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통일신라시대 주요 차 산지

녹차수도 보성차의 역사를 찾아서 3 보성군청l승인2020.05.15l수정2020.05.1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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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량得糧’은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조달해’ 생긴 지명으로 간척지가 조성되어 양식을 얻기 좋다. 현재 보성득량에는 년도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야생차나무 군락지가 있다.

개흥사開興寺와 원효 차(661년)

개흥사(득량면 해평리 산84번지)는 원효元曉대사(617-686)와 의상대사(625-702)가 함께 창건했다고 청광자 박사형(朴士亨, 1635-1706)은 전한다. (청광집《개흥사법당개립권선문開興寺法堂改立勸善文》그러나 원효산의 이름, 차인이기도 한 원효 스님이 칼바위산의 칼바위에서 수도를 했던 원효산의 원효대사수행 전설 등을 고려할 때 원효대사 창건으로 본다. 개흥사의 이름과 위치는 <그림1>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국여지지(1656), 보성군읍지(1899)에 나온다. 1688년 중창된 개흥사開興寺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청광집에서 1678년에 세 차례 중건, 1680년대 불사가 활발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오봉五峰 정사제(鄭思悌, 1556-1594)의 시에서 나오는 개흥사는 난곡蘭谷 정길(鄭佶, 1566-1619)의 시에서는 폐허된 것으로 나온다.

1620년대에 지은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시에서 다시 개흥사가 나오니 개흥사는 임진란 즈음에 폐사되고 1620년 이전에 재건된 것 같다. 2013년(1차), 2015년(2차), 2017년(3차) 발굴 조사결과 국가적 규모의 대가람임이 드러났다. 계곡 양단의 높이 4.8m, 길이 26m의 대형 석축, 속도랑이 시설된 석축이 다단으로 조성된 산지 가람이다. 석탑 옥개석, 소조 불상, 청동 소탑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 출신 의병장인 오봉五峰의 시에서는 중선루仲宣樓, 남루南樓, 산성山城, 돌길 등이 나온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원西院과 동원東院이 있고, 중정(中庭, 중앙 마당)이 있다. 서원에 금당金堂 추정 건물 중심지가 있다. 서원 1, 2구역의 대형 석축은 압도적이다. 동원은 승방과 요사가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원 4구역에서는 와편, 청자, 백자편 등 그릇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찻사발 등은 개흥사의 차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돌계단 등의 용 조각이나 궁궐과 흡사한 층간 대지 등 구조는 왕실에서 출연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 보성에는 삼국시대 주 차산지였던 백제와 통일신라의 다양한 유적들이 존재한다. 현재 보성군 득량면 다전마을에 수백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 군락들이 산재해 있다.

11∼12세기의 어골문, 격자문 기와 13∼14세기 청자, 명문 막새(1452) 등이 발견되었다. 원효대사 초창初創 전설 이외에도 발굴 결과 고려 초기에 개흥사가 있었던 것은 확인된다. (개흥사 발굴 조사 자료 :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寺祉) – 보성 개흥사지, 2019) .개흥사에서 수륙재도 지내고(1662) 묘법연화경 등 7종의 불경(1647-1662)과 보성 선씨宣氏 문중 족보(1688)도 발간했다. 승 계수戒修는 동원석교(1685), 마천석교(1674) 등 지역 교량을 세우기도 했다. 현재 해평리 조양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장승도 이 개흥사 입구에서 옮겨졌다. 사찰 수호신이 바다의 안전을 지키는 장승으로 바뀌었다. 산속 사찰이지만 강골, 조양마을 쪽으로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개흥사에서 뱃놀이하러 감自開興寺赴船遊’이라는 오봉 정사제(1556-1594)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은 간척지 제방으로 육지화되었다. 1908년 이전에 개흥사의 관음보살좌상을 송광사 동암으로 옮긴다. 개흥사의 폐사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개흥사 주변에 아직 자생 차밭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생 차밭은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개흥사에서 2.5km 떨어진 조양朝陽마을 서쪽 골짜기에 ‘국수사’가 있었다. 조양마을은 현지에선 ‘해창海倉’이라 부른다. 해평리 327번지에 ‘해창터’가 있다. 국수사 근처 기남 마을 입구엔 ‘기남사起南寺’가 있었다. 또 개흥사가 암자 10개를 거느릴 정도로 대규모의 사찰임을 고려할 때 차 생활과 차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개흥사 발굴 조사결과도 청자, 분청사기, 백자의 다구茶甌, 다완茶碗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개흥사의 차 생활과 차 문화를 입증하고 있다. 또 1km 정도 떨어진 ‘칼바위 산’은 차인 원효대사(617-686)와 관련이 있다. 원효산엔 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장제굴과 마당굴(일명 베틀굴)이 있다. 개암사 원효방(元曉房,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714번지) 원효굴과 베틀굴은 닮았다. 이규보처럼 보성의 유학자 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도 원효산에 올라 원효 스님의 차 자취를 찾는다. “허윤실과 원효산에 올라. (중략) 원효 스님 자취 간절히 찾으니 / 돌샘 벽돌은 이천 년 지났네(與許允實元曉山 ... 篤尋元曉蹟 石甃二千年)” 이규보가 그랬듯 월파도 간절히 원효의 자취를 찾아, 마침내 돌샘 벽돌을 찾았다. 원효가 차를 마실 수 있는 ‘돌샘’을 찾은 것이다. 이천년이 되었으니 원효 이전이다. 원효도 그 샘에서 차를 마셨을 것이다.

득량 ‘대례’- 백제 유민 도일(663년)

‘득량得糧’은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조달해’ 생긴 지명으로 간척지가 조성되어 양식을 얻기 좋다. 하지만 원래 ‘동로冬老’에서 왔다. 통상 백제 유민이 도일했던 대례성을 조성鳥城의 조양 포구로 보지만 일본의 한 학자 주정개장酒井改藏도 대례성을 득량으로 보고 있다.(권경안, 보성을 말한다, 2003). 동촌리(東村里, 마한 이전) → 동로현(冬老縣 : 369, 삼국사기) → 대례弖禮 성城 (663, 일본서기) → 동조포(冬鳥浦) : ∼991, 고려사) → 안파포(安波浦 : 992∼, 고려사) → 예진포<曳津浦 : 1597, 난중일기), 왜진포(倭津浦 : 오봉 정사제(1556-1594)의 시, 왜진(倭津)을 건너며> → 해창포(海倉浦 : 1925, 보성군지) → 득량 조양(朝陽)마을. ‘바닷가의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동로冬老’의 ‘ㄷㄹ’은 대례, 득량으로 이어졌다. 원래 땅이름 소리를 잇지 않는 안파安波나, 해창海倉은 세곡선의 안전한 운항과 세곡 창고 등으로 달리 부른 이름이다.

예진曳津, 왜진倭津은 나루와 포구로 일본과 교역과 침략의 통로의 뜻으로 불렸다. 인근 조성은 초리국(楚離國, 마한) → 조조례현(助助禮縣, 백제) → 조양현(兆陽縣, 경덕왕 757), 조양포(兆陽浦) → 조내면(兆內面) → 조성(鳥城)으로 ‘(ㅊ)ㅈ’의 자음을 꾸준히 이어옴을 알 수 있다. ‘ㄷㄹ’계통인 ‘대례’와 다름을 알 수 있다. 한편 득량에 속하면서 조성 쪽에 있는 예당禮堂은 대례에서 ‘ㄷ’이 탈락, 갈라져 나온 지명으로 ‘예’를 지켜옴을 알 수 있다. [(대)례 → 예진포, 왜진포 → 예당]. 백제 유민 중에는 좌평, 달솔 등 지배세력과 귀족이 많았고 이들 백제 지배층은 이미 차를 애용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백제 남쪽 지대의 차와 차 문화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는 서로 없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개연성이 크다. 661년 원효산 원효샘의 발자취를 보거나, 663년 백제 유민들이 득량 원효산 밑 대례 성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볼 때 당시 차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800년 뒤, 1466년 이후에도 두 오봉산 사이인 도촌리 분청사기 도요지(도촌리 산148)에서 <보성 덤벙이>가 생산되어 계속된 활발한 차 생활을 입증한다. 도요지는 원효산 개흥사로부터 750m 밖에 안 떨어져 있다. 해상 교역이 활발한 지중해인 득량만 관문 조양마을은 2.5km 지점으로 보성 덤벙이 찻잔의 수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을전加乙田 차향茶鄕 -676년 이후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장흥도호부 편에 “가을전차소십삼加乙田茶所十三”이 있다. 고전번역원은 “가을전. 다소 십삼(加乙田. 茶所 十三)”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장흥에 다소茶所가 13개나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바른 해석은 “가을전차. 소 십삼(加乙田茶. 所 十三)”이다. 즉 ‘(장흥도후부에는 6개 차향 중) 가을전 차향이 있고, 13개의 소所가 있다.’는 뜻이다. 13개 다소가 맞으려면 1개라도 다른 소가 없이 모두 다소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성격이 밝혀진 10개 소를 보면, 와소 2(요량소, 창거소), 봉화소 1(정화소), 자기소 1(칠백유소), 도기소 1(운고소), 사기소 1(거개소), 옹기소 1(가좌소) 금소 1(웅점소), 다소 2(향여소, 가을평소) 등이다. (조석현, 다소를 찾아서, 보성문화 2018 참조) 장흥도호부의 2개 다소도 현 장흥 관내의 다소茶所는 향여소香餘所 뿐이다.

▲ <그림2> 『세종실록지리지』 장흥도호부 : ‘가을전차 소십삼(加乙田茶 所十三)’

가을평소加乙坪所는 현 보성군 웅치면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所는 고려 초기에 생겼으나 향鄕과 부곡部曲은 신라 시대부터 있었다고만 알려졌다. 바른 해석으로 인해 고려의 다소와 같이 신라 시대에 이미 차향은 차를 재배하고 만들어 조정에 공납한 ‘차 마을茶鄕’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보성 남 20리에 ‘적촌향狄村鄕’으로 나온다. 대동지지(大東地志 : 1866)에는 보성 남 20리에 ‘추촌향秋村鄕’이 있다고 한다. 보성읍으로부터 남 20리(7-9km 권역)에 있는 동일 장소의 다른 이름이다. 바로 가을전 차향이다. 원전 글자를 따서 비교해도 대동지지의 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자와 형태가 비슷하다.(고전번역원의 번역에 따라 대동지지는 추천향으로 읽는다.)

▲ <그림3> 『신증동국여지승람』보성편 : 적촌향, 포곡소

가을전加乙田은 ‘갈밭’의 ‘갈(가을)’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고, ‘가을’ 추秋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신라 경덕왕 757년 이후, 한화정책漢化政策에 따라 음사音寫를 한자의 뜻으로 바꾼 까닭이다. 실제 방향과 거리로도 보성읍에서 남서로 9km 떨어져 20리 권역(7km∼9km)에 있다. 현 지명은 보성군 웅치면 중산리 ‘약산藥山마을’이다. 현지에서는 ‘약찌미뻔덕지’로 부르고 있다. 가을전 차향은 현재 약산마을 크기로 기준 삼으면 7.5만㎡(2.3만 평)에 이른다.

▲ <그림4 > 『대동지지』 추촌향(秋村鄕), 포곡소(蒲谷所)

현재의 지명 약藥도 약성이 강한 보성 뇌원차의 ‘차약茶藥’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약찌미’는 ‘약을 찌는 것’이다. 곧 가을전 차향에서 뇌원차를 쪄서 증제떡차蒸製餠茶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가을전 차향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이 있었다. 변천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⓵ 가을전 차향(676 이후), 추촌향, 적촌향 > 노원蘆原 차향(757) (통일 신라 시대) ⓶ 비사리밭들, 갈밭들, 가을평소(加乙坪所)(고려전기) ⓷ 평장平莊 (고려 후기) ⓸ 평촌坪村 > 약인藥仁 & 약의藥義 > 약산藥山(1565), 약찌미뻔덕지 (조선 시대)신라 향으로 신라의 유민들이 정착해 차를 만들어 경주 조정에 공납했을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 신라 지역(경상도) 사투리 그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다. 약산 마을 앞은 용반천과 ‘비사리밭들’은 유달리 갈대가 많은 ‘갈대밭’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갈대밭 차 마을(가을전 차향)’이다. 그런데 지금도 현지에선 ‘비사리밭들’이라고 부른다. ‘싸리’(경상도 발음은 ‘사리’)는 갈대의 경북 사투리다. 신라(경상도) 이주민들이 수많은 ‘갈대’를 보고 ‘사리’라고 부름이 그 시초라 여겨진다. 황량한 언덕, 버덩을 ‘뻔덕지’라고 부른다. 뻔덕은 번덕의 된소리이고, 번덕은 버덩의 경상도(경남) 사투리다. 버덩은 ‘높고 평평하여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의 뜻. 번덕의 번은 ‘번번하고 너른 것, 평평平平한 것, 평평한 들坪’, 덕은 언덕原이다. 이 뻔덕지는 자갈밭이 많으니 다른 밭작물은 힘들어도 좋은 차가 나는 차의 적지適地다. 이러한 경상지역 사투리를 보고 신라 조정에서 정책적으로 차가 많이 나는 백제의 땅 보성 웅치에 신라의 유민들을 정착시켜 차를 재배하여 공납했다고 추론한다.

신라 유민들을 정착시킨 이유로 1) 백제민의 저항으로 차향의 부역을 시키기 어려움 해소 2) 신라 조정의 직접 관리의 편의 도모 3) 기타 우리가 추측할 수 없는 사유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차의 수요가 많은 신라 궁중은 질 좋은 차가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660)시키고 백제 부흥군까지 멸하고(663) 13년간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한 뒤(676) 안정을 찾는다. 이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 가을전 차향을 운영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가을전 차향의 연대를 676년으로 삼는다. 초기에는 신라 유민들과 함께 차산지의 차 재배와 제다 경험을 가진 백제 토착민들의 기술과 협조를 받았을 것이다. 연구용역. 목포대학교 국제차문화·산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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