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의 ‘숨은 밭골’은 현 봇재골, 봇골에 숨어 있는 밭 골짜기다. 현재도 차를 재배하고 있다. ‘숨은 밭골’은 은전곡隱田谷, 밭이 생략된 ‘숨은 골’은 ‘은곡隱谷이다. 봇재골에 이 명칭을 딴 은곡(隱谷) 다원이 있고 판매장은 바로 위 봇재에 있다. 그리고 양동 숨은 밭골의 자생 차는 고려 시대 포곡 다소의 흔적이다.
양동의 ‘숨은 밭골’은 현 봇재골, 봇골에 숨어 있는 밭 골짜기다. 현재도 차를 재배하고 있다. ‘숨은 밭골’은 은전곡隱田谷, 밭이 생략된 ‘숨은 골’은 ‘은곡隱谷이다. 봇재골에 이 명칭을 딴 은곡(隱谷) 다원이 있고 판매장은 바로 위 봇재에 있다. 그리고 양동 숨은 밭골의 자생 차는 고려 시대 포곡 다소의 흔적이다.

가을평 다소(뇌원차 원산지) - 931년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가을평소는 장흥도호부의 동쪽 31리(12.4km)에 있다고 한다. (加乙坪所 在府東三十一里) <그림6>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갈평다소(乫坪茶所)로 동 30리로 나온다. (乫坪所 東三十)<그림7> ‘가을(加乙)’, ‘갈(乫)’ 은 ‘갈(대)’를 한자로 쓴 것이다. 이 용반천 주위가 지금도 갈대가 아주 많다.

고려 때 가을평 다소의 중심지 제다소製茶所, 동 31리(12.4km)의 정확한 지점은 ‘약찌미뻔덕지’로부터 동쪽 777m 떨어진 ‘비서리밭등嶝’이다. (대동지지를 기준으로 하면 동30리 동고지등東顧枝嶝에 있는 동고지 마을이다.) 신라의 가을전 차향과 차를 만드는 향민鄕民이 있고, 갈밭차가 나는 ‘비사리밭들’이 있었기에, 고려 초기에 바로 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 다소민茶所民은 여전히 ‘약찌미뻔덕지’의 차향민茶鄕民이 담당하거나 기술적인 지원을 했을 것이다. 고려를 대표하는 궁중 차는 뇌원차腦原茶다. 성종 때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므로 다소도 직접 파견, 관리하여 뇌원차를 공납하였을 것이다. 뇌원차는 특이하게 각(角)의 단위로 센다. 각角은 각角설탕의 예와 같이 사각四角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네모꼴 떡차餠茶로 보았다. 1846년 고려의 절 가야사 5층 석탑 출토의 4각의 차를 이상적(1803-1865)은 송宋 1120년, 정가간鄭可簡이 만든 용단승설龍團勝雪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송 단차는 이름이 용단승설이 아니고 용원승설龍園勝雪이다. 가야사 차는 1치(2.358cm)이고, 용단승설은 1치 2푼(2.830cm)으로 크기도 다르다. 송의 용원승설에는 승설勝雪이라는 글씨가 없고 가야사 차는 승설勝雪이라는 글씨가 있다. 1120년 이후에, 4각의 뇌원차에 중국의 승설을 본 따 만든 뇌원차 종류라고 생각한다. 가야사 차 무게는 필자가 생각하는 뇌원차 1돈(3.75g)과 비슷한 1.2돈(4.52g) 정도다. 중국의 화폐단위 1각角은 0.1원元. 은화나 동전 1각의 무게는 1돈[전錢]으로 3.75g. 이 화폐단위를 그대로 화폐보다 더 귀중한 뇌원차의 단위로 쓴 것 같다. 뇌원차 1각은 강진읍 목리에서 조사된 조선의 차와 선(1940)의 청태전 하나 무게 3.75g과 같다. 1049년 뇌원차와 대차를 품계별로 하사한 부분으로 비례계산 해보면 뇌원차는 무려 대차大茶의 1,600배의 가치다. 제다는 복잡한 송의 북원 공차 제법과 유사하게 복잡했고, 우리나라 고유의 차약茶藥의 성분을 극대화했을 것으로 본다. ‘뇌원腦原’은 원래 ‘노원蘆原’에서 변한 상품명으로 본다. ‘갈대들’인 ‘비사리뻔덕지’는 가을평 다소의 자리다. ‘가을평加乙坪’은 ‘갈대들’을 소리로 나타낸 한자다. 그러나 경덕왕은 757년 한화정책으로 뜻으로 바꾸니 ‘노원蘆原’이다. 갈밭에서 나는 차, ‘갈밭차’는 한자로는 ‘노원차蘆原茶’다. 노蘆와 유사 소리이며, 뇌를 맑히는 약용의 이미지를 잘 살릴 수 있는 뇌腦로 바뀌어 ‘뇌원차腦原茶’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보성의 차는 <약재>로 차가 등장한다. 지금 현재 ‘약산藥山’마을도 차약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남았다. 현지인들이 약산을 ‘약찌미뻔덕지’라 부른다. ‘약찌미’는 약을 찌니 곧 차약을 찐다. 뇌원차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유명한 뇌원차의 약성은 우리말 이름으로 천여 년을 전승되었다.

가을평 다소의 궁중 직영 차 농장 궁원전宮院田은 현재 ‘비사리밭들’의 강역으로 보면 57만㎡(17만 평)에 이르는 너른 땅이다. 북동류, 북서류하는 두 용반천龍盤川 사이로 갈대가 아주 무성했다. 이 특징으로 ‘갈대밭,’ 갈대들의 명칭 ‘비사리밭들’, ‘비사리뻔덕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내려왔다. 특히 자갈과 돌이 많아 물 빠짐이 좋은 최상의 차, 갈대밭 차인 노원차蘆原茶, 뇌원차腦原茶가 생산된다. 고려를 대표하는 궁중 차, 뇌원차의 원산지다. 1313년 이후 뇌원차가 사라진 뒤 오랫동안 버려진 땅 황무지 뻔덕지였다. 왕실 소유의 땅이었으므로 다소茶所가 폐해진 뒤에도 ‘평장平莊’으로 궁중의 장원인 내장內莊이었다.

포곡 다소(봇재)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도 포곡소가 있고<그림9>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그림3>과 대동지지(1866)<그림4>에서는 보성군에서 남 20리 권역(7~9km)에 포곡소蒲谷所가 있다고 한다. 소를 연구한 이정신은 포곡소浦谷所라 부르며 다소로 보고 있다. 포곡(蒲谷, 浦谷) 역시 한자의 뜻을 새긴 ‘부들골’蒲谷이나 ‘갯골’浦谷이 아니다. 다만 우리말의 소리를 한자를 빌려 쓴 것으로 ‘봇골’이다. 봇재 아래 봇재골(7)부터 영천저수지 끝 지점(9)까지 포곡 다소 권역이다. 초록잎이 펼치는 세상(7.2), 반야 다원(7.3) 양동(7.4), 승설 녹차(7.4), 영천 다원(7.4), 다도락 다원(8.4), 보성요(8.4) 등 차밭과 보성 덤벙이 재현 도요지가 있다. 그 권역은 130만㎡(40만 평)에 이른다. 이 중 34만㎡(10만 평)는 1984년 영천제聆川堤가 만들어져 물에 잠겼다.

포곡 다소의 다소민이 살던 마을은 현재 봇재의 양동陽洞 마을이 틀림없다. 그 이름에서 정확하게 드러나니 양동이 다름 아닌 포곡, 봇골이다. 포곡蒲谷 > 폿골 > 봇골 > 양동樑洞 > 양동陽洞으로 변천되었다. 봇 > 보의 음을 이두식 표현으로 ‘(대들)보’ 양樑을 쓴 것이다. 지금 포곡 다소는 사라졌지만, 포곡(=봇골) 이름은 봇(재)골과 봇재褓峙와 양동(=봇골)으로 남았다. 포곡 다소의 제다소製茶所는 ‘봇골’ 지명을 가진 ‘양동’에 있었을 것이다. 고려 초기부터 포곡 다소의 마을이었다. 다소가 폐해져 마을이 없어진 뒤, 1,500년경 영천에 정착한 신안 주朱씨 일부가 농경지를 따라 이곳으로 분가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대한 다원 부근, 양동의 ‘숨은 밭골’ 주변, 그리고 고려 시대에 창건한 흑운사黑雲寺 부근에 자생 차가 있다고 전한다. (조현곤, 다도락, 보성군 지역 탐방-보성 영천 마을 유래) 대한다원 부근 몽중산 다원엔 고차수가 발견된다. 오랫동안 자생차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활성산 몽중산 부근과 봇재 부근엔 이미 자생차가 있었다. 흑운사黑雲寺 위치는 현 득음정민박이 있는 허궁골로 추정된다. 허궁골은 흑운 다리, 허공 다리, 허공달, 허궁달, 씨미골, 쉼바탕, 쉼골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최근에도 허궁골(영천리 374-1)에 차를 재배하고, 오른쪽 산록 1ha 정도(영천리 364-2)에도 차밭을 일군 흔적이 있다. 양동의 ‘숨은 밭골’은 현 봇재골, 봇골에 숨어 있는 밭 골짜기다. 현재도 차를 재배하고 있다. ‘숨은 밭골’은 은전곡隱田谷, 밭이 생략된 ‘숨은 골’은 ‘은곡隱谷이다. 봇재골에 이 명칭을 딴 은곡隱谷 다원이 있고 판매장은 바로 위 봇재에 있다. 그리고 양동 숨은 밭골의 자생 차는 고려 시대 포곡 다소의 흔적이다. 다소가 없어질 때 철저하게 차가 파헤쳐지고 없어졌다. 계곡 위쪽 현 은곡 다원 아래 골짜기, 봇재골에만 겨우 남았다. 그마저도 196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다원을 개발하면서 자생 차는 다 없어졌을 것이다. 포곡 다소였던 이곳은 1000년을 넘은 차 재배 역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 처음 차밭이 조성된 것이 아니다. 차밭이 있는 차 재배 적지이기에 봇재골 너머 대한 다원은 일제 강점기에도 근대식 차밭을 일구었다. 이 경성 화학의 차밭도 일본인이 경영한 것이 아니라 실 소유자와 실제 경영자는 보성의 제일 부자 김영학金永學이라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보향다원 최영기 대표의 진술에 의하면, 조선인 사장 이름으로 사업이 어려워 일본인 사장을 표면에 내세웠을 뿐, 실제 경영은 최 대표 할아버지 손위 처남 김영학 씨가 했다 한다.)한편 봇재골에는 해방 이후 1969년부터 다시 차밭을 일구고 특농가들이 지원을 받으면서 계단식 차밭을 힘들게 일구었다. 지금도 영농 한계를 극복한 계단식의 아름다운 녹색 차밭의 물결은 포곡 다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뒤늦게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8년 11월 30일에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세계적인 중요농업유산이 될 수 있을 만한 역사와 가치가 있는 곳이다.

보성의 차, 차향, 다소의 주요 출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SNS 기사보내기
보성군청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