스콘, 3층 케이크 등과 함께 애프터눈 티를 마셨다. 애프터눈 티는 영국 상류층의 사교 문화에서 출발해서 차에 대한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으며 영국에 차가 소개된 지 250여 년 만에 영국을 대표하는 차 문화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최근 애프터눈 티가 유행이며 전 세계의 관광객들은 지금도 런던에 가면 대영제국의 여왕을 만나듯 즐겁고 화사한 분위기의 푸짐한 티푸드가 있는 애프터눈 티를 꼭 찾는다.

얼그레이 백작의 얼그레이 홍차

홍차의 나라 영국을 꽃 피운 인물로 안나마리아와 함께 꼽히는 인물은 바로 얼그레이 홍차를 만든 2대 그레이 백작이다. 그는 1786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하원의원이 되었고, 1830년에 수상이 되었다. 그는 우이산의 홍차인 동목촌 정산소종를 선물 받았고 그 향과 맛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당시 정산소종은 구하기 힘들어 런던의 차상인에 의뢰해 정산소종과 비슷한 얼 그레이홍차를 만들었다. 찻잎을 강하게 훈연한 차인 랍상소종이나 베르가못 향을 입힌 얼그레이는 정산소종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서 만들어진 대체품이었다.

트와이닝에서도 포트넘앤메이슨에서도 다른 홍차 가게에서도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얼그레이 홍차를 생산하긴 하지만 그 뿌리는 모두 무이산의 정산소종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차를 너무 많이 마신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동방의 느릿한 복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황하 …….

-존 보인튼 프레스틀리, 영국 소설가이자 극작가, 1894~1984

이제 영국의 차 문화는 영어권의 다른 나라로 퍼져서 영국이 차를 받아들인 후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서구권에서 유지되고 있다. 100여 년 전 헨리 제임스라는 작가는 “애프터눈 티라고 불리는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아늑한 순간은 삶에서 그리 많지 않다”라고 적기도 했다. 뉴질랜드인들은 “일어나서 큰 컵으로 한 잔을 마시고, 아침 식사 때 다시 큰 컵으로 차 한잔을 마신다. 11시에 아침 차, 점심에는 최소 90%가 차를 마신다. 오후 4시에 다시 차 한잔, 저녁에 더 많은 차를 마신다. 밤 9시 또는 9시 반에 만찬이라고 하는 식사를 하는데 그날의 마지막 식사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영국은 물론 서구의 여러 나라는 지위나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하루에 일곱 차례나 여덟 차례까지도 영국식 티타임을 가지며 차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외로움도 지루함도 없이 따뜻하고 향기로운 찻주전자에 담긴 붉은 홍차가 주는 기쁨을 알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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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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