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전통과 맥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같으면서 다른 차이가 있다. 전통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역사의 보편적 개념이라면 맥은 그보다 규모가 적은 집단이나 개인의 실체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절집에 다맥이 없다하니 전통이 없다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어 부연하는 말이다. 속가에서 집안의 가풍은 흔히 몇 대 종손댁이라 하며 그 집안의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하고, 그 집안의 가풍 즉 전통은 종손댁을 중심으로 모두가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전통은 공유의 개념에 비중을 두는 것이고, 맥은 독점적인 것에 비중을 둔다. 더구나 절집의 맥은 매우 엄격하고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속가에서 말하는 맥과는 많이 다르다. 절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맥은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많이 드러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법맥이다. 원래 이 법맥이라는 것은 공부가 법열에 이르러 스승과 거량을 해서 인가를 받는 선맥을 이르는 말이다. 근대에 와서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하나는 본래의 선맥, 또 한 갈래는 건당이라고 해서 스승의 법 문하에 귀의 해 스승의 법을 이어간다는 법맥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름이 두 개가 있다. 두 개의 이름을 한 스승에게 받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말하자면 스승이 한 분 일수도 두 분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출가를 하면서 받는 출가명과 법명이 있다. 그 중에 법명은 법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로 일정한 의식을 부처님 앞에 올리고 스승에게 받는 이름이다. 그밖에 현재도 활발하게 전수되고 있는 강맥이 있다. 강맥은 쉽게 말해 승려들이 경을 공부하는 강원의 교수법을 전수하는 의식이다. 그밖에도 율원의 율맥 등등이 있다. 이렇게 예를 드는 것은 절집의 맥은 속가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계보를 중시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싶어서이다. 결론적으로 절집의 맥은 속가에서처럼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란 것이다.

정확한 계보나 그 계보를 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저마다 절차를 거치게 되어있고 부처님 앞에 의식을 올리며 절차를 수승하게 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맥을 잇는 것도 특별한 규약은 없고 매우 자율적이어서 단지 스승은 제자의 근기를 살펴 공부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지켜봐 주는 것이 스승으로서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치지 않는 그 밖에 등등은 속가에서 말하는 전통의 범주라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다맥은 바로 전통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맥이라 하면 매우 어색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초의 스님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 차를 만들었다는 상상은 금물이다. 스승이 차 만들기를 좋아하고 차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다하여 그 제자가 반드시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도 없을뿐더러 스승 또한 차 만드는 것을 전수시키려 일부러 제자를 두는 그런 일은 절집에는 없다. 전 호의 글에서 썼듯이 절집에서의 차 만드는 일은 남부 일원의 차밭을 가지고 있는 절집에서 매년 봄이면 치루는 일상이다.

전통이란 먼 시간의 일상이 쌓여 세월이 되고 다시 세월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현재에 이르러 다시 일상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은 절집의 일상의 일로 맥의 범주에 있기보다는 전통의 범주에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들어 사람들 사이에 다맥의 존재를 두고 왜 논란이 되고 설왕설래하고 다맥에 집착하는 그 이유를 짚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이 있는데 굳이 다맥을 주장하고 고수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묻고 싶다. 차 만드는 일이 역사적으로는 어찌되었든 근대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발전되어 왔는지 기록되어있어 관심 있는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차 만드는 골짜기마다 이대삼대 하다가 몇 년 사이에 사대오대 이어 만들어 왔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웃지 못 할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다 차 만들어 하는 살림살이가 팍팍해서 오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옳지 않은 일임이 틀림없다.

삼대, 사대 가업을 이어 차를 만들어 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별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차피 큰 전쟁을 겪어 초토화되어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차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지만 수요가 일어나는 상품이기에 더 늦게 시작될 수밖에 없는 품목이다. 그래서 속가에서 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수요가 있어 그때부터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사람들의 OEM으로 만든 기계로 만든 홍차는 제외하고 말이다. 몇 대를 이어 차를 안 만들었으면 어떤가, 지금 솜씨가 좋아 맛있고 향기로운 차를 만들면 된다. 공연히 차도 만들지 않은 조상을 차꾼으로 만드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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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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