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무슨 소용이요 말이 무슨 소용이요. 사는 날 까지 그저 그렇게 앉고 눕고....먹고 자고 배설하고 .... 정말 내가 누구인지 누굴까 하고 진지하게 일기장을 써 본적이 없는 듯하다.

아파서... 아파서 ... 캄캄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가 너무나 캄캄해서 긴 터널을 걸어 걸어 또 걸어 버텨내며 맑은 햇살을 보기까지 그 길이 너무나 멀어 그냥 걸었왔다. 무작정 걸었왔다.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그곳으로....

눈 부신 햇살 아래 겨우 다다르니. 에게게게??? 겨우 이런거였어? 그 긴 어둡고 칙칙한 터널을 빠져나오니 겨우 .... 산은 그 자리, 물도 그 자리, 햇살도 그 자리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 곳에는, 그 자리에는 햇살이 따사롭고, 잔잔한 바람이 살결을 안아주고, 모두가 그대로 예전과 똑 같다. 해가 뜨고 해가지고 어둠이 오고 다시 아침이 왔을 뿐이다. 그곳에는 참으로 영악하기도 하고, 참으로 나약하기도 한 내가 서 있었을 뿐 ....

언젠가 부터 진지함으로 이야기 하는것을 피해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큰 병을 얻어 긴 세월 병석에 누워 있다가 설산 안나푸루나를 두 번 다녀 온 후 사람들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싱거워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어디에도 머문바 없이 흘러 갈 뿐이다. 그러하다 보니 차 이야기고, 사람 이야기도 다 재미없는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차 맛을 이야기 하는 것은 재미없으나 차향과 내가 하나 되는 그 시간은 백번을 말로 글로 표현해도 언어나 문자가 부족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숫제 차 이야기 정도는 요즘 말로 구라를 칠 준비를 하고 나 선 것이다. 속지 마시오. 글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움을 알아 챌 수 있다면 그대는 내가 쓰는 차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 들으리라 생각 한다.

그러나 여전히 차, 참 오묘하다. 참 신령스럽다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차, 그것은 분명 사람보다 먼저 손 내밀고 싶은 벗이 아니던가. 20여년 전 정호승 시인이랑 운주사 소나무 숲 속에 나란히 누워있는 와불 부처님을 뵙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토굴로 돌아와 처마밑에 풍경을 달아주고 명시 < 풍경달다> 를 세상밖에 내 놓았다. 그런 그가 시집을 내고 싶다는 나에게 손사레를 치며 말렸다. 그래서 시집 내는 일을 접었다. 시를 쓰는 일 조차 접었다. 그런 내가 새삼스럽게 차 이야기를 하자니 어리숭숭 뒤숭숭하다.

특히 덖음차는 만드는 과정이나 우려내는 과정이 너무 섬세해야만 제 맛을 찾아내기 때문에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차라고 무조건 다 차가 아닌 것이다. 정교한 작업을 하는 공학도들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선반이나 밀링 기기 처럼 한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아야 정밀도가 정확해 얻고자 하는것을 얻어 낼 수 있듯 차 역시 덖고 우려내는 일이 정확해야 얻고자 하는 차 맛을 얻을 수 있음이다.

그냥 대충 물 마시듯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고요히 앉아 차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까지 이르러 제대로 마셔보라는 이야기다. 차맛의 깊이와 혹은 그 신령스러운 경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 즉 강호에 숨은 고수들이 많다. 그들은 결코 차 맛이 이렇다 저렇다를 논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으로 차를 마실 뿐이다.

누구는 인생 전부가 사유의 이야기다. 명상이니 참선이니 기도의 이야기가 삶의 전부인 처럼 이야기한다. 감히 말 한다. 나의 삶이 기도 아닌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부 아닌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나는 아프면서도 걸었고, 슬퍼도 걸었고, 기뻐도 걸었다. 멈춰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차를 덖으면서도 뜨거운 온도를 견뎌내며 나를 보고 또 보고 조율하고 담금질 했다. 뜨거운 차 솥은 나에게 정말 큰 공부를 시키고 가르쳐 줬다. 멀리도 가까이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가벼운 나비처럼 날아 오르며 내가 꿈꾸는 세상에 느리게 느리게 여행 하는 법을 알려 줬다. 차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익어 가는 차향이 나를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안내해줬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다치면 스스로 치유하고, 슬프면 안으로 삼키고 궂이 드러내지 않아도 생명이 생하고 멸하듯 말이다.

누군들 세상에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다만 홀로 일어나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차를 덖는 일은 그런 거였다. 그 속에 팔만사천 부처님의 말씀이 다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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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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