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중시한 소론의 영수 최석정.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시대, 조선 후기 숙종 시기다. 온건하고 타협적인 정치, 현실적인 정책을 추구했던 소론의 영수 최석정. 치열하게 대립하던 당쟁의 시대 숙종이 가장 신임했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성리학을 벗어나 역학과 수학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다. 그는 <구수략>을 통해 주역의 괘를 바탕으로 한 상수학적 이해, 마방진 연구, 무한대와 무한소의 개념을 선보였다. 더욱이 조부인 최명길의 영향으로 양명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보였으며 서학西學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했다. 시폐 10조목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한 내용은 직관職官의 효율적인 운영, 선거選擧 제도의 개선, 전결田結의 총수 조사와 합리적인 부세賦稅 부과, 필요 없는 군문軍門의 혁파 즉 이웃이나 친족이 군역을 지게 되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인징, 족징의 폐단을 언급하고 있다.

위의 시는 <명곡집明谷集> 4권 '초평록草坪錄'에 자리하고 있다. '초평록草坪錄'은 1691년 가을 진천鎭川 초평草坪에 초옥草屋을 짓고 우거할 때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처형을 반대해 유배되었던 곳이다.

시는 이듬해 봄을 맞아 수촌에서 유태에게 보낸 시인(却寄水村 -수촌에서 쉬며 부치다.) 것이다. 시에서 유추할 수 있듯 화자의 일상생활이 눈앞에 고스란히 다가온다. 마치 생동감이 바로 전해지는 듯하다. 호수 위에 청산, 방문이나 마루에 처진 발을 통해 소나무나 그 사이에 비추는 달도 보인다. 시를 쓰지 않아도 자연이 보여주고 있는 한 편의 시다. 때론 봄잠에 일어나 차를 달여 마시고, 나물 안주 삼아 마시는 술 또한 모든 근심 덜어주는 일상생활의 동반자인 것이다. 이 참 맛을 예전에는 어찌 몰랐을까. 이제야 그 맛을 알았으니 그 무엇이 부럽단 말인가. 이 즐거움을 먼저 누렸던 유태에게 은근히 책망하듯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태도 이 집에서 기거했을 것이라 추정되어진다. 한편으론 오랜 정치 생활에 찌들었던 자신의 삶. 이곳 생활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운전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동차를 운전한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다. 일단 이단, 중립 후진, 양 옆이며 머리 위에 달린 거울도 본다. 상황에 따라 양보하며 자신 마음대로 자동차를 움직인다.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는 자신이라는 존재는 어찌 하고 있는가. 주체할 수 없는 질주 본능의 화신이다. 자동차를 마음대로 운전하듯 자신을 운전해보시라. 한 걸음 물러나 길 바란다. 영원한 전진은 있을 수 없다. 때론 후진도 하기 바란다.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한다.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여행도 떠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자신을 양보하라. 커피든 홍차든,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자신 삶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아라. 모든 것이 즐거움과 함께 편안해 질 것이다. 차를 마시던 노老 정객政客이 자연 속에서 한 편의 시를 시청하듯.

글 이능화

 

次水村柳台贈文伯韻
崔錫鼎

閉門非著子雲書
湖上靑山畫不如
滿塢茶煙春睡後
一簾松月夜吟餘
消憂缸面開新釀
當肉盤中薦晩蔬
此樂君應先我識
從前恨未卜隣居

수촌에서 유태가 보내준 글에 차운하며
최석정

문 닫고서 신선의 글 쓰지 않아도
호수 위의 청산은 뜻밖의 그림이라네
봄 잠 깨면 언덕 가득 차 연기 일고
발에 걸린 소나무 사이 달 보며 시 읆는다네
근심 지우려 새 술항아리 뚜껑 열고
상 위에 올린 나물들 고기 못지 않다네
그대 응당 나 먼저 이 즐거움 알았으니
이전부터 이웃에 살지 못한 것 한스럽네

 

최석정 崔錫鼎1646 ~ 1715

조선의 정치가. 호는 명곡明谷ㆍ존와存窩, 시호는 문정文貞. 1671년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ㆍ봉교奉敎ㆍ교리校理를 역임, 1685년(숙종 11)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증尹拯을 변호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논척論斥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1687년 선기옥형(璿璣玉衡 : 혼천의(渾天儀)을 수리修理하는 데 참여, 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이조 판서를 지내고 1697년(숙종 23) 우의정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노론老論ㆍ소론少論의 당쟁 속에서 소론의 영수領袖로 많은 파란을 겪으며 전후 여덟 번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당시 배척을 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으며,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명곡집(明谷集 34권 15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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