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권력을 원한다

세계사를 바꾼 커피이야기 이능화 기자l승인2022.06.18l수정2022.06.1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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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하의 나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오스트리아 정부 사절단을 향해 한 말이다. 이는 1797년의 일로, 나폴레옹은 동쪽의 맹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해 사지로 몰아넣은 뒤 강화조약을 거부하는 사절단에게 엄포를 놓았다. 커피를 보면 국가 존망 위기를 떠올리는 나쁜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조약에 응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곧바로 조각난 커피잔 같은 처지가 된 신성로마제국을 빗자루로 쓸어 담듯 공략하며 해체해버렸다. 1804년의 일이다. 이후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선포해 대륙을 봉쇄했다(여기서 ‘대륙봉쇄’는 대륙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봉쇄한다는 의미다). 이는 강대국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무릎을 꿇은 상황에서 대서양과 지중해에 이어 발트해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천재 전략가 나폴레옹이 단행한 해상봉쇄조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안이 봉쇄되면 커피도 봉쇄된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커피를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식용음료로 군대에 커피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대량의 커피를 보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자신의 명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군대에 막대한 양의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대단한 추진력과 실행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 여러 분야의 발명과 기술 개발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독특한 음료 커피는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바꾸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18세기 ‘산업혁명’ 하면 영국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당대 프랑스의 발전상과 기여도는 영국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한 노력이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 산업 구조를 혁명적으로 뒤바꿔놓는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루이 14세에게 바친 커피나무 한 그루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18세기, 네덜란드는 커피 재배에 관한 한 유럽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1706년, 암스테르담시는 자바에서 커피나무를 들여왔는데, 그 나무는 전 유럽에서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시에 부임해 있던 프랑스 영사는 암스테르담시와 오랫동안 교섭한 끝에 커피나무 한 그루를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1714년의 일이다. 그해 7월 29일, 마를리 성에 도착한 키 150센티미터의 튼튼하고 어린 커피나무는 왕립식물원 온실에 보내져 뿌리를 내렸고 왕성하게 개체 수를 늘려갔다. 가브리엘 드 클리외는 ‘루이 14세의 커피나무’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실현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해군대위 출신이었는데, 1721년 군복무 중 파리에 잠시 귀국했을 때 사람들이 대량으로 커피를 사고팔며 소비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커피는 네덜란드가 자국 식민지인 동인도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드 클리외의 머릿속을 섬광과도 같은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이름이 같다면 기후와 풍토에도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군복무했던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섬에서도 얼마든지 커피를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드 클리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담아둔 채 시간을 허비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신속하게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어느 지체 높은 부인을 연줄로 삼아 커피나무를 루이 14세에게 직접 가져다 바치는 역할을 맡았던 왕의 주치의 M. 드 시라크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결국 어린 커피나무 한 그루를 얻어냈다. 드 클리외는 그 커피나무를 소중히 지닌 채 낭트를 떠나 마르티니크로 향했다. 1723년의 일이다.

드 클리외는 소중한 커피나무를 햇빛을 잘 받도록 고안된 유리상자에 보관했다. 적도 부근에서 주로 서식하는 커피나무에게 햇빛은 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생장에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운반 도중 햇빛이 부족하다 싶으면 인공적으로 커피나무에 빛을 비추어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고는 해도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해는 멀고도 험했다. 그 과정에 드 클리외의 시대적 소명을 시샘한 어떤 승객이 유리상자를 훔쳐가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 연안에서는 튀니지 해적선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거센 풍랑에 휘말려 난파할 뻔한 일도 있었다.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드 클리외와 커피나무는 무사히 마르티니크에 도착했다.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으며 드 클리외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커피나무는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35년여 후인 1759년에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는 1,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수출했으며, 같은 해에 아이티ㆍ마르티니크ㆍ과달루페의 커피 수확량은 각각 7,000만, 1000만, 700만 킬로그램에 달했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한발 더 나아가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드 클리외에 의해 시작된 서인도제도산 프랑스 커피가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계의 커피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카이로의 거상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아이티ㆍ마르티니크ㆍ과달루페 커피는 마르세유를 거쳐 커피의 출발지 격인 서아시아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키 150센티미터의 어리고 튼튼한 ‘루이 14세의 커피나무’ 한 그루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한 가브리엘 드 클리외의 뚝심 있는 노력이 커피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커피하우스의 퇴장

커피는 원래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즐겨 마시던 음료였다. 그 독특한 ‘검은 음료’는 역설적이게도 17세기 유럽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들끓는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전 세계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의 커피는 바다 건너 영국에 ‘커피하우스’를 통해 전파되었다. 영국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때는 1652년이었다. 그 역사적인 커피하우스의 문을 활짝 연 이는 영국인이 아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파스카 로제였다. 그는 레반트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대니얼 에드워즈의 시종이었는데, 매일 아침 주인을 위해 커피를 끓이던 습관이 커피하우스 창업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지 30여 년 만인 1683년에 3,000여 곳, 1714년에는 8,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던 영국은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는 커피하우스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커피산업이 급성장하던 17세기 후반의 상황이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커피하우스는 영국이 맞닥뜨린 당대의 시대 상황ㆍ니즈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커피산업과 커피문화의 급성장으로 이어지며 시민의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런던 시민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던 커피하우스는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실제로 1714년에 8,000곳을 넘어섰던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1739년에는 551곳으로 줄었다는 통계가 발표될 정도였다. 한때 영원할 것처럼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영국 커피하우스의 열기는 왜 갑자기 시들해졌을까? 그리고 그 열기가 홍차와 티하우스로 옮겨 붙은 주요 원인은 뭘까? 우선, 영국 커피하우스가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점을 주요한 이유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흥미롭고도 인상적인 요인을 한 가지 더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애초에 영국 커피하우스가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며 탄생하고 성장했기에 결국 ‘여성 청원’ 등 거센 반발에 부닥치며 직격탄을 맞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의 커피와 커피하우스의 운명을 바꿔놓는 데 그치지 않고, 홍차를 매개로 한 중국과의 아편전쟁으로까지 비화하며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김수경 옮김. 사람과나무사이.18,000원.

 

 


이능화 기자  teac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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