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는 해마다 작설차를 일년에 1톤을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다. 차 맛을 내는 일에 미쳐있었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한철 차 작업을 마치고 나면 늘 아쉬웠다. 찻잎이 자라서 더 이상 차를 만들 수 없을 때 까지 차를 만들었다. 바로 바로 현금을 주고 재정이 바닥이 날 때까지 찻잎을 샀다. 차 작업 한창 벌어지는 사월에 불자들은 부처님 오신날 연등을 달기위해 찾아와 연등을 달고 돈을 미리 주고 간다. 나의 차 연구에 드는 일체 돈은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 연등 다는 돈으로 충당이 되고 늘 모자랐다. 절 공간을 확장 시키고 도량을 정비하는 대신 차를 연구하는데 시줏돈을 다 쓴 셈이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댓 가없이 차를 나눠주는 일로 나름 부처님 밥을 얻어먹는 일에 빚을 갚아 나간 셈이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났다. 해마다 차를 얻어(?) 마시던 스님이 " 스님 차를 팝시다." 하고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 차를 외부로 팔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 스님은 당시 경북지역 한 고장에서 사암연합회 회장 소임을 살고 있었다. 관내 사암 연합회 소속 스님들께 홍보를 해서 대부분 스님들에게만 차를 팔았다. 그 인연으로 스님들께만 여기저기 알려지기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대충 귀동냥을 들은 정보로 천지도 모르고 차를 덖기 시작했다. 처음 부터 년 간 1톤을 덖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 정토사로 오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봄 마다 생잎 800kg ~ 1000kg 를 차로 만들었다. 차 덖는 일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멋 모르고 도와 주려고 왔던 사람들은 점점 나를 멀리했다. 지금이야 웃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심각한 수준의 노동이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차 맛 내는 일에 온 봄을 다 바쳤다. 그중에서도 아홉번을 덖는 차를 하룻 저녁 80kg를 만들었던 것은 지금도 전설 같은 이야기다. 미치지 않고는 절대 그 량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 수가 없다. 오랫동안 차를 만들었다는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르는 일이었다. 차를 덖어 판매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들도 나 만큼 차를 판매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큰 절 주지 스님들이 선방 스님들께 보시 한다고 한꺼번에 100통, 200통을 사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정도 부자가 되어 있어야 맞다. 아홉번 덖음차를 20년 전 한통에 삼만원을 받고 드렸다. 고생해서 만든 차를 겨우 그 돈을 받고 판매를 하고 나면 봄 한 철 만든 차는 바닥이 나고 내 수중에는 돈 한푼 남지 않은 차 장사(?)를 한 셈이다.

해마다 찻잎을 살 수 있는 돈을 시내 사는 불자분이 빌려준다. 나는 차를 팔아 갚는 일을 해마다 반복했다. 어느날 해마다 돈을 빌려주던 신도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스님 더 이상 돈을 빌려 드리지 못하겠어요. 차를 팔아 우리절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도 못하고 이사람 저 사람 돈 들여 땀 흘려 만든 차를 그냥 다 나눠주고 스님도 생 고생을 사서 하고 온 동네 신도들이 동원되서 차를 만들어도 뾰족한 발전도 없는데 더 이상 돈을 빌려 줄수 없습니다.”

나는 그 불자에게 차를 만들어 아무에게도 그냥 주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해 다시 돈을 빌려 차를 만들었다. 차를 만들면서 잊을 수 없는 그 해 봄, 나는 정말로 방문객에게 차 한통을 그냥 나눠 준적이 없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정호승 시인에게까지 차 한 통을 보내지 않았다. 자주 찾아오는 선생님이 왔는데도 차 한통을 주지 않았다. 새벽기도 도령석을 돌면서 나를 돌아봤다. 이렇게 잔인하게(?) 살아가는 내 현실이 남의 삶을 살아 가는 것 같고 너무나 불편했다. 그렇게 그해 봄 인정머리 없이 산 덕분에 차 팔아서 생긴 돈으로 자금의 공양간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확장 했었다. 참으로 뿌듯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차를 어느새 오는 사람 마다 나눠주게 되었다. 그 다음해 부터 오가는 누구에게나 차를 내 밀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봄에 차 4통을 나에게 선물 받은 분의 자동차 트렁크를 본의 아니게 들여다 보게 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땀 흘려 만든 차가 그 속에서 나 뒹굴어 다니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 기분은 뭐라고 표현 할 수 없었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해 부터 나는 정말로 차를 사랑하는 분에게만 차를 나눠 주게 되었다. 차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내가 만든 차를 10g도 얻어 마시지 못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 셈이다.

차를 그렇게 몇 년간 몇 통씩 받아갔던 그분이 차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생겼던지 선암사 스님께 차를 사러갔더니 그렇게 가격이 높은 줄 몰랐다며 내가 만든 차를 사겠다고 광주 법원 부장판사 부부와 동행해서 찾아 왔다. 처음으로 그분께 내가 돈을 받고 차 두통을 판 에피소드아닌 에피소드 중 하나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만든 차를 절대 그냥 받아가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일년동안 마실 차를 한꺼번에 구매해 회사에서 아침마다 차를 우려 마시는 분이다. 그분은 다름 아닌 우리 절 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불심 돈독한 거사님 가족들이다. 내가 절을 몇 년을 비우고 돌아다녀도 ‘우리스님 최고다’ 라고 생각 해 주는 분이기도 하다.

해마다 내가 만든 차를 사가는 스님들은 헐값에 차를 사서 선방 스님들께 보시해서 좋고 나는 나의 임상실험용 차를 실험용으로 그치지 않고 소비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부터 차를 잘 만들었겠나. 일년에 1톤씩 만든 수많은 실험으로 오늘의 작설차가 나온 것이다. 일년에 1톤씩 그것도 아홉번 덖음차를 20여년 이상 만들어 낸 손놀림속에 탄생한 차들이 아닌가. 차를 덖고 발효차를 연구하는 나의 생활은 중독 수준 넘어있다. 어느 해 부턴가 나는 일년에 덖음차 50통을 겨우 만들고 있다. 덖음차 맛 내는 일에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덖음차가 맛을 내는 일에는 한 꼭지점을 이루어 냈다고 주변 가까운 분들이 극찬을 해 주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만든 차가 보완해야 할 한 부분이 분명히 것이다. 그것은 차 맛이 아닌 다른 부분이다. 올 봄 그 부분을 완벽하게 해서 세상에 내 놓을 것이다. 그것은 글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특별한 차 사랑이기도 하다.

나는 감히 말한다.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차 맛 좀 안다고 자타가 공인 해주는 최고봉 고수들이 알아보는 차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

그러나 난 아직도 말 한다.

작설차 외 모든 차는 발가락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

덖음차는 그 만큼 어려운 것이다.

함부로 차 앞에서 품평하는 차인은 차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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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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