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첫번째 다산 차떡 제다도구.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첫번째 다산 차떡 제다도구.

한국 차 부흥을 위한 제언 6

‘초의차’는 실체인가, 몽상가들의 환상인가?

오늘날 한국 전통 제다법은 ‘덖음잎차 제다법’인 초배법(炒製法, 炒焙法)인 양 인식되고 있고, 그 초배법을 초의 선사가 창안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한국 전통 차의 대표는 초의 선사가 초배법으로 제다한 덖음 잎차인 ‘초의차’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른바 ‘초의차’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초의차’로써 농식품부로부터 ‘전통식품명인’ 타이틀을 얻은 승려가 있고 ‘초의차’ 상품도 있다. 초의차 관련 연구원이 있는가 하면 해마다 농식품부에서 거액을 지원받아 차행사를 여는 승려도 있는데, 그 역시 ‘초의차’와 오랜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초의의 다풍을 이었다는 승려로부터 ‘다도전게’를 받았다는 이도 있다. 또 경남 하동 악양 어떤 절에는 ‘초의차 6대 계승자’라는 간판도 붙어있다. 이 정도면 ‘초의차 계승자 연합회’라도 만들어 단합대회나 ‘초의차’ 계승 발전 방안에 대한 합동 학술심포지움 같은 행사를 여러 차례 열었음직하다. 그러나 오늘날 ‘초의차’가 말 그대로 ‘초의가 만든 차’로서 그 명성 만큼의 실체가 있었다면 이미 세상을 휩쓸어서 이땅에 보이차와 커피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다도전게를 받았다는...’이라고 한 것은 필자가 이전 글에서 “다도전게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라고 썼더니 당사자가 전화하여 ‘주장하는’이라는 표현이 기분나쁘다고 항의한 데 따른 것이다. 당사자들 생각엔 아무리 대단한 일일지라도 과거에 누구와 누구 사이에 무엇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사적인 일로서 당사자가 물증을 내보이며 그 내력을 주장하여 알려진 게 아닌가? 그것이 객관적으로 차문화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공론에 의한 검증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에 이땅에 전해진 명대(明代)의 제다법에 따라, 혹은 스스로 습득하여 누구나 할 수 있는 차 만들고 마시는 일이 어찌하여 오늘날 특정인들에 의한 독점적 계승 가치를 갖는지, 필자의 짧은 학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별 것 아닌 듯한 일이 논란을 빚고 이런 사족을 붙이게 되는 것은 ‘초의차’ 거론의 민감성 및 ‘초의차’가 지닌 허구성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거론하는 것 자체가 민감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편벽화 또는 성역화되어 있다는 의미일진대, 민주사회 특히 학계에서 성역화란 진정한 학문 발전을 위해 철폐되어야 마땅하다. 자연과학적 진리일지라도 절대불변은 없기 때문이다. 이 논란 관련 당사자나 ‘초의차’ 관계자들은 건강한 토론을 통한 한국 차문화 발전을 위해 ‘초의차’의 차별적 정체성 및 계승 가치에 대한 진술을 포함한 반론을 제시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한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두번째 삼증삼쇄하여 마른 찻잎을 곱게 갈아.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두번째 삼증삼쇄하여 마른 찻잎을 곱게 갈아.

‘초의차’ 이전에 있었던 선진적 전통 제다법들

본론에 앞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두에 말했듯이 한국 차계와 차학계에서 ‘초의차’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한국 제다사와 차문화사를 왜곡시키고 한국 전통 제다법과 차의 다양성을 축소시켜서 오늘날 한국 차문화와 차산업의 침체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아닌지 성찰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너도 나도 “초의차 계승자”라고 자처하여 나서면서도 ‘초의차’의 뛰어난 특성이 무엇인지, ‘초의 제다법’이 초의가 『동다송』에 소개한 명대의 초배법과 얼마나 다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런 모습이 과연 한국 차문화 산업 발전을 위해서나 진정한 차인 또는 차학자로서 바람직한가 말이다. ‘초의차’가 오늘날 실체적 정체성이 있는 차로서 전통 차의 모범이라면, ‘초의차’를 목놓아 외쳤던 ‘초의차’ 계승자들은 오늘날 한국 차가 처한 위기상황을 뭐라고 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이른바 ‘초의 제다법’이나 ‘초의차’ 보다 선진적인 제다법과 월등한 차가 ‘초의차’ 이전에 이미 있었지만 학계와 차인들의 무관심에 묻혀버렸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소개하여 차계와 차학계의 토론 주제로 발제하고자 한다.

이전 글(시리즈5)에서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말한 증배법을 소개했다. 그밖에도 한국 제다사에서 초의의 초배법 소개에 훨씬 앞서서 선진적이고 다양한 제다법과 차 종류가 있었다. 이운해가 『부풍향차보』에서 소개한 생배법 및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 창안해 만들도록 한 ‘다산 차떡’이 그것이다. 이 ‘다산 차떡’을 들어 ‘초의차’와 비교하는 것으로 한국 제다사와 차문화사의 왜곡된 그늘에 가리고 묻혀버린 한국 차와 제다의 창의성 및 다양성을 생각해 보자.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세번째 돌샘물로 이겨.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세번째 돌샘물로 이겨.

‘떡차餠茶' 아닌 ‘차떡’茶餠, 고급 녹차 ‘다산 차떡’(茶山 茶餠)의 창의성

우선 ‘다산 차떡’ 제다의 내력을 살펴보자. 유배에서 풀려 귀향한 다산은 1830년 강진 백운동 제자 이시헌에게 ‘다산 차떡’을 만들어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다. 초의를 포함한 사찰의 승려들이 제다를 모르던 이때 다산의 편지에는 ‘다산 차떡’ 제다의 꼼꼼하고 상세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실학자이자 과학자인 다산의 제다에 대한 학구적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1830년은 초의가 『만보전서』에 있는 『다록』의 요점(‘다경채요’)을 베껴 『다신전』을 낸 해이다. 초의는 다신전 발문에 “절에 조주풍(차 마시는 풍조)은 있으나 다도(차를 만들고 우리는 방법)를 모른다”고 했다. 당시 큰 절에서 차를 마시기는 했으나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니, ‘다산 차떡’ 제다의 한국 차문화사적 차산업적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다산 차떡 제다는 다산이 유배시절 유학을 가르친 초의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으로, 다산이 해배 후 강진에서의 제다 경험을 반추하고 ‘용원승설’ 등 중국의 연고차 제다를 참고하여 창안해 낸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다만 지난번 부친 차떡(茶餠)은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유동훈 박사는 논문 「다산 정약용의 고형차 연구」(차학회지, 2015년 1월)에서 ‘다산 차병’ 제다의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필자의 견해를 더하자면, 다산이 위 편지에서 분명히 ‘떡차餠茶’ 아닌 ‘차떡茶餠‘이라고 지칭한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다산 차병茶餠’은 청태전이나 뇌원차와 같은 ‘떡차’류, 즉 녹차에서 변질된 ‘산화차’류와는 제다법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차원이 다른 고급 녹차라고 할 수 있다. 즉 당나라 시절 녹차로서 만든 떡차류가 찻잎을 쪄서 찧어 덩어리를 만들어 건조시키는 과정에서 뜻밖에 산화되어 ‘쉰 녹차’로 변질돼 버린 것과는 건조 공정이 달랐다. 즉 나중에 떡(덩이)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먼저 바싹 말려서 가루내어 떡으로 만듦으로써 건조과정의 산화를 막아 철저하게 녹차의 장점을 지켜낸 최상급의 녹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차 담론을 주도해 온 학자들이나 차인들은 하나같이 ‘다산 차떡’을 ‘떡차’로 오인하여 ‘다산 차병’이 옛 떡차류와 같은 ‘쉰 산화차’인 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런 떡차류가 원래 녹차였으나 제다 공정상의 문제로 ‘쉰 내’가 나게 된 내력을 모르고 ‘발효차’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더 상세한 얘기는 시리즈 7편 ‘폐차廢茶 복원의 학문적 무지와 학구적 부도덕성’에서 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는 한국 차학자들이 다산 차떡을 일찍이 폐기된 떡차류와 구별을 못하고 있는 것이 차의 본질에 대해 얼마나 무지 무감각 몰상식 불성실한지, 학자로서 한국 차 위기의 본질적 문제 보다는 말초적 명리 추구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해두고자 한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네번째 떡으로 찍어내어.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네번째 떡으로 찍어내어.

다산 차떡과 연고차硏膏茶 제다의 내력

여기에서 ‘다산 차떡’의 우수성을 고찰하기 위해서 당~송대에 걸쳐 창안되어 진전된 연고차 제다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북송대 장순민이라는 사람이 쓴 『화만록』에 따르면 당대 말에 초기 연고차가 나왔는데, ‘제다법은 불에 쬐어 말리고 갈아서...’ 물에 괴어 떡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즉 제다 공정이 ‘증蒸→배焙→연硏(膏)→조다造茶’이다. 이것은 다산 차떡의 제다법과 거의 일치한다. 이 제다법은 차의 종류와 모양을 ‘떡차(餠茶)’에서 ‘차떡(茶餠)’으로 일대 혁신시킨 것이다. 여기서 ‘떡차 → 차떡’의 이행과정의 변수는 ‘도搗(절구에 찧다)’ 대신 ‘배焙(건조)-연고硏膏(가루로 빻다)’의 공정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젖은 찻잎을 절구에 빻아 떡을 만들었을 경우 속에 든 습기가 마르기 전에 산화변질돼 버리는 단점을 보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이 제다법과 다산차떡 제다법이 다른 것은 다산차떡에는 ‘배焙’의 방법으로 ‘삼증삼쇄三蒸三曬’ 방법이 들어간 것이다.

중기 연고차 제다법은 북송 휘종(1100~25)이 지은 『대관다론』에 나온다. ‘쪄서 누르고 말려서 갈아...’, 즉 ‘증蒸-압壓(膏)-건乾-연硏(膏)’였다. 여기서 누르는 과정이 들어간 것은 찻잎의 쓰고 강한 맛(카테킨 성분)을 제거하여 차탕을 흰색에 가깝게 내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잔존하는 카테킨(티폴리페놀) 성분을 짜냄으로써 산화갈변을 막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차를 건강기능성 보다는 별난 차탕색(흰색)으로 즐기기 위한 호사(好事)성 기호 경향이 가미된 듯하다. 즉 이때부터 차를 기호품으로 생각한 듯하다. 또 연고차의 완성품이라 할 수 있는 송대 후기 연고차 제다법은 남송 조여려(趙汝礪. 1186)가 쓴 『북원별록』에 나와 있다. 그 제다법은 ‘찐 뒤에 눌러서 진액을 짜내고 젖은 상태 그대로 갈아서...’, 즉 ‘증蒸 - 榨(자)- 연硏(膏)→조다造茶(차떡만들기)-과황過黃(말리기)’이다.

위와 같은 연고차 제다법 진전 과정을 두고 다산 차떡 제다법 및 그 효능을 살펴보자. 위에서 다산 차떡은 초기 연고차 제다법과 흡사하나 ‘삼증삼쇄’가 들어간 차이가 있다고 했다. 삼증삼쇄는 ‘세 번 찌고 세 번 햇볕에 말린다’는 말이다. 이는 초기 연고차가 중기 연고차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하고 쓴 맛을 제거하기 위해 눌러서 찻잎의 진액을 빼내는 과정의 효과를 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3증3쇄’로써 찻잎의 강한 기운을 덜어낸 것으로, 이는 다산이 초기 떡차(餠茶) 제다에서 ‘구증구포’로 썼던 방법을 완화시킨 것이다. 즉 찻잎을 짜내서 차의 좋은 성분을 대부분 유실시키는 단점을 막으면서도 너무 강한 기운은 덜어낸 것이다. 초기 연고차를 만든 이유는 찐 잎을 찧어 떡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건조 미흡으로 청태전이나 뇌원차와 같은 산화변질된 차가 되어버린 ‘떡차’의 단점을 보강하여 충분히 마른 잎을 미세하게 가루내어 물에 이겨서 떡을 만듦으로써 덩이차의 건조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가루차인 말차의 효시로서 음다법에 있어서는 ‘떡차’의 ‘전다법煎茶法’에서 ‘점다(點茶)법’을 사용한 후기 연고차로 이어졌다.

후기 연고차의 대표는 송대 당시 최고의 공납차인 ‘용원승설’이었다. 추사가 부친의 연경 사신길에 따라가서 대 서예가 완원에게서 얻어 마시고 그 차향에 반해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랬으니 추사에 앞서 살았던 다산 역시 실학자로서 용원승설을 접하고 충분히 연구했을 터이다. 떡차에서 차떡인 연고차로의 진전 과정은 아래와 같다.

*초기 연고차, (당) 貞元(당 9대 덕종 785~805)(『화만록』,북송. 장순민)

불에 쬐어 말리고 갈아서 → 茶山 茶餠(삼증삼쇄 추가)

*중기 연고차, 북송 휘종(1100~25)(『대관다론』)

쪄서 누르고 말려서 갈아(쓰고 강한 맛 제거, 흰색 가까운 차탕색.차의 기호화 조짐)

*후기 연고차(용봉단. 용단승설)(『북원별록』,남송 조여려趙汝礪. 1186)

찐 후에 눌러서 진액을 짜내고 젖은 상태 그대로 갈아서 만든다.

* 떡차(당) → 초기 연고차(당) → 중기 연고차(송) → 후기 연고차(송)

蒸→焙→硏(膏)→造茶 蒸-壓(膏)-乾-硏(膏) 蒸-榨(자)-硏(膏)→造茶(차떡만들기)-過黃(말리기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다섯번째 다시 말린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다섯번째 다시 말린다.

다산 ‘차떡’은 ‘일본 말차’의 원조가 아닐까?

우리는 다산 차떡 제다에서 세상 물정에 밝은 실사구시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다산이 차에 있어서 추구했던 핵심 사항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는 고품질 녹차, 즉 녹차의 특성을 잘 갖추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녹차였던 것이다. 이를 ‘차떡’으로 만든 것은 포장 및 운반의 편의상 최선의 방법이었고, 삼증삼쇄하여 말려서 가루를 낸 것은 지나치게 강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면서도 더 이상 산화변질되지 않도록 한 지혜의 발휘였다. 이는 후기 연고차가 진액을 거의 짜내어 ‘건강 수양 음료’로서의 차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과 비교되면서 오늘날 가루녹차인 말차의 원형이었음이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진액을 다 짜낸 송대의 연고차가 점다법과 함께 오늘날 일본 말차 다도로 이어진 게 아니라 찻잎의 진액과 녹색을 잘 유지하고 있는 다산 차떡이 일본 말차와 그 음다법인 점다법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관점에서 ‘초의차’가 떡차였나 잎차였나의 논쟁을 살펴보자. ‘초의차’에 대해 ’초의차‘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어떤 이는 ’초의차‘는 산차라고 강하게 주장한다(그는 산차와 잎차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앞에 나온 ’다산 정약용의 고형차 연구‘ 논문 저자인 유동훈 박사는 ’초의차‘는 떡차라고 주장한다. ‘초의차’가 산차라는 주장은 초의가 선진적인 산차를 제다하여 한국 차문화사의 주역이었음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고, ‘초의차’가 떡차였다는 주장에는 초의가 떡차를 만든 다산에게서 차를 배웠을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초의차’가 산차냐 떡차냐의 논쟁은 오로지 차의 형태에만 관점을 두고 있다는 허점이 있다. 우리가 차의 형태를 논할 때 놓쳐서 안될 것은 제다 발전사에서 차의 형태의 변화가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여야 한다. 그러나 위 두 주장은 ‘떡차(餠茶)와 덩이차(團茶), 잎차(葉茶)와 산차(散茶’의 구별에 있어서 혼동을 하고 있고, ‘떡차餠茶’와 ‘차떡茶餠’의 구별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논점의 의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여섯번째 다산차떡 완제품.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여섯번째 다산차떡 완제품.

떡차(餠茶)·단차(團茶), 잎차(葉茶)·산차(散茶), 떡차·차떡 혼동

후기 ‘초의차’는 잎차가 긴압된 단차(團茶)였다.

우선 초의차가 떡차였느냐 산차였느냐인데, 초기의 초의차는 떡차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1830년 자하 신위가 초의차에 대해서 쓴 ‘원몽사편圓夢四篇’에서 초의를 ‘전다박사煎茶博士’라고 부른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전다煎茶’라는 말은 차 내는 방법(음다법)인 ‘전다법煎茶法’에서 나온 말이다. 전다법은 당대(唐代)에 떡차를 불에 구어 가루내어 탕약처럼 달여 마시던 방법이다. 초의차가 산차라고 주장하는 이는 초의가 1837년에 명나라의 산차 제다법인 초제법을 소개한 「동다송」을 지었으므로, 그 이후에 만든 차는 산차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주장한다. 이는 ‘떡차(餠茶)와 덩이차(團茶), 잎차(葉茶)와 산차(散茶’의 구별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착각이다.

초의차에 대해서 쓴 두 편의 시에서 초의차가 잎차이면서 산차가 아닌 단차(덩이차)였음을 알 수 있다. 범해의 ‘초의차’에 “측백나무 상자에 둥글고 사각형으로 찍어(栢斗方圓印)/죽순 껍질로 포장했네(竹皮苞裏裁)”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엔 포장재로서 마땅한 종이가 없어 죽순으로 포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낱개로 각각인 몇 장의 죽순껍질로는 산차散茶를 포장할 수는 없다. 되(斗)처럼 짠 작은 측백나무 상자에 넣어 찍었다(印)는 것은 요즘의 보이차처럼 ‘잎차가 散茶로 흩어지지 않도록’ 긴압緊壓했다는 말이다. 잎차이지만 산차가 아닌 그 덩이차(團茶)의 겉을 죽순껍질로 쌌다는 말이다.

또 이유원의 「가오고략嘉梧藁略」 중 ‘죽로차’라는 시에는 “보림사는 강진 고을에 자리하고 있으니/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 선생께서/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싹을 골랐다네/.../대껍질로 포장해서 종이 표지 붙이니......./초의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백 번 천 번 끓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한 점 두 점 작설이 풀어져 보이누나”라고 했다. 여기서도 대껍질로 포장했다는 말이 나온다. 초의가 가져온 차가 떡차는 아닐지라도 단차(덩이차)였다는 말이다. 백 번 천 번 끓인다는 것은 煎茶法을 말하고, “한 점 두 점 작설이 풀어져 보인다”는 말은 긴압된 덩이로 뭉쳐져 있던 작설 잎차가 끓는 물에서 낱개로 풀어졌다는 말이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잔에 넣고 물을 부으면.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잔에 넣고 물을 부으면.

초의가 ‘온돌방에 말린 이유’로써 무너지는 ‘초의차’ 환타지

이처럼 ‘초의차’를 논하는 이들이 별 의미없는 초의차의 형태를 두고서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오늘날의 ‘초의차’란 실체가 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잘 말해준다. 초의는 『다신전』과 『동다송』에서 명대(明代)의 炒焙法을 소개했다. 그것은 첫솥에서 익히고 둘째 솥에서 말리는, 지극히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어떤 이는 초의가 제다 마지막 단계로 온돌방에서 말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도 지금 그렇게 한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초의가 왜 온돌방에서 말렸는지, 그렇게 하면 왜 좋은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초의가 그렇게 한 이유는 조선의 초의 앞에는 온돌방이 있었고, 초배법이 나온 명나라엔 온돌방이 없으나 둘째 솥에서, 또는 숯불 위에 재를 얹고 그 위에 차를 넣은 바구니를 얹은 정성스런 방법(烘焙)으로 충분히 말릴 수(焙) 있었기 때문이다. 炒製法을 炒焙法 蒸製法을 蒸焙法이라고도 한다. ‘덖어서(炒) 말리고(焙)’ ‘쪄서 말린다’는 의미이다. 초의가 『동다송』에 소개한 명대의 초배법炒焙法은 첫째 솥이 덖어 익히는(炒) 공정, 둘째 솥은 말리는(焙) 공정이다. 초의는 『동다송』 어디에서도 차를 온돌방에서 말려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온돌방은 건조가 미흡한 차를 더 말리기 위해 편의적 또는 임시방편으로 택한 보완책이지 ‘초의차’ 제다의 비법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초의가 온돌방건조 방식을 택한 이유를 초의 제다를 질책한 추사의 편지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도 보았지만, 추사는 1838년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번 차를 덖는 방법이 조금 지나쳐서 차의 정기가 사그라진 듯하네. 만약 다시 만든다면 불의 온도를 주의함이 어떨지(每炒法稍過 精氣有梢沈之意 若更再製 輒戒火候 如何如何 戊戌佛辰)”라고 했다. 차를 덖는(炒) 불길이 너무 세서 진향(녹향)으로 드러나는 다신(차의 정기)이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덖음방식인 초배법(炒焙法)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증배법(蒸焙法)엔 없는 문제이다.

추사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은 초의가 초배법을 소개한『다신전』을 쓴 지 8년 후의 일이다. 또『다신전』을 쓴 이후 7년 동안 초의 나름대로 숙련된 제다법(다도 포함)을 정리하여 『동다송』에 “採盡其妙 造盡其精(찻잎을 딸 때 찻잎에 든 신령한 기운을 잘 보전하고, 차를 덖을 때 찻잎의 그 정기를 잘 간수하여)...”이라고 제다법의 진수를 밝힌 지 1년 후의 일이다. 10년 가까이 갈고 닦은 초배법인데도 불을 너무 세게 하여 정기를 날려버렸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때 추사가 맛본 ‘초의차’는 요즘 여느 사찰의 차처럼 둘째 솥안의 센 불기운에 너무 노출되어 다갈색에 고소한 맛(누룽지맛)이 나는 보리차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추사는 부친의 연경 사신길에 따라가 대 서예가 완원으로부터 최고의 연고차(硏膏茶)인 ‘용원승설’을 얻어마시고 그 맛과 향에 반해 호를 ‘승설도인’이라고 지은 바 있다. 연고차는 찻잎의 강한 기운을 덜어내기 위해 제다공정에서 진액을 짜내 차탕색과 거품이 흰색에 가깝도록 제다한 차다. 그렇게 기운을 완화시킨 차에 길들여진 추사의 혀인데도 ‘초의차’가 “정기가 사라진” 것으로 느껴졌을 정도이니, 이때 ‘초의차’는 센 불길에 볶아져서 차로서 향과 맛이 거의 사라진 (연고차 보다 연한) 차가 아니었을까? 초의는 추사의 질책 이후 초배법상 둘째 솥의 ‘건조과정’에 지나치게 유의한 나머지 찻잎의 수분을 완벽하게 날려보내지 못하여 그 보완책으로 온돌방에 널어 말렸을 것이다. 이런 합리적 의심과 추정 외에 초의의 온돌방 방식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혹자가 초의의 온돌방 방식을 강조만 할 뿐 그 까닭을 별다르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은 초의에 앞서 증배법을 소개하고 증배제다를 했던 이덕리와 다산이 한국 제다사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사항이 있다. 초의는 『동다송』 제27, 28행에서 “誰知自饒眞色香 一經點染失眞性(누가 차의 참된 빛깔과 향기가 스스로 풍족함을 알겠는가? 한번 더럽혀지면 참된 본성을 잃어버리네)”라고 하여 차의 색과 향을 오염되어서는 안 될 차의 본성으로 규정하였다. 즉 차는 향과 색이 정갈해야 한다. 이처럼 차의 순수한 향을 강조한 초의가 잡내 습입 없이 정갈해야 할 찻잎을 온돌방에 말렸다는 것은 정도(正道)도 아니고 위생적이라 할 수도 없다. 요즘 제다인들은 마지막 건조 공정을 ‘마무리’라 하여 일관되게 같은 솥안에서 진행한다. 초의는 당시 사정상 부득이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했을망정 오늘날의 사정이나 환경상 제다 공정에서 온돌방을 쓴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제다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자유와 책임이겠으나, 제다 원리에 맞지 않는 일을 공적인 자리에서 강변하며 내세우는 것이 자칫 한국 제다사와 차문화사를 왜곡시키는 데 기여하지나 않을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여덟번째 물을 부으면 죽처럼 풀어지는 모습.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여덟번째 물을 부으면 죽처럼 풀어지는 모습.

‘초의차’ 제다법을 ‘초의 제다법’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

‘초의차’ 제다법을 ‘초의 제다법’ 또는 ‘동다송 제다법’이라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동다송』이나 『다신전』에 소개되고 원전인 명대 장원의 『다록』에 최초로 나오는 덖음제다법(초배법)을 ‘명나라 제다법’이나 ‘장원 제다법’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초의가 만든 차의 마땅한 이름이 없는 실정에서 범해가 시에서 ‘초의차’라고 한 것은 “초의가 (『동다송』에 소개한 명대의 초배법에 따라) 만든 차”라는 의미이지 초의가 초배법을 창안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초의차’ 다풍을 계승했다는 ⊕⊖⊗씨가 자신이 만든 차의 이름을 차마 ‘초의차’라고 하지 않고 ‘⊖⊗차’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이겠다. 요즘 ‘초의차’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초의차’ 제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임을 방증하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오늘날 덖음차 만드는 이들이 누구에게 배워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밥하는 일이 누구나 자연적으로 터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자가학습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은 ‘대중지성大衆知性’ 또는 집단지성의 원리를 유가에서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 했다. 벌교 낙안읍성 위쪽 금둔사 지허스님의 차 이름이 ‘천강월잎차千江月葉茶’인 것은 불가쪽의 ‘이일분수’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하나인 원리(月)가 저절로 여러 곳(千江)에 같되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分殊) 비추이며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아홉번째 죽처럼 풀어진 다산차떡 차탕(죽).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의 다산 차떡 제다 공정- 아홉번째 죽처럼 풀어진 다산차떡 차탕(죽).

지금까지 ‘초의차 환타지’를 예로써 한국 차계와 차학계에서 실체가 없는 환상을 두고 벌이는 근거 불투명의 탁상공론이 한국 차문화사와 제다사 및 전통차의 진면목을 왜곡시키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 차가 처해있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국 차학계와 차계가 본말을 구별하여 한시 바삐 부질없는 명예와 말초적 명리 좇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한국 차인과 차 학자들이 초의가 말한 ‘무사無邪’의 차정신에 부응하여 거듭나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성민-철학박사.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생활예절·다도학과 ‘제다 및 심평’ 강의.

산절로야생다원 ·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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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민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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