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기도를 시작하면서 고(故) 안정태 보살님을 생각하며 차를 우렸다. 안정태 보살님은 1980년 인사동에 다암茶庵을 열어 우리나라 녹차 보급에 헌신하신 분이다. 9증9포九蒸九曝한 우전雨前의 찻물.
백중기도를 시작하면서 고(故) 안정태 보살님을 생각하며 차를 우렸다. 안정태 보살님은 1980년 인사동에 다암茶庵을 열어 우리나라 녹차 보급에 헌신하신 분이다. 9증9포九蒸九曝한 우전雨前의 찻물.

1992년 6월초 전각가篆刻家에게 은사스님 낙관落款을 부탁하러 인사동에 갔다가 다암茶庵에 들렸다. 주인 안정태 보살님이 젊은 여인들과 차를 마시고 있기에 그냥 돌아 나오려고 했더니, 잘 오셨다며 일어나 자리를 권하는 것이었다. 점심공양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도 차 생각이 나던 참이라 주저앉아서 차를 얻어마시기로 했다.

묵묵히 차를 마시며 먼저 있던 젊은 여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다도에 대한 전문가들처럼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테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등의 용어가 계속 나왔다. 가만 들어보니 센노 리큐(千利休 : 1522∼1591, 센 리큐)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일본다도의 얘기였다. 센 리큐는 선과 차에 밝았던 소오에키宗易스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녀들의 얘기에서는 다도茶道의 정신이나 차 맛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반 시간이상 나는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안정태 보살님이 그녀들의 얘기를 중단시켰다.

“스님, 이 사람들은 차 사범들입니다. 스님께서 좋은 말씀 좀 해 주시지요.”

“아이고 나야 그저 차 얻어먹길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는 게 있어야 얘길 하지요.”

“무슨 말씀을요. 스님께서는 차 드신 지가 20년이 넘으시고, 또 저희 가게에서 구입할 차를 품평해서 선택해 주신 지가 십년이 되었잖습니까. 이 사람들은 사범이 된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스님 말씀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글쎄요. 전문적인 것은 잘 모르겠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용해지고 맑아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 사범들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모두가 급한 일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 다도를 한다는 이들 가운데 일본의 다도역사나 일본식 차 달이는 법을 모르면 아예 차를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리고 일본에서 차 마실 때 하는 예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일본의 말차抹茶를 사서 마시는 것이나 일본의 녹차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문제이다. 나는 일본에 갔을 때마다 반드시 말차 잘 한다는 곳에 가서 차를 마시곤 했다. 심지어 대단한 차 선생이 타 주는 말차도 마셔봤다. 그런데 그림같이 말차를 타기는 했지만 정말로 맛있게 말차를 타는 이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요즘에는 모두 초의 선사草衣禪師나 다산茶山의 얘기를 많이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의 정신세계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의문이다. 차는 마시는 것이다. 옛날에는 약용으로 활용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몸과 마음을 맑고 건강하게 해주는 기호식품이다. 그러니 당연히 맛있게 마셔야 하고, 마실수록 맑아져야 한다. 그러면서 차 자체를 잘 알아야 한다. 왜 차나무를 자연에 가깝게 키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왜 우리나라 녹차를 9증9포九蒸九曝의 방식으로 법제法製해야 맛이 좋고 몸에 좋은지도 알아야 한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녹차 제다법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데, 차나무의 품종 자체도 다르고 또 그들만의 특수한 법제 기법이 있기도 하다.) 차를 좋아하는 이라면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성분이 남아있는 엉터리 차에 속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하며, 완성된 차에서 차 자체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고매한 정신세계를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차전문가라는 이들 입에서 “구증구포로 차를 만들면 차가 부서져버린다.”거나 “여름에는 녹차를 미리 우려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시원하게 마시면 좋다.”라는 등의 기막힌 말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 점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설픈 지식으로 타인을 해롭게 하고 괴롭게 만들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장단점을 잘 알아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서울 개화사를 창건해 차와 향을 공유하고 있는 송강스님의 차에 관련된 편안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사랑하기’란 이름으로 차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송강스님의 허락을 받아 전제한다. 송강스님의 ‘사랑하기’는 현대인들에게 차 생활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제대로된 차 마시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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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 송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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