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하여

간발의 차 백모단 정다인l승인202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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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국 문학의 큰 작가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떠나보낸다는 고통은 진부해보일지 몰라도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를 하나 들어보자. 차를 바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나면 갑자기 둘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걷거나 운전할 때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운전자들, 걷는 사람들, 차를 마시는 사람들, 아울러 말하자면 심장의 한 쪽 면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다른 한 쪽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잃어버리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 우리는 머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상실이란 언제나 유일무이한 것임을. 같은 것을 두 번 잃어버릴 수는 없음을. 그로 인해 얻게 될 수많은 감정들, 이야기들, 근거들, 재창조를 위한 소스들 모두를 합해보아야 잃기 전의 총량보다 더 적다는 것을.

소중한것에 대한 상실에 관하여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하루하루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시간을 잡아라’ 등 시간에 관한 여러 경구가 있다. 저 옛날 라틴어로 된 경구부터 오늘날의 소설 속 한 마디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세월을 주제로 한 말들이다. 이 주제들은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수많은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잃어버린다. 지갑은 예사요, 핸드폰에서부터 점점 더 크게는 가방도 잃어버리고 노트북도 잃어버린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들 중에서 가장 값지고 비싸고 큰 건 무엇인가? 무얼 잃고 가장 많이 상심했나? 상실이라는 주제에 관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택할 것이다. 최근 그가 낸 에세이에는 내가 사랑한 그 부분을 콕 집어내어 또 다른 깊이의 해석을 보여주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어리숙한 남자가 있고 그가 사랑한 여자는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남자는 우유부단하고 재미없던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되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가 죽는다. 몇 명이, 몇 가지를 잃어버린 걸까. 누가,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남자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는 생명을 버렸다. 남자는 사랑을 잃었다. 여자는 사랑을 버렸다. 남자는 미래의 기대를 잃었다. 여자는 미래의 기대를 버렸다. 남자는 시간에 등 돌리며 저 멀리 걸어간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걸음을 뗀다. 우리는 이 남자에게서 상실의 절절한 감정을 느낀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그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이다. 다만 이전까지는 몰랐을 뿐이다.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 상실의 순간이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결코 눈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떠나고 난 후에 찾아온다. 차를 바꾸고 난 뒤에는 그 전에 마시던 차 브랜드가 유독 눈에 잘 띄는 것이라고 말이다.

줄리언 반스는 몇 해 전 아내를 뇌종양으로 잃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아내인 팻 캐바나는 영국 최고의 문학 에이전트였으며 지금의 남편을 있게 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그녀가 죽기 30여 년 전 한 소설에서 나이 육십에 접어든 남자가 아내를 잃은 심정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죽은 아내 앨런을 생각하는 그는 은퇴한 의사이자 프랑스의 대문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생애 구석구석을 탐구하고 기록하려던 한 늙은 팬이다. 그 남자는 아내가 죽고 난 뒤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은 이미 죽은 지 백년도 더 된 어느 외국 작가에 대해 이해한 것 보다 아내를 더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아내의 장례식에서 읽었다. 시월의 눈이 내리는 가운데, 왼손은 아내의 관에 대고, 오른손은 아내에게 바친 그 책을 펼쳐들고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남자와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사랑을 했고, 다른 방식으로 아내를 잃었다. 하지만 순간 그가 느낀 당혹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매한가지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앵꼬부부였다는 사실과 반대로 그 역시 자신의 아내를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

저 위대한 영국의 작가를 흠모하는 까닭은 그가 차를 몹시도 사랑한 때문도 있지만, 상실 이후에 찾아오는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비탄의 과정 이후 생긴 빈자리를 무언가를 찾는 행위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그래서 지갑의 빈자리는 다른 지갑이 채우고, 사랑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운다. 하지만 상실의 참된 의미는 넓이에 있지 않다. 깊이에 있다. 그래서 비슷한 층위의 비슷한 것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그저 도미노와 같이 같은 높이의 같은 층위의 서로 다른 것일 따름이라면, 그저 하나 옆의 또 다른 하나이며 하나가 쓰러지고 곧 이어 쓰러질 또 다른 무언가에 불과하다면 어째서 그 기억 하나가 유독 의미 있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다는 것은 깊이의 문제다. 죽은 자를 땅 속에 간직하듯 상실은 그저 한 지점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깊이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꿈꾸거나 예측불가능 한 미래에 가 닿는 자리가 아닌 까닭으로 올라갈 일만 남은 높이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얼마나 아래로 내려가 닿을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깊이의 싸움만 남았을 뿐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가다보면 무엇이 나올까. 고통 뿐이다. 단테는 흠모하는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지옥과 연옥이 기다린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목격한다. 지옥에 내려간 최초의 인물이 단테는 아니었다. 훨씬 오래전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연인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용감히 지하 죽음의 세계로 내려갔다. 순수한 사랑의 목마름으로, 사랑에 미친 이 인간은 저 깊은 하데스의 세계를 여행하며 연인을 찾아 헤맸다. 단테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그저 택시에 놓고 내린 핸드폰을 찾아 나서는 사람의 얘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마주하게 될 고통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고통은 상실에 이야기라는 깊이를 만들고, 고통은 당신의 기억에 풍미를 더해준다. 만일 그 기억이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종류의 것이라면 그건 바로 당신이 저 천길 깊이로 길고, 칠흙 같이 어두운 지하 구덩이를 탐험하고 세상 밖으로 다시 기어 올라온 오르페우스며 단테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 다른 무언가로 대신하려 하지 말자. 그러기엔 우리의 추억들이 너무 아깝다. 오늘 차를 마시며 내가 한 생각이다.

백호은침과 백모단

백차白茶라는 종류의 차가 있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차의 어린 싹을, 비비거나 하는 가공을 거치지 않고 그저 그대로 건조시킨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시들어가는 이 아이들을 약발효 시켜 만든 차다. 중국 복건성 지방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르면 이들은 그늘에 말리는데 완성된 백차는 싹의 끝머리에 백호라 불리는 흰 털들이 여전히 송송하다. 희고 때로는 은빛처럼 보이기도 하는 광택으로 빛나며 향기가 매우 맑고 맛은 신선하다. 더 정확하게는 찻잎향이 강하게 나기보다는 그 모양새 때문인지 어린 버드나무 이파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지푸라기 향도 살짝 나는데 향이 깊게 배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공정의 과정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백차의 으뜸에 은침차, 걔 중에 백호은침을 둔다. 하지만 생산량이 워낙 적고 가격도 비싸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바로 백모단이다. 백모단은 일종의 혁신적인 차다. 전통적으로 은침차는 싹만을 사용해서 희귀하고 비싼 백차로 생산되지만, 1922년 이래로 같은 원료인 대백차나무 잎으로 만들되 애기 솜털 난 그 야들야들한 잎 뿐 아니라 아래에 매달린 두 세 개의 잎을 함께 따 넣어 만든 차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보다 대중적일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더러 백모단이란 어여쁜 이름을 붙여 부른다. 중국어로는 바이무단, 영어로는 화이트 피오니라고 한다. 봄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수확하는 이 백모단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소비한다고 한다. 갈증 해소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특히 덥게 먹는 차임에도 더운 지방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 아무래도 청아한 맛과 깔끔한 뒷맛 때문일 것이다. 우려내고 나면 미미한 노란색이 번지는 듯 색이 곱다. 볏짚 색깔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오래 우리면 떫은맛이 나기 때문에 주의하도록 한다. 은침차에 비해 더 풍부한 향과 진한 맛이 있다. 은침차가 더 비싸고 더 연하고 더 섬세하므로 백모단으로 백차를 시작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청아한 맛과 깔끔한 뒷맛이 일품

하얀 솜털을 이르는 이 백호白毫라는 단어 덕분에 이 차는 백차라 불리게 되었다. 사실 제대로 만든 백차, 다시 말해 무엇인가를 전혀 첨가하지도 않았고 발효도 길게 하지 않은 상태의 백차는 강한 맛이 나지도 깊은 색이 우러나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 큰 의미가 있다. 차는 본래 가공방식의 폭넓음으로 인해 맛과 향이 좌우되는 식품이다. 한 가지 찻잎을 가지고도 다양한 맛의 표현이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식물은 흔치 않다. 차의 맛을 좌우하는 과정 중 하나로 비비거나 밟는 공정이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찻잎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다. 통통하고 살이 오른 여린 찻잎에 여러 유형의 상처가 나면 그 안에서 끈끈한 액이 흘러 나온다. 마치 인간이 젊은 시절 겪는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들 사이에서 반성과 회한, 체념과 극복을 반복하며 성장해나가는 일과 같다. 그러나 백차는 그런 과정이 없다. 그저 태어난 태아 적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다. 상처 하나 없고 세상에 물드는 과정 한 번 없이 자연이 내려 준 본성 그대로를 뿜어내는 차다. 많은 이들이 백차의 으뜸이라 불리는 백호은침을 맛보고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언젠가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특별한 지식이 없거나, 경험이 일천하거나, 도구 등의 준비 상태가 좋지 않으면 맛을 보고 실망감을 금치 못하는 차라 불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백모단은 세상 물정 모두 겪으며 단단하게 성장한 인품의 차와 태고적 순수함 그대로를 가진 차 그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백모단은 잃어버리고 난 뒤에 찾아오는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다시 그 시절을 찾는 마음과 닮았다. 갖은 풍파를 겪으며 찾아온 시련을 후회 없이 뒤로 하고 나아가는 당참도 없고, 애초에 닥칠 일 없다는 듯 고고하지도 않은, 미련과 후회 덩어리의 우리 모습 같다. 적당히 때묻고, 적당히 순수한 우리는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 백모단을 찾는 이들이 다시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정다인  rollingt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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