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이 커지면 공부가 안된다.' 선가禪家에서 내려오는 말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운수행각雲水行脚이다. 구름과 물처럼 천하를 여행해 보아야 공부가 된다. 운수행각의 장점은 존재계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머무르는데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집착을 털어낼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행의 핵심은 보따리이다. 얼마나 짐을 줄이느냐가 관건이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고역이다. 그러나 짐을 줄인다고 여행이 편한 것도 아니다. 객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고, 그것이 없으면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 불가에서 말하는 바랑은 스님들이 등에 메고 다니는 회색천으로 만든 보따리를 가리킨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니까 짐 속에 챙겨 넣게 된다. 챙겨서 넣다 보면 바랑이 커지고, 바랑이 커지면 공부가 안된다고 했다.

왜 안되는 것일까? 짐의 부피가 커지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 저것 필요하다는 것은 몸이 편해지려는 것이고, 불편을 못 참는다는 것이다. 공부는 이 불편을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가장 필수적인 것 빼고는 다 털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감하게 다 털자. 못 털면 구질구질 해진다. 여행가기 전에 짐을 싼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털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기도 하다. 털어낼수록 짐이 작아진다.

세계를 여행해 보면 1년 넘게 장기간 여행을 하는 프로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 프로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짐이 작다는 점이다. 자그마한 배낭 한 개만 가지고 다닌다. 자그마한 배낭 한 개로 일상을 모두 해결하는 사람은 '산야신'(수행자)이다. 커다란 캐리백 끌고 다니는 사람은 관광객이다. 짐의 크기로 구분된다. 나는 30대에는 짐이 작았다. 캐리백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배낭만 가지고 다녔으니까. 그러다가 50대에 들어와서 짐이 커졌다. 공부가 안되고 있는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지 못하고 욕심이 많아졌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군더더기가 많아진다는 증거인가? 짐이 커지는 원인을 분석해 보니까 세 가지 필수품 때문이다.

첫째는 어깨 근육 풀어주는 마사지 기계를 휴대해야만 한다. 크기는 노트북만 하고 두께는 8센티 정도 되는 네모진 금속 제품인데, 여행 가방 쌀 때 이걸 꼭 집어넣는다. 글을 쓰느라고 어깨 근육과 목 뒤쪽의 근육이 자주 뭉치는 탓이다. 여행가서도 그때그때 풀어주어야만 컨디션이 상쾌해진다. 뭉친 근육을 풀지 못하고 그대로 두면 컨디션이 저하된다. 둘째는 신발이다. 주로 샌들을 휴대한다. 등산화를 신고 다니지만 현지에 가서 돌아다닐 때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샌들이나 가벼운 신발이 있으면 한결 편하다. 동남아시아에 가서 목이 올라오는 등산화를 계속 신고 다니기는 정말 불편하다. 그래서 여분의 신발 하나를 가방 속에 넣다보니 부피가 커진다. 걸어 다니다 보니까 신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말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를 벗고 두꺼운 양말도 벗고 샌들로 바꿔 신으면 그 상쾌함이란! 유럽의 골목길은 대개 돌이 깔려 있고, 하도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걸어서 반들반들 해진 골목길을 걸을 때 샌달을 신고 걸으면 문명의 이로움을 느낀다.

세 번째 휴대품이 차茶이다. 여행이란 낯선 음식과의 조우이다. 원래 천리 밖의 음식은 안 먹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양생법養生法이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먹으면 세포가 놀란다. 세포가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대략 300년이 걸린다는 설이 있다. 음식은 조상이 먹던 것을 먹는 게 건강에 좋다. 보수화는 입맛에서 확실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비행기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의 시대에서 어찌 현지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으리오. 서양의 느끼한 음식을 먹고 하루에 한 번쯤 차를 마시는 것이 내가 택한 방법이다. 느끼한 식감을 희석시키는데 있어서 한국 사람은 김치도 택할 수 있다. 김치는 냄새가 좀 그렇다. 차는 냄새가 좋다. 스테이크를 먹고 치즈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게 유럽 여행인데, 이렇게 몇 끼를 계속하면 속이 더부룩해지고 가스가 차기 마련이다. 이 때는 차를 한잔 마시면 싹 정리가 된다. 노천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며 차 한잔 우려먹는 재미란!

국산 녹차, 보이차, 대홍포 이렇게 세 종류를 가지고 다닌다. 여기서 차호茶壺가 문제이다. 여행 가방에 차호를 넣으려면 포장도 두꺼워야 파손이 안 된다. 차호를 가져가면 차맛이 훨씬 좋아지지만, 가지고 다니자니 짐이 되고 깨지기도 쉽다. 그래서 휴대용 유리 제품을 가지고 다닌다. 대만에서 만든 것인데, 손잡이가 달려있고 거름망까지 갖추어져 있어 차를 우려내기가 간편하다. 이걸 가방에 넣고 차봉지를 넣고 거기에다 욕심을 부려서 찻잔 2개를 넣으면 짐이 커진다. 여차하면 두 사람이 마실 수 있는데, 나만 찻잔에 먹고 상대방은 물 컵에 주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몇 달 전에 그리스에서 높은 절벽 위의 독수리집 같은 곳에 수도원이 지어져 있는 '메테오라'에 간 적이 있다. 그 절벽 위의 수도원이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준비해간 차호에다가 지리산 녹차를 한잔 우렸다. 녹차맛과 이국의 풍광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차를 마시면 주변 풍광이 정지된 것 같이 한가해 진다. 갑자기 슬로우 비디오로 풍광을 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같이 간 일행들에게 차를 한잔씩 돌렸더니 일행들도 속이 개운해 진다고 감사를 표한다. 외국에 나가서 육보시는 못할 망정 차라도 한잔 대접할 수 있다는 것이 사는 맛이다. 차 도구를 챙기느라고 바랑이 커진다. 차를 끊으면 바랑이 줄어들 것이다. 이거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인생이 딜레마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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