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서는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최성민대표의 <한국 차 부흥을 위한 제언>에 대한 다양한 반론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한국 차 부흥을 위한 제언 7번째
녹차는 가라, “시절이 좋아 고려 황제차를 마시는 줄 알라”
‘녹차미인’ 녹차수도에서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 산화차라니
“보성은 <보성 녹차>로 잘 알려져 있다. 한때 녹차 중흥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잎차 유행의 큰 흐름 속에 녹차가 있지만 녹차는 오래 보관이 힘들고 맛의 차이가 심해 널리 보급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잎차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마시는 것은 발효차인 홍차다. 발효차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잎차뿐 아니라 덩이차 쪽으로도 소비자의 선택이 넓어지고 있다. 보성군도 이제 녹차 일변도에서 벗어나 차의 종류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보이차 붐은 후발효차인 덩이차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덩이차인 고도리 차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애용되었다. 보성 뇌원차는 청태전과 고도리 차 이전의 떡차로 고려 때에 있었던 우리의 가장 전통적인 차다. … 차별화의 포인트를 잡는다. 황제나 임금이 마시던 차를 시절이 좋아 지금 당신들이 마실 수 있다는 문화적 자긍심을 갖도록 한다(조석현·조기정·이주현·박금옥, 『국제차문화·산업연구총서7-고려 황제 공차 보성 뇌원차』, 학연문화사, 2020, 376-377쪽).
뇌원차 복원 연구용역을 맡은 일부 학자와 차 관계자들이 한국 녹차의 주산지이자 ‘녹차미인’ 쌀로 유명한 녹차수도 보성에서 한국 차의 대표 브랜드인 ‘보성 녹차’는 보관이 힘들고 맛에 문제가 있어서 널리 보급하기 힘드니 보이차와 같은 발효차류로 차의 종류를 다양화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귀를 의심할 노릇이다. 이 주장은 차에 관한 학술적 이론과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여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녹차 죽이기’를 부채질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녹차는 보이차처럼 티벳이나 몽골 등 채소가 귀한 먼 지역에 다량을 가져다 오래 쌓아놓고 곰팡이 끼여가며 음용하라는 차가 아니다. 오늘날 산차散茶인 녹차는 명대에 떡차나 덩이차류가 제다상의 문제 등으로 폐기되고 대안으로 나온 차로서 제다의 편이성 및 성분과 효능이 가장 탁월한 차로 판명된 ‘최선의 차’이다. 미국 『타임』 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수퍼푸드’에 산삼이나 보이차는 들어있지 않지만 녹차는 들어있다. 또 일본 차류는 거의 녹차류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도 차 생산·소비량의 65% 이상을 녹차가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보성 녹차’는 위 보고서에서 말한 “한때 중훙기의 산물”이 아닌 영구 지속가능한 최선의 차임이 분명한 것이다.
위 연구총서에서 뇌원차 차별화의 포인트로 “황제나 임금이 마시던 차를 시절이 좋아 지금 당신들이 마실 수 있다는 문화적 자긍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봉건시대적 계급성을 자극하여 뇌원차 홍보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반 문화적인 발상이다. 학술 연구보고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민주 시대의 바람직한 관·학(官·學) 협력의 자세에 걸맞지 않은 것이어서 옛 차 복원 작업의 무리함과 이론적 빈곤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폐차인 옛차를 복원하는 일은 당면한 전통 녹차의 위기를 가속화 시키는 것 외에 한국 차문화나 차산업을 위해 어떤 효과가 있는지 학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옛차들이 폐기된 이유로서 그것들이 오늘의 진화된 차에 비해 갖는 부정적 문제들이 학술적으로 판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차 복원에 참여한 일부 학자들이 이런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옛 차 복원의 유용성을 잘 살피고 분석하여 학구적 양심에 입각하여 그 장단점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20년 야생다원 조성과 수제차 제다 경력에 한국수양다도를 전공한 차인이자 차학인으로서 감히 말하고자 한다. 지금 복원 또는 재현했거나 하고자 하는 ‘옛 차’들은 박물관에 자료로 보관할 역사적 유물은 될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 음용할 차로서는 활용가치가 없어서 산업화나 상품화 또는 대중화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이 차들은 모두 당·송대(唐·宋代)에 만들었던 떡차餠茶류 또는 단차團茶류이다. 이 떡차와 단차류도 원래 녹차류였으나 한·중·일 삼국의 제다 발전과정에서 잎차로서 녹차류 및 산화·발효차류등 훨씬 진화된 품질의 차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 보고서에서는 떡차餠茶와 덩이차團茶, 산화차와 발효차의 구별을 혼동하고 있다. 홍차를 발효차라고 하고, 강산화와 발효의 과정을 겸하여 거친 보이차를 단순히 발효차로만 단정하여 마치 ‘발효차’가 대단한 차인 양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발효차의 성분이나 효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단지 뇌원차가 발효차라고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뇌원차는 제다 공정이나 차 색깔로 보아서 항암 및 면역력 증진 효능을 지닌 카테킨이 산화 소실된 산화차에 지나지 않는다.
뇌원차 복원 용역 보고서격인 『고려 공차 보성 뇌원차』에는 뇌원차 복원과 관련하여 차인이나 차학계가 가장 궁금해 할 사항이자 뇌원차 복원에서 한국 차문화사상 큰 의미를 지닐 수도 있는 뇌원차의 향, 색, 미(味) 등 ‘차의 3대요소’로서의 특장점이나 ‘차별성’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다. 대신 “뇌원차의 제법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중국 송대의 『북원별록』에 나오는) ‘북원 공차’의 제법을 기준으로 하고…”라고 했다. 또 “고려 뇌원차는 불로장생의 신묘(神妙)한 약이었다. 이런 훌륭한 뇌원차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고 “뇌원차를 탐색하는 것이 마치 맹인이 코끼리(象)를 만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고려 최고의 명차’이자 ‘불로장생의 신묘(神妙)한 약’이라면서도 그 제다법이나 차의 차별성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맹인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중국 송대의 북원 공차 제다를 기준으로 ‘추정’하여 ‘복원’했다고 하니, 이것은 복원이 아니라 ‘신제품 창조’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연고차인 ‘북원 공차’ 제다법을 따랐다면서 연고차 제다의 찻잎 진액을 짜내는 공정을 “뇌원차의 약성을 위해...” 생략했다고 한다. 차의 약성은 주로 카테킨의 효능을 말하는 것인데, 뇌원차와 같은 카테킨 산화에 의한 산화 떡차를 ‘발효차’라고 착각하고 ‘발효’라는 말에 의미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 학자라는 이들이 차의 주요 성분인 카테킨의 산화 및 테아닌의 발효 방지를 위해 산화차나 발효차가 아닌 녹차를 제다하는 이유를 몰랐을까? 그걸 몰랐다면 학문적 무지라고 해야 할지, 알면서도 복원작업을 했다면 학구적 도덕성의 문제라고 해야 할지 용어선택이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폐기된 차 옛 차 ‘복원’의 목적은 뭘까?
“고려 뇌원차를 오늘에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너무 까다로운 제법에 고려 때 다소민(茶所民)들도 힘든 노역에 도망을 칠 정도이니 오늘은 어떠할까? 가장 비슷한 송나라 북원공차도 사라진 이유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관의 지원이 없다면 민에서 상업성을 상실한 옛것을 상품화할 수 없다. 시스템을 만들고 계속된 지원할 태세를 갖춰놓지 않는다면 한번 복원하고 박물관에 전시할 수는 있으나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 … 고려 시대 뇌원차를 그대로 재현해 상품화하기 어렵고, 상업성이 없음은 거의 명백하다. … 보성 뇌원차가 산업화, 상품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보성군에서는 당연히 정책적으로 매년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 상업성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전통을 이어가는 목적이다.”(위 책 371-373쪽).
이는 옛 차 복원의 맹목적성과 불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즉 여러 문제로 인해 오래전 폐기되어 제다법이나 차의 특장점 또는 차별성에 대한 아무런 자료가 없고 상업성마저 상실한 옛 차를 굳이 왜 복원하느냐 하는 의문을 낳는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상업성 보다는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관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앞에서 본 “보성 녹차는 오래 보관하고 널리 보급하기가 힘드니 발효차류로 다양화하고 (그러기 위해) 뇌원차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하면 “보성 녹차를 상업성 없음 명백한 뇌원차로 대체하기 위해 계속 혈세를 퍼부어야 한다. 그것도 뇌원차의 대중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통 계승을 위해...”이 앞뒤 안 맞고 좌충우돌하는 ‘뇌원차 복원 연구용역 보고서’의 주장을 어찌할 것인가!
“보성 뇌원차가 산업화, 상품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보성군에서는 당연히 정책적으로 매년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 상업성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전통을 이어가는 목적이다.”라는 주장은 민간에서 하기 어려운 일이니 ‘전통 잇기’를 위해 관이 계속 지원금을 대어 해마다 뇌원차 복원 사업을 계속하게 해달라는 간청으로 들린다. “한번 복원하고 박물관에 전시할 수는 있으나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면 그렇게 하면 되지, 필요나 가치가 없는 일을 누구 좋으라고 해마다 귀중한 혈세를 쏟아부어가며 되풀이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 차학 및 차문화 발전이나 위기에 처한 차산업 부흥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폐차 복원을 지원한 보성군이 할 일이다.
뜬금없는 ‘고려 단차’ 및 고려청자 다기 복원
이전 글에서 이른바 ‘초의차’ 또는 ‘초의 다맥’ 계승자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 중 어떤 이는 ‘고려 단차’와 고려청자 다기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단차’ 복원 역시 근거삼을 만한 제다기록이 없어서 중국 기록을 참고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고려 단차의 성분이나 효능 또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것을 복원할 이유나 필요가 무엇인지 충분한 설명을 듣기 어렵다. 그가 복원했다고 보여주는 ‘고려 단차’ 역시 뇌원차류와 같은 (잎차를 덩이로 긴압한 ‘단차’와 구별되는) 떡차류이다. ‘초의차 계승자’로서 초제법(덖음 방식)으로 제다하는 잎차(산차)인 ‘초의차’를 선양宣揚하겠다는 사람이 증제 떡차가 좋으니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논리가 궁색할 터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다경』에 나와 있는 월주요 청자다기를 선호한 까닭, 즉 산화갈변된 증제 떡차의 차 탕색을 녹색 가까이 보이도록 했다는 점을 알면 초제(炒製) 잎차로서 녹색 차 탕색을 잘 유지하는 ‘초의차’를 청자 찻잔에 담는 일이 차학자 또는 차인으로서 얼마나 학술적 이론과 제다사의 논리에 맞지 않는 우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학문적 호기심 차원에서 저런 일을 할 수는 있다. 그것은 연구실에서 조용히 작업하여 학술적인 근거와 이유를 논문으로 발표할 일일지언정, 일반인 상대의 공개 퍼포먼스나 ‘알림 거리’로 내세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제다사와 차문화사를 시대역행시키고 일반 대중이 왜곡된 차 인식을 갖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계승’과 폐차 ‘복원’의 차이를 보여준 백운옥판차
‘복원’은 맥이 끊어진 것을 다시 원 모습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고, ‘계승’은 이어져온 맥을 더 진전시켜 후세가 또 시대에 맞는 문화양상으로 진화시키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복원은 ‘그대로’이니 고답적高踏的이라고 한다면 ‘계승’은 계속된 주요 ‘흐름’을 발전적으로 잇는 것이므로 여러 갈래의 흐름 중 정통正統을 시대적 조류에 걸맞게 하는 융통성을 갖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폐차가 아닌 가치 있는 옛 차 ‘계승’의 한 사례로서 강진 ‘백운옥판차’가 있다. 백운옥판차는 예전 ‘청태전’이 나던 곳에서 오늘날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이른바 ‘청태전 복원’과 대비시켜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백운옥판차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 삼증삼쇄 다산 차떡을 만든 맥을 이어받아 일제 강점기때 강진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 아랫 마을에서 한국 최초로 초제 잎차(산차)를 시장에 내놓아 차를 대중화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불굴한 한국 최초의 시판 대중적 잎차’라는 점에서 백운옥판차는 한국 제다사와 차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의미를 갖는 차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 전에 ‘청태전’이 나왔던 관련 기록이 있다. 『朝鮮의 茶와 禪』(모로오까 다모쓰·이에이리 가즈오 공저, 김명배 번역, 1991, 圖書出版 保林社) 260쪽에 있는 얘기다.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1939년 2월 23일 강진읍 목리 유대의(劉戴義) 씨 집에서 청태전을 마셨는데, “담박한 맛으로서, 특별히 다른 맛은 나지를 않았다”고 했다. 또 이튿날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리에 찾아가서 다산의 외척 후손인 윤재주(尹在周) 씨를 만나 청태전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청태전은 일명 병차(餠茶, 떡차)라 해서 작설을 딴 뒤의 잎으로 만든다. 품질이 나쁜 것이다. 4,5년 전까지 이 마을에서도 만들었다. 백 개쯤 새끼에 꿰어서 8전~10전에 팔고 있었다. (지금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작설차라고 한다)”.
즉 1939년경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던 만덕리 일대에서는 이미 청태전이 폐기되고 더 품질이 좋은 작설차(잎차)가 제다 생산되고 있었다. 이에이리 가즈오는 이런 내용을 ‘전라남도 해안지방의 청태전 탐색기’라는 표제로 소개하면서 “『다경』에 있는 당나라 차의 조사를 진행하여 일반에게 소개할 수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야릇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청태전이 ‘1천여 년 전 당나라 차’로서 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호기심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곳 다산초당 일대는 이미 1800년대 초 유배객 다산 선생의 지시에 의해 초제 우전 잎차와 삼증삼쇄 다산 차떡이라는 초·증제 제다법의 고급 녹차가 나던 곳이다. 1939년은 그로부터 백 여 년 후이니 ‘품질이 나쁜 청태전’이 없어지고 고급 녹차인 작설차가 난 것은 제다사 발전사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강진 월출산 아랫 마을에서 이어지고 있는 백운옥판차이다. “청태전은 일명 병차(餠茶)라 해서 작설을 딴 뒤의 잎으로 만든다. 품질이 나쁜 것이다. 지금 있는 것은 작설차다.”라는 당시 강진 사람들의 증언은 품질이 나쁜 떡차 대신 잎차(산차)인 작설차를 제다했다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볼 때 백운옥판차의 경우는 청태전이나 뇌원차와 같은 옛 차의 ‘복원’과 정통 차맥의 ‘계승’의 차이, 즉 폐차 복원의 허구성과 정통 계승의 가치를 단적으로 비교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성민- 철학박사.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생활예절·다도학과 ‘제다 및 심평’ 강의.
산절로야생다원 ·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