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에서 선승으로 깊은 존경을 받는 당나라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 스님은 청빈정결한 삶의 모범을 보이고 주옥같은 선어(禪語)를 많이 남겼다.
불교사에서 선승으로 깊은 존경을 받는 당나라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 스님은 청빈정결한 삶의 모범을 보이고 주옥같은 선어(禪語)를 많이 남겼다.

한국 차 부흥을 위한 제언 3

불교사에서 선승으로 깊은 존경을 받는 당나라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 스님은 청빈정결한 삶의 모범을 보이고 주옥같은 선어(禪語)를 많이 남겼다. 어느날 제자가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無)!” ... 이런 황당한 대답이, 전에는 “있다(有)!”고 하셨고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어느날 두 운수납자가 조주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이 물었다. “전에 이 절에 와본(來) 적이 있는가?” 한 납자는 절에 와본 적이 있다(有)고 했고 다른 납자는 없다(無)고 대답했다.

“끽다거(喫茶去)!” “끽다거(喫茶去)!”... 이를 옆에서 지켜본 원주(절에서 장보기 등 살림살이 담당 소임)가 “왜 스님께서는 와본 적 있다고 하는 쪽이나 없다고 하는 쪽 모두에게 끽다거라고 하십니까?” “원주 그대도 끽다거!!” ???......

오늘날 “무!”와 “끽다거!”는 유무중도(有無中道. 붓다가 취한 유·무 양 극단을 초월·지양한 제3의 선택)를 표방하는 언구(言句)로서 불가와 차계에서 각각 참선의 화두(話頭)와 다도수양의 지침 역할을 하고 있다. 각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고 가장 정확한 뜻은 그 말씀을 하신 조주스님만 알 뿐이지만, 화두는 참선에 있어서 일체의 잡념을 제거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기능을 하는 것이므로, “무!”는 개에 불성이 있느니(有) 없느니(無) 따지자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이의 마음(정신상태 또는 신경회로)을 ‘멍때리기’ 상태에 들게 하는 것이다.

“끽다거!”에 대해서 한국 차인들은 “차 한 잔 마시고 가!” 또는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점잖게 해석하면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으니, 이 역시 화두의 속성상 아무런 논리적 의미가 없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사고(思考)를 막는 언어도단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즉 전에 와본 적이 있느니 없느니 견주고 따지는 따위 분별심은 공(空)이고 허망한 것이니 차를 마시면서 그딴 생각 등 잡념을 씻고 본디 마음(아뢰야식)으로 세상을 여실(如實)하게 보는 명상수양(행)에 잠겨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제다와 수양론적 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차의 속성을 두고 생각하면 “끽다거”는 그저 언어도단의 방편에만 그치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차는 ‘유·무(有無), 상·단(常斷), 일·이(一異), 래·거(來去)’ 등 독립된 실재의 주체성을 나타내는 술어는 성립될 수 없다는 ‘팔불중도‘(八不中道 :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去)의 의미를, 즉 유식불교의 ‘공(空)’사상을 일깨워주는 원리를 단 한 마디로 설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현대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차에는 뇌파를 분별심 가득한 알파파에서 생멸 등에 관한 허상 등 잡념을 단박에 물리쳐 명상상태의 베타파로 가라앉혀 주는 효능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끽다거!를 “차나 마시고 가라” 보다는 “닥치고 차나 마셔!” 정도로 풀이하는 게 문맥에 부합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 “끽다거!”야말로 차의 정체성과 장점을 부각시켜 ‘차의 대중화’를 선도함으로써 불교가 차문화의 중심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끽다거!”의 의미 및 차와 불가 수행의 불가분의 관계는 조주스님의 공안(公案)을 12개나 싣고 있는 『벽암록』을 쓴 송대 원오극근(1063~1135) 선사의 ‘다선일미’라는 말에서 극명해 진다. 선사는 당시 송나라에 유학왔던 일본 승려에게 일종의 학업수료증으로써 묵적에 이 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후 이 묵적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다도 다회때 일본 다도정신의 표상 역할을 해오고 있다. ‘다선일미’의 뜻은 ‘차의 맛과 선의 맛은 같다’라는 것이니 차가 지닌 깨달음 지향의 속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차는 어디까지나 수양의 효능을 발휘하는 속성을 잘 보전해 지닌 녹차(綠茶)를 가리킨다.

‘초의차’ 계승자라는 응송스님으로부터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한국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그 근거로는 선종은 참선을 중요시하고 중국 선종이 참선할 때 차를 활용했으므로 신라말 구산선문 개창시 차가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공식 자료인 『삼국사기』는 신라때 차가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해 “선덕여왕 2년(828년) 중국에 갔던 사신 대렴이 차씨앗을 들여와 지리산 남쪽(화개 쌍계사 또는 구례 화엄사 입구)에 심었다.”라고 적고 있다. 박소장은 또 화엄사는 교종 계통이어서 차와 관계가 멀다고 주장한다. 박소장의 주장에 따르자면 화엄사 입구 한화호텔 아래에 한국차의 시배지로 조성해 놓은 장죽전 차밭은 허구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초의스님이 <다신전> 발문에서 “불가에 조주풍이 있으나 다도는 모른다”고 했듯이, 한국 불교 승려들 가운데 선승들만이 선방에서 꼭 참선을 위해 차를 마신 것은 아니므로 선·교를 구분하여 차와의 관련성을 말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차학계 한쪽에서는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한국 불가의 차문화가 조선조의 숭유억불책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경제력이 약해지면서 쇠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다신전』을 엮으면서 쓴 위 발문(跋文)에는 “절에 조주 다풍이 있으나 (승려들이) 다도를 알지 못해 (만보전서에 발췌돼 있는 명대 장원의 『다록』의) ‘차 만드는 법’ 등을) 베껴 적는다”고 했다. 즉 조선 후기 사찰에 차를 마시는 풍조는 있었으나 승려들이 차를 만드는 방법 등 다도를 알지 못했기에 『다록』의 주요 관련 내용을 『다신전』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다시 엮었다는 것이다.

간추리자면, 차는 수양(수행) 기능을 띤 속성상 불가의 참선에 도반이 되어왔으며, 녹차의 그러한 속성과 기능은 일본 다도정신의 핵심요소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신라때 구산선문 개창과 더불어 차가 들어와 불교가 차문화의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침체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식 기록상 차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에 의해서다. 그러나 언제 어떤 신분이 차를 들여왔느냐 보다는 과연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었느냐가 한국 차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위에 업급한 것처럼 초의선사의 『다신전』 발문이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승려들이 다도(차를 만들고 내는 제다 및 탕법과 차의 수양기능)를 모른다”는 말은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인한 사찰의 경제력 피폐로 불가의 차문화가 위축되었다”는 주장의 설득력을 덜어낸다. 절에 땅이 좁고 중들이 없었다면 몰라도, 차나무를 기를만한 100평 안팎의 땅에 너댓 명의 인력만 있어도 왠만한 절 일년 차농사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전국 명산 국립공원 안에 불교가 드넓고 기름진 사찰림을 차지하고 있고 승려수도 적지 않은 좋은 조건임을 감안할 때, 한국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 되는 일은 차문화와 같은 핵심적 전통문화에 대해 불교계가 얼마나 진솔한 관심과 주도적 의지를 갖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되돌려 생각해 보자면, 불교의 차문화 쇠퇴는 사원의 경제력 위축 때문이 아니라, 초의선사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원과 승려들 사이에 애초에 제다 등 핵심적인 차문화 내용에 관해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즉 당시 승려들이 직접 차를 제다함으로써 깨달은 차의 속성을 참선에 활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차문화의 본질에 가까이 가고자 하고 이를 계발하여 진전시키는 역할 보다는 주로 민간에서 만든 차를 들여와 단순히 습관적으로 마시기만 했던 게 아닐까? “제다가 차문화의 핵심”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에는 제다가 차의 속성을 파악하여 수행의 도반으로 삼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첩경이라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원에서 커피와 보이차가 저항없이 득세하고 있는 모습은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큰 사찰들에 커피자판기가 들어가 있거나, 객(客)들에게 보이차를 내주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난 가을 지리산 깊은 골짜기 한 젊은 스님이 홀로 고생하며 수행하는 토굴에 갔다가 그 스님으로부터 직접 원두를 갈아서 타주는 커피를 마신 일이 있었다. 또 어느날 다른 토굴 방문에서는 조주선사 초상화 앞에서 암주가 보이차를 내주기도 했다. 속진(俗塵)과 먼 청정 산중에서 도심의 문화나 티벳이나 몽골 사람들이 마시는 차를 만난다는 게 이채롭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커피와 보이차의 한국 전통 차문화 잠식’의 마당이 돼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불교가 한국 차문화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라기 보다는 한국 불교에서 마땅히 차를 중시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차문화를 진전시켰어야 한다는 당위성 또는 앞으로 그래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최성민(철학박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생활예절·다도학과 교수. 산절로야생다원·사단법인 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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