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송스님.
응송스님.

전통 제다법의 논란이다.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우리 전통 제다법은 덖음차다. 기록에서는 작설차로 흔히 표현하고 있다. 전통 제다법 즉 초의차에 대한 문헌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는 기초자료로는 <다신전>과 <동다송>이다. <다신전>은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꾸며져 있다. 그러나 <다신전>은 중국 다서의 등초라는 이견들이 있어서 <동다송>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간헐적으로 초의 의순과 교유했던 다우(茶友)들이 남긴 문집에서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동다송>은 모두 31구송으로 되어 있다.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을 말하고 있다.

먼저 대둔사에서 전승된 제다법이다. 제다법은 초의의 <다신전>과 <동다송>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전통 덖음차 제다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대흥사 다풍으로 전승 또는 전수되고 있는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선 위에서 분류하고 있는 세 가지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분석한 초의차의 원형 정의에서 밝힐 수 있는 초의의 제다 특징이다. 초의의 제다 과정은 ‘찻잎 가리기→(고온의 무쇠솥에서)덖음 살청→(덖은 차)비비기(揉捻)→(비빈차) 털기 →(점점 낮은 온도에서) 살청과 유념 반복 그리고 재건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화후를 잘하여 불기운을 조절하는 데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념과 털기(정치), 재건(再乾)의 과정이 반복됨을 강조한다. 이것이 초의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 박동춘의 논지이다. 이론적으로 정리된 이 방법과 앞에서 기술한 예용해가 조사한 지산 화중(芝山 化仲)의 제다법, 그리고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초의차의 기준, 마지막으로 필자가 현장에서 만난 제다법이다.

그 과정에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현묘함이 있고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것은 기술과 경험, 그리고 육감 등으로 짐작된다. 이 기술과 호흡이 제일 현묘한 절차인 것이 초의의 제다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차색과 차의 향이며, 이것은 순수하게 덖는 기술에 달려 있다. 이번 논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승관계를 고찰하기 위하여 현장조사를 병행하였다. 현장에는 당시의 제다법을 고증할 수 있는 시대의 증언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 번째 응송의 제자가 나타난 것이다. 응송의 제자라고 하는 某 비구니는 차통에 증차라고 인쇄하여 판매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본인이 만들고 있는 차의 제다법은 증제차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 박동춘과 某 비구니의 제다법 중 어느 쪽이 응송의 제다법이냐? 하는 논란이 또 한 번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런데 문제는 박동춘과 응송을 시봉했다는 某 비구니의 제다법이 덖음차와 증체차로 나뉘었다. 박동춘 응송에게 다도전수게를 받고 지금까지 덖음차를 주장하고 있는데 某 비구니의 제자법은 증차법이다. 한 스승인데 제다법이 다르다 하여 저자에서는 논란이 되었다.

박동춘은 본인의 차가 덖음차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반박하는 입장에서는 응송의 제다법이 증제차라고 주장했다. 응송이 1980년대 초의차 제다법 재현을 위한 과정에서 물을 치고 차를 만든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을 치고 차를 제다한 기록이라는 해석으로 논리의 비약을 가져왔다. 박동춘은 본인의 차는 증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먼거리에서 찻잎을 공수하다보니 수분의 조절을 위한 절충이었다는 논지이다. 여기에서는 박동춘이 주장하는 덖음차와 증제차의 차이와 실체를 명징하게 밝히는 것이 현 시대의 과제이다.

이것이 중요무형문화재지정과 맞물려 매우 소란스러운 논쟁의 거리를 제공했다. 초의의 다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필자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초의차와 대둔사의 다맥과 관련된 모든 증언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某 비구니도 구술조사를 실시했다. 현장은 사실을 고증할 수 있는 담보 같은 것이었다. 그 첫 번째로 응송의 시봉자(任正禮, 1963~ 계묘생)를 찾았다. 그리고 응송의 며느리(林京洙, 1946~ 병술생)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응송 상좌의 내자였던 광호엄마(金正金, 1933~ 계유생)는 1957년부터 1970년까지의 대둔사 제다법을 구체적으로 구술해 주었다. 이어 응송의 제다법이 부초차냐? 증제차냐? 하는 논란이 핫이슈인 정점에서 응송을 시봉했다는 某 비구니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어 응송의 후임으로 백화사 주지를 맡은 경현(敬賢스님, 1942~)의 구술조사가 그 실증이었다. 그리고 예용해 선생의 <차를 찾아서>에 초의차 전수자라고 하는 지산 화중스님의 가족들 구술조사로 이어졌다. 대둔사 주변은 아직도 당시의 생활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분들이 있었다. <동다송>을 번역했던 김두만의 가족, 대둔사 승려로 탱화장(畵名, 낭월)을 했던 무영 재섭(無影 在燮, 1924~2005)의 가족들이다. 이들은 당시의 대둔사 제다법과 탕법을 고스란히 재현해 주었다.

이 구술조사를 통해서 몇 가지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단편적인 구술조사가 확실한 고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화사에서 응송과 11살 때부터 12년을 같이 했던 시봉자, 그리고 1957년부터 1970년까지의 상좌 내자인 광호엄마, 1970년부터 열반 때까지의 며느리, 당시 백화사와 극락암의 정황을 소상히 기억하는 경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김두만과 무영 재섭의 가족들은 대둔사의 산증인이었다. 또 아직은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연배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초의차의 제다법과 맞물리는 응송차가 증제차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 전승관계에서 전수자의 정확한 확인 등이 성과였다. 응송의 다풍 전수가 세 번째 쟁점인데 위의 구술조사로 어느 정도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응송과 박동춘의 관계이다. 저자에서는 응송의 제자 박동춘이 본인의 차는 <부초와 증제>사이의 절묘한 법이라고 밝힌 바 있다고 하는데, 박동춘의 주장은 본인의 제다는 증제차가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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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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