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다도(dado, 중국과 일본은 차도)에서 제다製茶 항목은 찻감의 품성을 파악하는 전다煎茶의 중요한 일이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전통 제다법을 고찰하기 전에 주의할 점은, 부賦나 한시漢詩는 일반적으로 평측과 운율을 맞추어 글자를 짓기 때문에, ‘茶’ 대신 ‘茗’이나 ‘荈’도 썼고, ‘찻감 이름과 차싹을 혼용했으며, 한자의 앞뒤를 바꿔 쓰기도 했으므로 일의 내용과 순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가 아닌 다공문茶供文과 편지가 중시되며, 글의 제목과 서문이나 세주細註도 확인해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쓰는 ‘볶다, 덖다, 시들리다’, ‘햇볕이나 그늘에 말리다’ 등에 대한 한자가 애매하다. 흔히 쓰였던 ‘焙’의 뜻은 육우 󰡔다경󰡕에서 제다의 마지막 건조하는 방법으로 불(기운)을 직접 쬐지만, 솥 안이나 부뚜막, 온돌방에서 건조시켜도 ‘焙’를 쓸 수 있다.

경세와 실학의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부터 17년 반 동안 지천에 차가 자라는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다공학자茶供學者가 되었고 다도의 대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 다서의 탐구뿐 아니라 강진 곡우의 산차와 병단차, 그리고 입하의 산차와 병차를 ‘찌기’와 찌지 않고 ‘시들리기’ 등으로 다양하게 실험하였다. 제다 용어를 살펴보면, 다산은 「다신계」에서 곡우엽차를 ‘焙’한다고 했는데, 이는 ‘炒(콩이나 쌀을 볶음)’와 다르다. 장원의 󰡔다록󰡕에서는 솥 안에서 차싹을 익히면서 덖는 것을 ‘炒’라 하고 비빈 후 솥 안에서 하는 마지막 건조는 ‘焙乾’이라 했다. ‘쇄晒’는 볕天의 열기에 쬐는 것이며 딴 찻잎을 시들리고 말리는 과정이다. ‘蒸’은 시루에 찌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를 엽차에 적용하여 ‘덖는다’고 해석함은 잘못이다. ‘포’라고도 읽히는 ‘폭曝’은 ‘曝書(책을 햇볕에 쬠)’와 같이 햇볕에 말리는 것을 말하는데, 홍삼, 숙지황과 같은 한약재를 제조할 때 여러 번 찌고 볕에 말리기를 반복하면 약효가 더욱 많아지므로, ‘九蒸九曝’를 대중적으로 흔히 ‘구증구포’라 하였는데 반드시 아홉 번이 아니라 약 재료를 만들 듯이 정성 들여 여러 번 찌고 말렸다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은 21세에 검단산黔丹山 북쪽에 있는 백아곡의 햇차가 ‘깃발싹旗’을 펼치기 시작하여 그곳 마을사람에게서 한 포包를 겨우 얻었다고 한 글이 있는데 그가 일찍부터 차나무 작설과 제다에 관심이 컸음을 나타낸다. 즉, 그가 “鴉谷新茶展旗”라 하고 세주를 달기를, “白鴉谷在黔丹山北 産雀舌茶.(백아곡은 검단산 북쪽에 있고 작설차가 난다.)”라고 한 내용이다. 검단산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산’이라고 본문의 협주에 썼으므로 당시에 기후가 따뜻하여 누군가 경기도 골짜기에 차나무를 재배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眞茗茶’인 찻감 만들기의 ‘제다製茶’는 찻잎을 따는 채다採茶부터 시작된다. 다산은 차를 딸 때를 ‘槍’과 ‘旗’가 돋아날 때, 또는 동백이 질 때, 그리고 곡우와 입하 사이로 보았다. 이는 오늘날 강진의 제다시기보다 조금 빠르거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은 강진에 와서 많은 차나무가 자연 그대로 자라는 것을 보았고 음다생활을 이어가다가, ‘다산의 초당’으로 자리를 잡은 후에 손수 제다하고 또한 가르쳤음을 「다신계」와 혜장에게 쓴 글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초당이 있는 ‘茶山’은 당시에 이미 골짝기마다 차가 있었고 일만 그루의 차나무가 가득 차 있다고 했다.

다산과 초의의 제다법은 이전까지 전해진 조선의 민간제다법인 녹차와 병단차 제다법과 더불어, 책으로 익히 잘 알고 있던 육우의 병차와 명나라 장원이 쓴 󰡔다록󰡕의 엽산차葉散茶 제다를 참작했을 것이다. 다산이 57세에 강진을 떠나오며 그가 「다신계」에 쓴 곡우엽차와 입하 떡차는, 자신이 없을 때 제자들과 강진백성들이 보편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제다법을 뜻한다. 이 제다법을 본고에서는 편의상 ‘1차 다산제다법’이라 칭하고자 한다.

한국차문화연구소 소장. 철학박사 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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