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공동체 가치를 담다

빛 품어 밝은 보듬이전, 19- 25일 정동주l승인2019.05.18l수정2019.05.1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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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근청화포도문 ᄇᆞᆰ 보듬이 9.9×11.5cm.옛길이 아주 끊기지 않는 것은 삶과 죽음이 새끼줄처럼 꼬여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삶은 관계의 이쪽, 죽음은 저쪽. 빛과 어둠 사이로 흘러가서 길이 된다. 옛은 지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얼굴, 지금은 내일의 씨앗이니, 저 포도 맛있게 따 먹으리라.

백의白衣민족, 백두산白頭山, 백자白瓷의 ‘白’ 자는 우리 글자인 ‘ᄇᆞᆰ’의 소리를 빌려서 붙여 쓰고 부르는 한자다. ‘ᄇᆞᆰ’은 희다, 밝다, 깨끗하다, 틀림없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을 품었다.

▲ 김종훈.숨별 ᄇᆞᆰ 보듬이 8×10cm.허투루 꾸미지 않고 참으로 살아서 한 결로 우러름을 받는 조선 선비는 겸손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 선비를 닮은 조선백자 흰빛은 안으로 빛을 품어 담담하다. 숨별 보듬이는 그 겸손의 백자 빛깔을 만나고 있다. 온갖 시름 내려놓게 하는 저 깊이여.

‘ᄇᆞᆰ’에는 한국인의 심성과 정서가 담겨 있다. 삶과 죽음 모두를 ‘ᄇᆞᆰ’에다 이어 놓고 있는 탓에 희고 밝다는 뜻의 그림씨(형용사)가 참으로 많다.

▲ 심재용. 마애불 ᄇᆞᆰ 보듬이. 9.5×9.9cm. 나는 가진 것이 재앙이 되고 배운 것이 눈 가리는 욕심의 쳇바퀴 위에서 生老病死를 되풀이하건만, 경주 남산 벼랑에 누워 웃는 저 부처는 여러 천 년 비바람, 전쟁 속에서도 처음 같이 처음 같이 행복하시네.

하야말갛다, 하얗다, 해끔하다, 해끄무레하다, 해끔해끔하다, 해끗해끗하다, 해뜩발긋하다, 해뜩해뜩하다, 해말갛다, 해말끔하다, 해말쑥하다, 해맑다, 해슥해슥하다, 해읍스름하다, 허여멀겋다, 허엽스레하다, 허옇다, 희멀겋다, 휘우듬하다, 희끄무레하다, 희끔하다, 희끔희끔하다, 희끗희끗하다, 희우르다, 휘누스름하다, 휘누름하다,희다, 희디희다, 희뜩벌긋하다, 휘뜩휘뜩하다, 희말쑥하다, 희맑다, 희멀겋다, 희멀끔하다, 희멀쑥하다, 희무스름하다, 희번드르르하다, 희벗하다, 희부옇다, 희불그레하다, 희붉다, 희뿌옇다, 희슥하다, 희슥희슥하다, 희유스름하다, 희읍스름하다, 희푸르다.

▲ 허경혜.나한 ᄇᆞᆰ 보듬이.8.5×9.5cm.종교적 엄숙성, 계율의 비장함보다 소박하고 천진스러운 인간의 꿈이 아름답기를. 어딘가 낯익어서 편안한 오백나한 앞에서 비밀 모두 털어놓고 참회하는 일이 아름답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동무 같은 스승, 스승 같은 동무로 하는 생사고락이 아름답기를.

무려 마흔아홉 가지나 된다. 한민족만큼 희고 밝음을 향한 열정과 염원이 간곡하고 다양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 심영란.청화 ᄇᆞᆰ 보듬이. 8×10.4cm. 흙 속에서 얻어낸 쇠를 녹이고 가루 내어 다시 흙 속에 섞고 불가마에다 구웠네. 이는 정녕 땅속 일을 묻거나 불 속의 안부를 묻는 일이거니. 푸르고, 검고, 붉게 대답하는 저 침묵의 허밍 코러스여.

흔히 조선백자 색깔이 조선 시대 지성의 푯대이자 양심의 거처로 일컬었던 선비 정신을 닮았다고 한다. 선비 정신의 뿌리도 ‘ᄇᆞᆰ’ 사상에 연원한다. 조선백자 ‘ᄇᆞᆰ’은색은 그저 색의 한 종류가 아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지닌 깊고 큰 상처 위에 하늘이 발라주신 가루약의 색이다. 중화민족의 잔혹하고 기나긴 침략과 공포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자의 비폭력 의지와 공존을 소망하는 철학적 깨달음이 발효되어 정신으로 채색된 사상이다.

▲ 임만재.숲새미 ᄇᆞᆰ 보듬이. 8.9×9.4cm. 초의草衣스님 중정中正을 색깔로 말한다면 아주 희거나 아주 금빛도 아닌, 희되 희지 않고 금빛이되 뽐내지도 않는, 꿈도 아니고 꾸민 것도 아닌 색일 터. 차나무 잿물로 입힌 숲새미 ᄇᆞᆰ 보듬이에 차를 담으니 더함도 덜 함도 없이 정녕 차는 차로다.

‘ᄇᆞᆰ’ 보듬이 展 보듬이들은 그 빛깔이 흰색 그림씨만큼이나 다채롭다. 똑같은 백자 몸 흙인 ‘백토(白土)’를 썼지만,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기구함에 얽히다 보니, 몸 빛깔이 본디의 희고 밝은색을 입지 못한 그릇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백자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라. 비록 백자 아닌 것 같고 거기에다 못 생기기까지 했으나, 정녕 백자 가문에 속한 핏줄임은 분명하니까. 어쩌다 잡색 옷을 입었지만 속은 틀림없는 백자이니까. 그런 그릇의 참된 됨됨이를 말해주는 저 마흔일곱 가지 형용사는 희고 밝은 백자의 정통성을 떠받쳐주고 지켜 낸 백자이면서도 희거나 밝지 못한 것들의 유전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 장기덕.청봉 ᄇᆞᆰ 보듬이.8×10.5cm. 평범은 비범과 끈이 이어져 있고, 항상常은 끊어짐斷에 끈이 닿아 있다. 모를 것은, 흙이 태양에서 비롯된 것이나 삶이 죽음을 키우는 꽃이라는 것. 장기덕의 꿈은 평범과 비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늦은데다 많이 모자라지만, 이 아픈 시대를 함께 가야하는 고귀한 정신과 소중한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보듬어 안을 그릇을 빚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 그릇이 ᄇᆞᆰ은 보듬이다. 보듬이 창안자, 정 동 주.

갤러리차와문화 5월 19- 25일. 서울 종로구 계동길 103-4. 070-7761-7208.


정동주  teac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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