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의 다풍은 우리나라 차의 원형이다. 차문화의 정수와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차살이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 이후 우리의 차문화권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다풍으로 존숭되어 왔다. 그가 남긴 <다신전>은 조주풍의 다풍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사원을 포함하여 차를 알지 못하는 몽매한 자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한 의도와 취지를 통해 우리차의 정체성이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면 초의차의 원형과 학문적 의의가 무엇이고, 다풍 전승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본고에서는 초의의 다풍 연구에 대한 분석과 진단을 통해 초의차의 전승맥락을 고찰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초의차는 한국차를 대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수․전승에 대한 고찰도 많았으며 그에 따른 왜곡과 오류 또한 많았다. 초의의 행력에서 보이는 공간적 지역과 관련하여 초의차라는 명칭부터 시대 정서까지 창조적 변용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전통과 정통의 맥에서 얼마만큼 정도를 지키고 있느냐의 분석이 최대 관건이고 핵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계와 학계에서는 역사성과 계승에서 견해 차이로 좁혀지지 않은 논쟁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선행연구 검토를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근․현대 차문화사에서 초의-응송까지의 전승은 무리가 없다. 그런데 최근 제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건이 대두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두고 개인지정을 반대하고 나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다. 자본의 논리가 개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분석한다. 서로의 득실에 관한 이해가 지정을 두고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키며 확산되었다.

그래서 본고는 이러한 문제점을 바탕에 두었다. 한국차의 원형이며 우리 차문화 전승의 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의차의 전승맥락을 세부적으로 검토하였다. 초의차의 정의와 초의 의순의 다풍 전승은 물론, 논점과 패러다임의 중심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현안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하여 기존 연구를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우선 역사기록 자료인 문헌분석과 현장조사를 병행하였다. 이어 전승계보와 파편화된 과정들을 수집․정리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이고, 학계 민감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점을 고려해 각종 사료와 방법론 모색, 현장의 중요성, 지역적 특수성, 그리고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분석 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가장 중심에는 연구 분석과 전승맥락의 쟁점과 과제이다. 학술논의와 더불어 언론의 진단을 분석하였으며, 다풍 전수에 대한 저자에서의 논쟁도 현장의 특수성으로 갈무리 하였다. 다양한 형태와 갈래로 유지․지속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어떤 쟁점이 있었는지 검토하였다. 또 그러한 가치와 평가를 통해 향후 한국 차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초의차의 원형과 전승맥락에 대한 긴 논쟁의 정점에서 초의차 인식의 전환을 모색하고 도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초의의순.
초의의순.

초의차의 전통과 오도, 그 쟁점과 과제

초의의 다풍 전승에 대한 논문을 살펴보면 다양한 주제로 접근하고는 있지만 새로운 논거의 제시는 없다고 해석된다. 그렇다고 기존에 발표된 여타의 논문에서 분석하고 있는 전승 경로를 다소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박동춘의 논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사찰에서는 독자적인 제다법이 전승되어 차를 마셔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원에서도 분명한 기록이 문헌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 것이 제다 연구가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남 대흥사 찻독 초의의 제다법이 범해, 서암, 응송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은 차문화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립과 갈등, 종파의 분열과 난립으로 인해 어느 곳에도 반듯하게 정리된 제다법이 전수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진단까지가 차계의 반영이다. 우리차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차계의 인식이 참으로 암담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초의차 다풍의 문헌과 현장을 주목하였다. 현장은 문헌적 기록을 고증하였다. 아직도 대둔사의 제다법이 그대로 전승되어 재현할 수 있었다. 하여 필자는 분석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를 쟁점, 그리고 과제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초의차의 정체성, 덖음(散)차냐? 떡차냐?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초의차의 정체성이다. 초의차가 잎차(덖음 散茶)가 아니라 떡차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초의가 산차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극히 소량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초의가 떡차 외에 산차 즉 잎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다신전>을 읽은 이후의 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초의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후로도 초의차의 주종이 여전히 떡차였던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요지는 <다신전>을 등초한 이후에도 떡차를 위주로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덖음차를 만들고 있는 박동춘은 이와 달리 여기에서 “초의의 제다법을 ‘대둔사의 다법’ 혹은 ‘다풍’이라고 칭했다. 이렇게 전승된 계보를 다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대둔사의 다법’이란 대둔사에 전해진 제다법과 탕법을 포괄하는 용어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맥은 법맥에 준하여 차 또한 전승의 확실한 계보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초의가 전해준 대둔사의 다법은 제다법과 탕법의 유형이 변화되지 않고 이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응송은 초의에 의해 완성된 다법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는 논지를 펴고 있다.

김운학은 1980년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를 의뢰받아 보고한 傳統茶道風俗調査 <現代, 應松 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는 응송이 초의의 다도를 이었다고 하였고 응송이 이은 전통차의 소박한 원형은 외형적인 것보다 차의 본질을 중요하게 여겼던 초의의 차 정신을 이은 것”이라 평가하였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대둔사의 제다법이라는 제목으로 덖음차를 마셨던 역사적인 기록은 문헌을 통해서 확인된다. 응송의 『동다정통고』에서 당시의 정황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초의차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에서도 산차의 기록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문헌 기록은 이뿐만이 아니다. 특히 대둔사 주변에는 아직도 초의의 제다법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문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제다법은 현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둔사는 우리 차문화 역사를 고스란히 고증하고 있는 셈이다.

차의 원리에서 제다의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은 대둔사 다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차는 초의가 <다신전>과 <동다송>을 확정해 가는 과정에서 한국차의 독특한 제다 방법을 터득한다. <다신전>에서 덖음차를 우선적으로 서술했던 이유가 반드시 있었다. 청대에서 이미 유행했던 고급차를 실제적으로 응용해야 한다는 인지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제다법의 섭렵이 완성된 단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떡차의 제다법에서 고급차가 나올 수 없는 유형으로 인식하였던 듯하다. 그럼으로 인해서 초의차의 완성은 잎차인 덖음차로 귀결될 수 있었다.

<각주>

1.차문화 전승 과정에서 우리차는 거시적으로는 ‘전통차’ 미시적으로는 ‘덖음차’ 또는 ‘작설차’로 표현되었다. 덖음차는 제다의 방법으로 구분한 것이고, 雀舌茶는 차의 형태로 구분한 용어였다.

2.응송, 쇠솥에 밥하는 법을 기록해 두었당가? 나무는 이런 나무를 쓰고, 불은 어떻게 때고 말여. 그런거 기록 없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여. 일본서 배워왔냐? 중국서 배워왔냐?-김대성, <근대 차인 응송스님이 말하는 초의제다법, “茶는 뜨거워야 하는거여”>, 『월간 다담』, 1987. 5, 28쪽.

3.정동주, <정동주의 茶 이야기>, (53) 차 만드는 법의 혼란, (60) 한국 녹차의 현실, 국제신문, 2005, 5.

4.이것은 승려로서의 법맥뿐 아니라 다맥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응송이 만든 차와 그의 제다법은 앞서 수십 가지 증거 자료를 통해 제시했던 초의의 떡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이었고, 그것이 비록 <다신전>과 <동다송>에 기초한 것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초의 다맥을 이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초의가 만든 것과 전혀 다른 차를 만들고, 초의의 법계와는 조금의 혈연이 없으면서 초의 다맥의 계승자일 수가 있는가? 더욱이 현재 초의차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차는 떡차를 기본으로 하는 초의차와 전혀 무관하다. 이들이 초의의 제다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초의의 제다법이 아니라 장원의 『다록』에 나오는 명대의 제다법일 뿐이다. 응송의 제다법이 과연 <다신전>의 제다법과 일치하느냐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있다.-정민, <대둔사의 찻독 이야기>, ‘차의 세계’, 2016. 8. 28쪽.

5.정민,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김영사, 2011, 319쪽.

6.더불어 대둔사 다맥에 대한 박동춘의 제언이다. “초의 다맥이 없다, 다른 곳으로 흘렀다는 의견이 제각각이다. 아무튼 다풍, 다법, 다맥 등의 용어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용어에 대해 일정한 정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예민한 것 같다. 다법, 다풍, 다맥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의 논문에서는 다법이라고 표기했다. 다맥이라고 하면 법맥과 같이 뚜렷한 전승의 근거를 요구하는 것 같다. 응송 스님은 다각의 소임을 1911~17년까지 맡으셨다. 17년부터 37년까지 대흥사 주지를 했을 때는 차에 집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법, 즉 제다법과 탕법은 다각 시절에 보았던 다법을 기록하고, 대부분 민멸되기는 했겠지만 초의의 제자들에 의해 전승된 다풍을 응송이 보았을 것이다. 이후 백화사에 은둔하면서 다시 그 다법을 재현하고 했을 것으로 본다. 초의, 범해, 원응, 응송은 법맥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다맥도 전승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맥이라는 것이 법맥과 같이 그 법계가 엄격히 이어져왔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법맥과 다맥은 다르다. 그러므로 대흥사에서는 다법이 전승되어 왔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응송은 사실상 대흥사에 전승된 제다법과 탕법을 이었다고 확신한다.”-박동춘, “응송 박영희의 삶과 차” 응송 박영희 추모 논총 학술대회, 진행단계에서의 인터뷰, 미디어붓다, <응송의 다법(茶法) 초의에게서 연원>, 2015. 11.

7.應松스님 壬辰生이니 현재 87세이다. 주로 대흥사 입구(삼산면 장춘동)의 아담한 정원을 가진 저택에 주하는데... <중략> 18세 출가 후 평생 대흥사 주지와 방장 등을 연임하면서 대흥사에서 살아온 대흥사의 산 역사로 130여 년 전 草衣가 이곳에 남겨 놓은 다풍을 그대로 간직해온 분이다. 오늘날 우리가 草衣를 이야기하고 우리 차의 전통을 이야기하게 된 것도 거의 이 應松노장의 공로다. 應松스님은 평생 차와 함께 살아오기도 하지만, 그의 草衣의 유품을 오늘날에 전해주어 오늘날 우리의 茶典들을 말하게 된 것이다.-김운학, <傳統茶道風俗調査>,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0, 43~45쪽.

8.응송 박영희, 『동다정통고』, 호영출판사, 1985, 30~31쪽.

9.1830년경에 초의가 만든 차는 떡차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이 무렵 초의가 신위에게 완호 탑의 서문을 부탁하며 시와 함께 보낸 네 개의 보림백모(寶林白茅)는 그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1830년경에 초의는 떡차를 만들었고 차의 이론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산차의 제다법을 천착해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1838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따라서 초의차의 완성은 1842년경이며 그가 만든 차는 떡차와 산차였고 특히 1830년 경 이후 산차를 제다하는데 집중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조선 후기 차 문화의 민멸시기에는 대흥사에서도 떡차와 산차를 만들었지만 초의에 의해 산차의 제다법이 정립된 이후에는 산차를 만드는 것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초의는 『다신전』을 편찬하여 차의 이론을 정립했고, 1837년에 『동다송』을 저술하고 『다보서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에서 산차의 원리를 체계화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대흥사에서는 떡차와 산차를 함께 만들었지만 초의가 차의 이론을 정립한 이후에는 귀품의 산차를 만드는 방법에 천착하여 수준 높은 제다법을 완성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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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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