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발효단차 마로단차.
한국형발효단차 마로단차.

1999년이전에는 덖음차만 만들었다. 냄비 하나 걸고 한해 동안 마실 차를 준비했다. 2000년 봄 부터 차솥을 4개를 걸고 덖음차를 1톤씩 만들었다. 지금 생각 해봐도 아찔하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을까. 그때 경험이 차 맛을 찾아 내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아홉번을 덖었니, 초의선사가 이렇게 덖었을거라니 저렇게 덖었을거라니 온갖 말들이 난무했다. 나는 그런말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얻은 것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2003년 처음으로 세상 밖 차꾼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혼자 마셨던 찻자리였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온갖 이론적 지식을 들고 찾아와 노골적으로 내가 만든 차를 무시하는 언사까지 서슴치 않았다. 차맛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책에서 배운 이론만 들고 앵무새처럼 떠들어댔다. 제대로된 차맛을 찾아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동도 노동이지만 그 찰나 한끝 맛을 담아 내는 일이 절대 쉽지 않았다. 20년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알아지고, 그 후가 되니 이제는 쉬워 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발효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 당시 보이숙병을 꾸준히 마셔왔다. 한국 차시장은 보이차가 장악할 즈음 한국 차 농가에서도 발효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나도 덖음차를 만들지 않았다. 내 입맛에는 여전히 우리발효차가 맛이 없었다. 보이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그 무엇의 묘한 맛이 없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보이차에 길들여져 있는 입맛을 사로잡을만한 우리발효차를 만들 수 없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 숙제를 우리차를 마시면서 해결한 것이 아니고 중국 광조우 차 시장을 몇년을 걸쳐 다니면서 그 맛을 해결했다.

우리는 발효차를 소엽종으로 만든다. 중국은 보이차를 대엽종으로 만든다. 어떻게 맛이 같을수가 있을까. 근본부터 다르게 시작 했는데라는 문제점을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연구를 해나갔다. 2010년 계동 한식집 < 안집> 에서 2.30명이 모여 내가 연구한 발효병차 시음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발효병차를 하나씩 나눠줬다. 나는 당시에 확신했다. 내가 만든 발효차가 한국 차 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있을거라는 확신이었다. 나의 확신은 맞아 떨어졌다. 마시는 사람마다 이런 차가 있다면 ‘보이차를 마실 이유가 없지요.’ 라는 답을 했다. 나는 권한다. 보이숙병과 내가 만든 차를 동시에 놓고 마셔보고, 온갖 보이차를 <마로단차> 와 동시에 마셔보라고 권한다. 사람들은 차 맛을 금방 알아차린다.

나는 제다한지 30년 지나지 않은 보이청병은 못 마신다. 차성이 너무 강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차는 생차 맛이 사라지고 익은 맛만 남아 있어야한다. 충분하게 숙성되지 않는 차는 몸에 그다지 이롭지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강한 생차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 있다. 꼭 마셔야 몸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한국 차든 중국차든 생차를 마셔서 이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때로는 과학자보다 직감이 더 정확한 대답 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확신 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것에 대해 궁금한 분은 언제든지 나에게 상담을 한다면 대답 해 줄 수 있다. 차는 신령스럽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SNS 기사보내기
마로다연 법진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