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땅 한 평 없었을 때 나에게 아주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시주가 들어왔다. 지금 기억에 1993년 이었던것 같다. 산이 통째로 왔음에도 그곳에 집을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이 산 옆에 송어 양식장을 하던 작은 빈집이 있었다. 외딴 곳에 버려진 집이었다. 나는 걸망에 있는 돈으로 인사동에 가서 한지를 사 도배를 했다.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화장실도 계곡물을 이용해서 수세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에 보일러도 없고 아궁이도 없었다. 연탄아궁이를 놓고 석달간 손수 고치고 나니 제법 집 모양이 나왔다.

시주 받은 엄청난 산은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돈 한 푼 없는 나로서 암담했지만 서둘지 않았다. 평생 차 나무를 심어 가꾸자로 마음이 정해졌다. 그해 늦 가을 경남 사천 곤양에 있는 다솔사 대웅전 뒤 차 밭에서 씨앗을 주어서 그 산에 심기 시작했다. 산을 시주 한 분이 이전을 해 가라고 했지만 덜렁 받기가 염치없어 두고 미루었다. 빈집이고 버려진 줄 알았던 집에 주인이 나타났고 집세를 달라고 했다. 당연하게 생각해서 일년치 집세를 마련해서 줬다.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숲 속에 들어가서 차나무 밭을 한 줄씩 한줄 씩 만들어 나갔다. 계곡 물길을 따라 옹달샘도 만들고 한마디로 극락 생활이었다. 그 즈음 정호승 시인이 토굴로 내려와 처마 밑에 풍경을 달고 시인의 명시 <풍경>을 탄생 시켰다.

아직 때가 아닌지 평온은 길지 않았다. 산을 시주 하신 분이 갑자기 부도가 났다. 산은 내 명의로 되어있지 않아 통째로 은행에 경매로 넘어갔다. 그 산에 씨앗을 뿌려 싹이 나온 차 나무들을 정토사 입구로 옮겨 심었다.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한다. 뿌리가 직근성이고 잔뿌리가 없기 때문에 옮겨 심으면 살기 힘들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다. 어린 묘종을 비가 잦은 장마철에 옮겨 심으면 100% 살아 남는다는 것도 차나무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요즘 매일 마로다연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것들이 교차한다. 옛 어른들이 차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던 일지암과 다산초당 그리고 아암 혜장스님이 수행했던 백련사 등 옛 차인들의 정취와 흔적을 밝으면서 느꼈던 많은 일들이 나에게도 소리 없이 인연이 된다. 마로다연제, 청년차회, 200년 고수차밭. 이러한 인연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년 전 언어를 잃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나의 도반 서예가 우보 김병규( 서울예대 교수)와 새끼 손가락 걸며 추사와 초의가 되자고 약속 한 일이 새삼스럽다. 바램이 있다면 청년들이 차생활을 하는 문화의 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요즘 모여드는 청년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역동적이고 열정만 가득한 서구문화보다 정적이며 고요하고 고요하며 품격이 있는 차 문화의 산실이 되도록 그 장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이 요즘 나의 숙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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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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