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리의 강심.
이덕리의 강심.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는 한 학자의 고문서 발굴에 얽힌 10여 년간의 추적담이자 고문서 저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학자적 면모를 밝히는 책이다. 저자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탈고하는 과정에서 다산의 기운을 전해 받고자 강진에 내려간다.

그러나 간찰 소장자는 뜻밖에도 자료 일체를 공개하려들지 않았다. 여러 시간을 달려 간 길이라 그대로 접을 순 없었다. 중간에 다리를 놔줄 인물이 마침 강진에 있어 저자는 어렵사리 소장자 노인의 방안에 몇 뼘 간격을 두고 마주앉게 된다. 그리고 이 첫 만남은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실학 저술의 발굴로 이어진다. 바로 『동다기東茶記』와 『상두지桑土志』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두 저술의 집필자는 ‘다산 정약용’이라고 말해왔다. 그 오인의 역사는 길다.

저자 정민 교수는 이 책의 주인공을 무덤 속에서 불러내 그 이름값을 되찾아주자고 결심하게 된다. 220년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원저자의 한도 달래주리라 생각하며. 자료를 접하고, 수소문하고, 해독하고, 글쓴이에 관한 정보를 뒤적거리면서 들뜨긴 했으나 신중히 접근하려 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중간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애초에 ‘전의리全義李’라고 적힌 책의 집필자가 ‘이덕리’라는 것까지는 여러 터널을 통과하면서 밝혀냈지만, 『동다기』와 『상두지』를 쓴 이덕리보다 세 살 연하인, 1728년생의 동명이인 이덕리가 저술의 주인공이라며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이 일은 1725년생인 이덕리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만한 것이었다. 지난 220년간 세상의 빛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후손들 역시 자기 선조의 발자취를 전혀 모르던 와중인데, 논문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덕리는 그 형이 대역죄인인 까닭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2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자신 세상에 절대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글을 썼고, 책 말미에 희미한 흔적만 남겼다. 집안 후손들도 미처 몰랐던 사실인 데다, 후대 학자들 역시 그 덫에 걸려 헤매고, 오해하고, 다시 바로잡는 해프닝까지 벌어진 것이다.

길디긴 발굴 과정이었지만, 이덕리는 뛰어난 실학자적 면모로 인해 충분히 양지에 드러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상두지』가 국방 관련 제안서라면 『동다기』는 차 전문서로서의 차에 관한 세부 내용은 물론이고 국방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재원이 될 만한 방책을 내놓기도 한다. 이 두 저술로 인해 이덕리는 18세기 지성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덕리는 열아홉 살에 처음 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대의 골동품 수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상고당 김광수를 방문했다가 중국차를 맛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차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던 그는 저술까지 남기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정민 선생도 십수 년 전에는 차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지만, 문서를 발굴하고 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차 전문서에 교감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이덕리의 「기다」는 현재 『강심』의 필사본인 『강심만록江心漫錄』이라는 타이틀 안에 깨끗이 필사되어 전한다. 이 책에서는 『강심만록』 전체와 『강심』 중 「기다」, 『다경』 중 「기다」 부분의 자료를 부록으로 제시했다. 글항아리.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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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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